<78화>
깜짝 놀란 게 자존심 상해 그의 등을 내리쳤다. 맞으면서도 뭐가 좋은지 로그리예는 한참을 웃어 댔다.
“자자. 안아 줄게.”
“필요 없어.”
“그래도 내가 있는 편이 조금 더 안심되지 않아?”
그건 그렇다. 검술이 수준급이니 암살자가 들어와도 내 목이 달아나는 일은 없겠지.
들러붙는 건 조금 귀찮지만 펠리온과 라파일이 떠올라 영 싫지만은 않은, 그런 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평소보다 가벼운 느낌에 얼굴을 다시 보았다.
“머리 잘랐어?”
“공주님이 짧은 게 더 좋다며.”
이런 걸 보면 또 기분이 이상하다. 제2의 라파일을 만드는 건 아닌가 싶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밀어 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몸을 반쯤 세워 나에게 보았다.
“응? 어디 가게?”
“산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로그리예의 어깨를 밀어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가 짧고 가증스러운 비명을 내며 팔을 교차해 제 몸을 가렸다.
“앗, 이러기엔 공주님이 너무 어린데?”
헛소리하는 로그리예를 무시하고 숄을 걸쳤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따라오지 마.”
“공주님 혹시 사춘기야?”
“어쭈? 까분다.”
다가가 이마에 딱밤을 놓아 주고 다시 몸을 돌렸다.
평소 같으면 아픈 척하며 치댔을 놈이 조용했다. 문을 열기 전에 뒤를 돌아보자 그는 침대에 앉은 채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은 채였다.
“약혼을 무를 순 없어.”
저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제 2주도 안 남았는데 당연히 못 무르지.
눈을 대충 뜨고 뚱하게 그를 보았다.
그러자 로그리예의 얼굴 위로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이거 아니야?”
“아니야.”
그가 진지했던 얼굴을 풀고 배시시 웃었다.
하여간. 속 모를 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방문을 열었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런 거니까 따라 나오지 마.”
“알겠어…….”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로그리예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아치형 천장 아래로 길게 늘어진 달그림자를 밟으며 기억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문을 힘주어 밀자 어둠에 잠긴 내부가 드러났다.
벽에 걸려 있는 촛대를 빼내 불을 붙였다.
수십 개의 거대한 초상화들이 음영 진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모르는 얼굴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율시안…….”
파리한 안색과 핏기 없는 입술. 푹 꺼진 눈두덩이, 흐릿한 눈빛.
초상화 속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내가 알던 생기 넘치던 어린아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래에는 율시안의 이름과 함께 재위 기간이 적혀 있었다.
나는 다가가 가만히 액자를 쓸어 보았다.
황제로 있을 때, 마음이 약해지면 항상 이곳에 들어와 선왕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의 역사를 되짚으며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실수와 본받아야 할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나약함을 떨칠 수 있었다.
나는 율시안도 강인하게 자라길 바랐기에 아이를 종종 이곳에 데려오곤 했다.
하지만 율시안은 나와 달리 초상화실을 무서워했다.
처음 데려왔을 때는 거대한 얼굴들이 전부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다며 울음을 터트렸었다.
‘그랬던 아이가 이곳에 걸려 있다니.’
자신이 무서워하던 곳에 영원히 갇힌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참을 자리에 서서 어른이 된 율시안의 초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게텔린 백작 부인의 방에서 봤던 초상화의 원본이 걸려 있었다.
액자 안의 나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약해진 마음을 다잡고자 온 것인데 오만하고 당당한 표정의 내 옆에 나란히 있는 율시안을 보자 오히려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착잡한 감정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로브를 입은 사람이 맞은편 벽 앞에 서 있었다.
얇고 커다란 후드를 깊게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골격을 보아하니 남자인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촛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남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멈춰.”
내 경고를 무시하면 사람을 부르거나 공격하려고 했는데, 그는 순순히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촛대로 의문의 남자를 비춰 보며 물었다.
“정체를 밝혀.”
그가 느리게 손을 들어 후드를 천천히 뒤로 넘겼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가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한 번 본 얼굴은 좀처럼 잊지 않는 편인데, 누구인지 모르겠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
남자가 조금 부자연스럽게 감탄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얼굴……. 이 얼굴은 처음이겠군요.”
“‘이 얼굴’? 얼굴이 여러 개라도 있나 봐?”
남자는 그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초상화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뒤로 물러나 거리를 좀 벌렸다.
그대로 천천히 남자에게서 멀어지고 있을 때, 미소만큼이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로즈라에게까지 가셔서 정작 중요한 것은 듣지 못하셨기에 직접 뵈러 왔습니다.”
“뭐야. 로즈라가 보낸 거였어?”
물론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로즈라는 궁전 안에 누군가를 들여보내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소식이나 물건을 전달할 때에는 궁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위장시키거나 술집까지 나와 달라는 말을 은밀하게 전했다.
혹시 운 좋게 궁전으로 사람을 들여보냈다고 해도 저런 수상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라고는 절대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런 질문을 던진 건 남자의 목적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이면 정보를 믿는 척하고 역으로 이용하면 되니까.
로즈라를 알고 있는 것도, 내가 로즈라와 거래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도 조금 의외였지만, 레바나 신전쯤 되면 알아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건 아닙니다.”
남자가 손을 뻗어 초상화를 쓰다듬었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등에는 보라색 태양이 찍혀 있었다.
“레그레시오.”
내 목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는 눈빛이 짐짓 따뜻하기까지 했다.
“너희가 나를 깨운 거야?”
“너희가 아니라, 제가 폐하를 깨웠습니다.”
가만히 손등을 바라보자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세히 보시겠습니까?”
“아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나를 깨운 이유가 뭐야?”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내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그저 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나라와 영토, 영해, 백성들. 그때의 찬란한 영광과 폐하의 황좌, 그리고 제 자신까지도.”
나머지는 다 이해되는데, 마지막은 무슨 말이지?
내가 내 것이라 칭했던 사람들은 전부 수족처럼 부리던 이들뿐이었다. 하지만 되짚어 봐도 그들 중에 이런 광기를 보일 만한 사람은 없었다.
저렇게 차분하고 온화한 느낌을 풍기는 녀석도 없었고 말이다.
무엇보다 다들 평범한 사람이라 100년이 지난 시점까지 살아 있을 리 없었다.
순간 불길하게도 라파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가 나를 죽인 게 아니라면 나를 살리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파일이라고 하기에도 걸리는 게 있었다.
그라면 나를 깨워 놓고 지금까지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면 몰라도.
“나는 다시 가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남자가 나를 마주 봤다. 그의 눈빛은 게텔린 백작 부인의 방에서 만난 에리오와 비슷했다.
오래 끓인 사과잼같이 향기롭지만 눅진눅진한, 피부에 달라붙는 듯한 시선이었다.
“폐하께선 가지시게 될 겁니다.”
등골이 서늘했다. 저 말이 암시하는 것은 내 위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제거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네가 원하는 게, 내가 나라를 이어받는 거야?”
“아니요. 저는 모든 걸 되돌리고 싶은 겁니다.”
남자가 순식간에 다가왔다. 움직일 새도 없이 촛대를 쥔 내 손 위에 그의 손이 겹쳐졌다.
그는 그대로 내 손을 움켜쥔 뒤 허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맞췄다.
“제가 폐하를 죽이기 전처럼, 모든 것을 돌려놓을 겁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를 바라봤다.
“……라파일?”
그의 입술이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예, 폐하.”
거센 바람에 하나뿐인 촛불이 꺼진 것처럼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어서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라파일이라고? 하지만 생김새가 전혀 다른데.
그리고 그는 분명 펠리온과 함께 죽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다면……, 펠리온은? 펠리온도 살아 있는 건가?
생각이 깊어지려는 순간, 촛대를 쥔 손에 으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저를 앞에 두고.”
그의 눈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흉흉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또 펠리온 리베든을 떠올리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