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궁전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면 옥상 광장으로 갈 수 있는 문이 있다.
그리고 옥상의 뒤편은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곳을 자주 찾곤 했다.
숲 위로 어둠이 덧칠해져, 하늘과 땅의 경계가 흐려질 때가 좋았다. 달과 별빛으로만 밝혀진 세상을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하지만 이라네리아 공주의 몸에 들어오고 나서는 단 한 번도 올라가지 않았다.
“또 여기 계셨습니까, 폐하?”
그러니 이건 꿈이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라파일이 내게 다가오고 있으니, 꿈이 맞다.
그는 무의식 속에 있는 사람일 뿐이다.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묻고 싶었다.
진짜 나를 죽였느냐고.
물론 이미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다.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율시안을 닮은 키네시아를, 라파일을 닮은 플로레타를, 로그리예의 은빛 머리카락을 바라볼 때마다 의문이 치솟았다.
정말 그가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이 자리에서 묻고 싶었다. 현실에서는 그를 만날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나 입술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고생했어, 라파일. 네 덕에 무사히 성전(聖戰)을 마칠 수 있었어. 앞으로도 에피파네스의 황실은 샤마흐에게 우호적일 거야.”
“……왜.”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으나 청보라색 눈동자는 이슬을 맞은 듯 처연했다.
“왜 다신 안 볼 사람처럼 말씀하십니까, 폐하?”
알겠다. 이건 과거의 기억이다. 성전을 끝내고, 승전 선언과 함께 보상에 관한 조약까지 마무리한 뒤에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었다.
“다시 안 볼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자주 보긴 힘들겠지. 너도 신전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
“돌아가지 않는다면요?”
라파일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신전이 아니라 당신 곁에 있겠다고 하면, 샤마흐가 아니라 당신을 섬기겠다고 하면……. 저를 곁에 두시겠습니까?”
“라파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결혼을 유지하기로 했잖아. 그게 계약의 내용이었고. 그리고 나는…….”
“펠리온 백작에게 마음이 있으셨죠.”
“…….”
“하지만 저 때문에 포기하셨다는 걸 압니다. 폐하께선 이해관계로 얽힌 관계에도 충실하신 분이니까요.”
그가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난간에 등이 닿고 그의 팔이 내 허리에 감겼다.
몇 년간 부부로 있었지만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어차피 성전이 끝나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모든 게 끝나야 할 날, 라파일은 절대 침범하지 않던 선에 발을 올렸다.
“사랑해요, 이라네.”
“나는 아니야.”
손을 떼어 내려고 하자 그가 더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성전이 끝나자마자 이혼을 하면 폐하께서 샤마흐 신을 정복 전쟁에 이용했다는 말이 나올 겁니다. 그러니 폐하께는 아직 제가 필요합니다.”
그의 말이 옳다. 나는 그가 필요했다. 그런데 왜 본인이 애원하듯 말하는 걸까.
“나는 평생 너와 같은 마음이 되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평생 저 외에는 다른 사람을 곁에 두지 않으시겠죠. 연인은 되지 못해도 배우자는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거면 됩니다.”
“고난을 자처하는구나.”
“네. 그러니 함께해 주세요.”
라파일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이런 다음 어떻게 되었었더라? 나는 고개 숙인 그의 얼굴에 손을 댔다.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꿈이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깨어나려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자 시선이 닿는 곳마다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라파일의 신성한 음성에도 묘한 목소리가 섞였다.
“그거면 될 줄 알았는데……. 정말 그거면…….”
그의 몸이 공간과 함께 이리저리 비틀렸다.
키가 작아지고 골격이 줄어들었다.
선명하던 청보라색 눈동자는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내 앞에 서 있던 라파일은 어느새 율시안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왜 저를 사랑해 주지 않으셨나요?”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다가, 이내 율시안의 목소리만 남았다.
“율시.”
“어머니. 왜 저를 한 번도 다정하게 안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셨어요?”
날카롭게 선 아이의 목소리가 내 죄책감을 파고들었다.
“어머니가 모든 걸 망쳤습니다! 아버지도, 펠리온 백작도, 이 에피파네스도! 저마저도!”
율시안이 힐난은 비명과도 같았다.
아이의 몸이 빗줄기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팔을 벌려 받아 내자 난간에 허리가 걸렸다.
몸이 뒤로 넘어가며 빠르게 추락했다.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율시안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이의 몸은 내 손이 닿자마자 사라졌다.
충격도 없이 등 뒤에 땅이 닿았다. 눕혀진 내 위에 올라탄 사람은 율시안이 아니었다.
황금색 눈동자와 머리카락. 내 아들과 꼭 닮은 아이, 키네시아였다.
그녀의 뒤로 전쟁의 참상이 지옥도처럼 펼쳐졌다.
키네시아의 황금색 머리카락이 새빨간 불티, 새까만 잿가루와 뒤섞여 흩날렸다. 주변에는 녹슬고 망가진 병장기 수백 개가 죽은 나무처럼 땅 위에 꽂혀 있었다.
“당신이 행복했던 우리 가족을 망칠 거야. 당신이!”
키네시아는, 율시안이 그러했던 것처럼 원망과 애정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저주했다.
“이라네 필로티메오마이 벨로아스, 타인이 흘린 피로 영광이란 이름을 쓴 자, 오만한 황제여!”
벼락처럼 꽂히는 목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아아아아!”
절규하는 소리가 내 입을 빠져나와 다시 귀로 돌아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몸을 웅크렸다.
“……님, 공주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건 악몽일까? 아니면 현실인가?
나는 황제인가, 나약해진 나라의 막내 공주인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심장을 옥죄는 것 같은 고통에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허억, 헉!”
그때, 강한 손길이 내 어깨를 낚아챘다.
“이라네!”
그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마자 커다란 체온이 몸을 뒤덮었다.
나를 완전히 감싸 안은 온기가 등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그냥 악몽일 뿐이야.”
“흡, 으윽…….”
“숨을 쉬어. 그래도 괜찮아.”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고개를 들었다.
로그리예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청보라색 눈동자가 내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너, 내가, 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랬지.”
그는 여상스러운 투로 대답하고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리고 눈두덩이 위에 입을 맞추며 나를 다시 자리에 눕혔다.
“안아 줄게, 더 자.”
“필요 없어.”
“응. 나도 사랑해.”
웃기게도 그의 온기를 밀어 내지 못했다.
황제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수치가 있어서도 안 된다.
그래야 하는데…….
‘지금은 황제가 아니잖아.’
키네시아의 그 말이 저주로 남기라도 한 걸까? 자꾸만 마음이 한쪽으로 쓰러진다.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 주고 있는 로그리예의 팔이 사라지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오늘만이야.”
로그리예는 나의 약해 빠진 말을 비웃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되돌려 주었다.
“그래. 오늘만.”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카락을 연신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얇은 천 너머로는 무겁고 빠른 심장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 길게 드리워진 악몽의 그림자가 희미해졌다.
“요즘에도 자주 악몽을 꿔?”
“내가 악몽을 자주 꿨었나?”
“그렇지. 제법. 어렸을 때도 그렇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공주님은 악몽에 시달리고 나면 티가 나.”
전쟁에서 본 광경 때문인지 종전 이후에도 제법 자주 악몽을 꿨었다.
후계자 생산을 위해 라파일과 동침하는 날이 많았기에 그는 내가 악몽을 꾼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내 체면을 위해 항상 잠든 척을 해주었다. 나 역시 그런 그를 모른 척했다.
그렇게 서로를 눈감아 주고 있었기에 내 악몽에 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티가 났을 리 없다, 고 생각하다가 사고의 오류를 깨달았다.
‘내가 아니라 몸 주인에 대해 말한 거겠지.’
습관처럼 황제 운운하는 말을 꺼낼 뻔했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았다. 머리맡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하여간 어떤 부분에서 웃음이 터지는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못 들은 척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등과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을 느끼다 보니 어느새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오래 잘 순 없었다.
아침 정무 회의가 끝난 뒤에 룩소르와 키네시아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반란에 대해 논의할 생각이었으므로 미루거나 늦장을 부릴 수가 없어, 잠에 취한 몸을 겨우 일으켰다.
혹시 악몽을 꾼 티가 날까 봐 거울을 봤지만 얼굴은 멀쩡하기만 했다.
‘저놈은 괜히 사람 신경 쓰이게.’
민망함에 괜히 로그리예를 흘겨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는 평소와 달리 내가 준비를 다 끝마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원래라면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았을 테지만 오늘은 봐주기로 했다.
‘어제 신세 진 것도 있고, 지금은 얼굴을 마주하기 민망하니까.’
잠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밖으로 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회의가 끝났는지 안에는 룩소르와 키네시아만 남아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으로 끌어안으려는 룩소르의 팔을 홱 피한 뒤 자리에 앉았다.
룩소르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 리아. 할 말이 있다고?”
“응.”
나는 자리에 앉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