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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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게텔린 백작 부인은 펜을 내려놓았다. 안으로 들어온 집사가 게텔린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네페르트 후작가가 반란의 조짐을 보인다고 합니다.”
“어디서 들은 소식이지?”
“하인이 네페르트 후작가에서 일하는 고향 친구에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요즘 후작가에 귀족들이 독대하러 온다더군요.”
한꺼번에 모아 두고 파티를 하는 경우는 많아도, 줄지어 독대하는 건 좀 이상한 일이긴 했다.
‘자기가 왕도 아니고, 독대는 왜 받는 거지?’
게텔린 백작 부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해서 알아보니 네페르트 후작 부인과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사병을 정비한다고 했습니다.”
“후작 부인이 제 무덤을 파는군.”
“그게……. 왕실에서는 모르는 눈치입니다.”
“그럴 리가.”
국왕이나 재상은 모른다 치더라도 이라네리아 공주는 알았을 것이다.
6년 전, 10살일 때에도 혼자 함정을 파 게텔린을 처단한 괴물 같은 아이다. 그런데 저렇게 티 나게 움직이는 걸 모른다고?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전에 기사나 병사 수도 똑같고, 특별 훈련을 하지도 않습니다. 지방에 주둔하는 병력의 움직임도 없다고 합니다.”
집사의 말에도 게텔린 백작 부인의 생각은 굳건했다.
그녀는 이라네리아 공주의 음흉함을 믿었다.
“분명 앞에 함정을 파 놓고 멍청이들이 제 발로 뛰어들길 기다리고 있는 거야.”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집사가 게텔린 백작 부인에게 첨언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왕실에 청혼서를 넣은 뒤에, 이미 왕실에서 후작가를 한차례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다고?”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양자, 트리에탄도 반란을 준비하는 사람의 아들치고는 지나치게 열렬히 구애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키네시아 공주도 트리에탄을 확실하게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청혼서를 넣기 전보다 조금 더 유해진 것 같았다.
“사교계에서는 이미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양자가 첫째 공주와 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원래 공주의 혼처가 정해진 것 같으면 그 가문에 연줄을 대러 가는 사람들이 많기 마련이다.
키네시아 공주가 트리에탄을 마음에 들어 했다면 지금 이 상황은 딱히 의심스러울 게 없었다. 그건 곧 이라네리아 공주가 모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게텔린 백작 부인은 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라네리아 공주는 무서운 사람이다.
그녀를 암살하려거나 돈으로 장난치던 이들은 전부 죗값을 치러야 했다.
‘룩소르 국왕이 마음을 다잡았다느니, 키네시아 공주의 현명함 덕분이라느니……. 그런 말은 이라네리아 공주를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말이지.’
게텔린 백작 부인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이라네리아 공주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라네 공주가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다.
그러나 엉큼하고 흉악한 속내와 달리 먼저 대들지 않으면 물어뜯지 않았다.
반면에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가만히 있어도 시비를 거는 고약한 심보를 가졌다.
‘만약 반란이 성공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그 여자의 발치에 무릎 꿇는 것은 정말 죽을 만큼 싫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일을 망쳐야 한다.
‘이라네리아 공주가 반란을 눈치 못 챘을 수도 있으니 가서 알려 봐?’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게텔린 백작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단순히 네페르트 부인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반란에 실패해 아주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했다.
하지만 이라네리아 공주에게 알렸다가 그걸 네페르트 부인이 눈치채기라도 하면?
분명 반란은 접고 시치미를 뗄 것이다.
‘내부를 분탕질 쳐 놔야겠어.’
목전까지 갔다가 실패하도록 말이다.
게텔린 부인은 지략가가 아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간질만큼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었다.
“집사. 네페르트 저택에 다녀간 귀족 중에 가장 사병을 많이 보유한 자가 누구지?”
“카랄드 백작입니다.”
“은밀히 연락을 넣어 만나자고 전해. 반란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고.”
“예, 주인님.”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답장이 왔다.
게텔린 백작 부인은 바로 채비를 하고 호위 한 명만 대동한 채 말을 타고 카랄드 저택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에는 앉지도 못한 채 서성이는 카랄드 백작이 있었다.
그는 백작 부인을 보자마자 대뜸 소리를 질렀다.
“서신에 적힌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반란, 반란이라니요!”
“이미 다 알고 왔으니 숨길 생각하지 말아요.”
게텔린 부인이 카랄드에게 다가갔다.
“협박할 생각으로 온 건 아니에요, 백작.”
“그럼 혹시 게텔린 백작 부인도 가담할 생각입니까?”
그렇게 물어보는 그의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기뻐하거나 안도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해 보였다.
게텔린 백작 부인은 다가가 카랄드 백작의 양손을 맞잡았다.
“카랄드 백작, 그래도 제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가장 교류를 많이 한 분이 백작이잖아요.”
“그, 그렇지요.”
“저희 딸과 백작의 딸은 같은 가정 교사 밑에서 공부한, 자매 같은 사이고요.”
“맞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달려왔답니다.”
카랄드 백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뭘, 걱정하시는 겁니까?”
“이라네리아 공주요. 제 남편이 어떻게 붙잡혔는지 아시나요?”
“그거야…….”
다들 이라네리아 공주의 주도하에 독살의 정황이 드러났다는 것만 알았지,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카랄드 백작은 이런 와중에도 호기심이 동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모두 이라네 공주가 파 놓은 함정이었어요.”
게텔린 부인은 가주 일을 맡으며, 게텔린이 절대 보여 주지 않던 서류에도 손을 댈 수 있게 되었다.
가문 내의 재산은 서류 속 재산과 달랐다. 숨겨 둔 돈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당장 그 돈의 위치부터 찾아다녔다.
그러다 기밀 서류를 통해 마법 금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왕이 세금을 위해 저택을 조사하기 위해 온다고 했을 때, 비자금을 숨길 용도로 만든 것이었다.
게텔린 부인은 부푼 가슴을 끌어안고 금고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금고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공주의 예쁨을 받던 아르만과 그가 알려 준 세금 조사에 관한 정보.
독살 계획을 알아차렸을 때 바로 게텔린을 검거하지 않은 것.
이라네리아 공주가 아르만을 곁에 두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게 문제였다. 그때부터 게텔린은 이라네리아 공주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다.
이라네리아 공주는 일부러 세금 조사가 있을 거라는 정보를 흘렸다. 게텔린이 제 손으로 숨겨진 돈을 한곳에 모으면 홀라당 가로챌 생각이었던 것이다.
게텔린 백작은 그것도 모른 채 돈을 전부 들고 도망치려고 했고, 이라네리아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게텔린이 숨겨 두었던 보석을 한 톨도 남김없이 빼앗아 갔다.
게텔린은 이라네리아의 손바닥 위에서 완전히 놀아난 것이다!
‘이게 정말 10살짜리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라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을 때, 게텔린 부인은 소름이 끼치다 못해 두려웠다.
자신에게 살길을 알려 준다면서 제안한 일도 알고 보니 전부 함정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라네 공주는 거래를 제안하는 척했지만 그것 역시 게텔린 백작 부인을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귀족파의 정점에 있던 자를 공공연한 자리에서 무릎꿇림으로써 본보기를 보이고, 세력을 키우는 동안 다른 귀족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귀족들은 멍청하게도 이라네 공주에게 이것저것 뜯기며, 타국이 내정 간섭을 하기 위해 침투하는 것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게텔린 부인은 그 모든 것을 카랄드 백작에게 말했다.
“이라네리아 공주는 폭군 이라네보다 더 무서운 사람, 아니. 괴물이에요.”
“어쩐지 다들 그 이름으로 부르더라니…….”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카랄드가 다급하게 게텔린 부인에게 매달렸다.
“그럼,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이라네 공주가 어떤 계략을 꾸미는지 저도 예측할 수 없어요. 하지만 공주는 분명 전부 알고 있을 거예요.”
카랄드가 손을 벌벌 떨며 제 얼굴을 가렸다.
“사실 저는 반란까지는 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모든 하겠다고는 했지만, 잘못되면 다 죽는 것 아닙니까?”
“맞아요. 그래서 이렇게 달려온 거예요. 카랄드 백작이 걱정되어서요. 내가 이라네 공주에게 당한 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시죠?”
“알다마다요.”
“왕실을 공격하려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요?”
“무서울 정도로 잘 압니다.”
“그래요. 그들의 말로를 보세요. 백작은 지금 이라네 공주가 파 놓은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카랄드가 허둥지둥 잡힌 손을 빼냈다.
“당장 이 일을 그만두어야겠습니다!”
“안 돼요!”
게텔린 부인은 한숨을 돌리고 카랄드를 설득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요.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심보에, 독선적이고, 오만하고, 유치하고, 반드시 복수하고.”
“……그, 맞습니다.”
“지금 손을 떼면 카랄드 백작을 가만히 둘까요? 그러다 만약 그녀가 반란에 성공하기라도 하면 백작만 곤란해지지 않겠어요?”
카랄드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가족 같은 사이가 아닙니까. 부디 게텔린 부인의 지혜를 빌려주십시오.”
“일단 후작 부인의 말에 따르세요. 그리고 막바지에 군대를 빼는 거예요.”
“하지만 이미 사병을 수도 근처까지 옮겨 두었습니다.”
“그건 협박당해서 그랬다고 둘러대면 되죠. 아! 아니면 국왕군과 함께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군대를 같이 공격한다거나요.”
“좋은 방법이로군요.”
“기왕이면 다른 귀족들에게도 알려 주세요.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반란이 확실하게 실패해야 효과가 있어요. 아니면 어영부영하다가 중간에 끼어 누가 이기든 목숨을 잃게 될 거예요.”
카랄드 백작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다른 사람도 포섭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정말 감사합니다.”
카랄드 백작은 자신이 놀아난 것도 모른 채 게텔린 백작 부인의 손을 잡고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