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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74화 (74/151)

<74화>

***

“리아…….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라네리아를 보며 플로레타가 포넨트에게 속삭였다.

포넨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 동생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라네리아는 언제나처럼 심드렁한 얼굴로 귀족들이 건네는 선물을 받고 있었다.

“이라네가? 난 잘 모르겠는데?”

“아니야. 잘 봐 봐. 평소랑 다르다니까.”

포넨트는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여 이라네리아를 보았다. 다시 봐도 평소와 똑같다. 이번엔 오른쪽으로 기울여 보았다. 역시나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그냥 하는 말로 치부하기엔 플로레타의 표정이 너무 걱정스러웠다.

포넨트는 제 옆에 서 있는 키네시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너는 알겠냐?”

키네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포넨트는 옆으로 고개를 더 빼내어 로그리예를 보았다.

“너는?”

“…….”

포넨트의 질문을 듣지 못한 것인지 듣지 않은 것인지, 로그리예는 굳은 얼굴로 이라네리아만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포넨트가 턱짓으로 로그리예를 가리키며 플로레타에게 말했다.

“이상한 건 저놈인데?”

“로그리예 공자는 원래 이상한 사람이었어.”

“그건 그렇지.”

포넨트가 쉽게 수긍하며 이라네리아를 한 번 보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음…….”

플로레타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듯한 소리만 내자 키네시아가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생일인데 기뻐하지 않네.”

플로레타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포넨트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건 원래 그렇잖아. 무도회를 별로 안 좋아하니까 반응이 저런 거겠지.”

플로레타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생일하고 무도회는 싫어해도 선물은 좋아했단 말이야.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흥!’ 이런 느낌이나 ‘훗.’ 이런 느낌이 없잖아.”

그게 무슨 느낌인데.

포넨트가 한쪽 볼을 구기며 제 동생에게 핀잔을 주었다.

“너는 19살이나 먹어 놓고 어휘력이 왜 그 모양이냐?”

“포넨트는 20살이나 되어 놓고 눈치가 왜 그 모양이야……?”

“어쭈? 한 마디를 안 지지!”

키네시아는 티격태격하는 제 형제들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이라네리아를 보았다.

플로레타의 말대로 좀 기운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와인만 홀짝거리고 있는 로그리예에게 물었다.

“뭐 아는 거 있어? 에피파네스에 온 뒤로 계속 붙어 다녔잖아.”

“글쎄.”

모호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줄곧 차갑고 권태로운 표정을 하고 있던 그가 돌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극적인 변화에 키네시아가 로그리예의 시선이 머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이라네리아가 다가오고 있었다.

포넨트가 이라네리아에게로 가며 툭 물었다.

“선물은 다 받았냐?”

이라네리아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로그리예가 이라네리아의 옆으로 가서 섰다. 그는 이라네리아의 표정을 살피다가 작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피곤해 보이는데, 나한테 기댈래?”

“아니.”

이라네리아는 평소처럼 차갑게 거절하고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플로레타가 그녀를 쪼르르 따라갔다.

“리아. 내가 주물러 줄까?”

“아니.”

포넨트가 플로레타에게 팔을 걸치며 나란히 걸었다.

“야. 그럼 초콜릿이라도 먹을래? 나 받은 거 있는데.”

“아니.”

키네시아는 이라네리아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해서 말을 걸려는 두 형제를 붙잡았다. 그리고 귀찮게 굴지 말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눈치채고 걸음을 멈췄지만 로그리예는 여전히 이라네리아의 옆에 있었다.

포넨트는 로그리예가 더 멀어지기 전에 재빨리 팔을 뻗어 제 친구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윽!”

짧은 비명과 함께 옆에 서 있던 놈이 사라졌으나 이라네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키네시아는 혼자 멀어지는 이라네리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서로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는 형제들과 친구에게 말했다.

“며칠만 혼자 두자.”

“벌써 일주일 가까이 저러고 있는데 며칠 더 둔다고 괜찮아질까……?”

플로레타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물었다.

포넨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도대체 평소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니까?”

플로레타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나긋하게 말했다.

“포넨트는 조용히 해.”

가만히 있던 로그리예도 거들었다.

“맞아. 네가 그러니까 포넨트인 거야.”

두 사람에게 말로 얻어맞은 포넨트가 연신 말문이 막힌 소리를 내뱉었다.

키네시아는 한숨을 내쉬고 포넨트와 플로레타를 놓아주었다.

“내가 가 볼 테니까 너희는 더 놀다가 와.”

그녀는 이라네리아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라네리아는 문 앞에서 소피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피아는 이라네리아가 돌보던 아이들 중 기억력이 가장 뛰어나 궁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녀는 행정관으로 일하며 다른 아이들이 가져다준 정보를 모아 이라네리아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래서 내내 표정이 안 좋았던 건가 싶어, 키네시아는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이라네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 온 사람이 키네시아인 것을 확인한 그녀가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들어가게?”

“응.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그냥 생신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소피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라네리아가 소피아의 말을 받아 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고, 중요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하려고. 같이 갈래?”

키네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라네리아와 함께 걸었다.

플로레타가 포넨트에게 뭐라고 하는 것에 동참하긴 했으나 사실 키네시아 역시 이라네리아의 태도에서 큰 변화를 느끼는 건 아니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빤히 봐?”

퉁명스럽고 눈치 빠른 것도 여전하고 말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

이라네리아는 소피아가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갔다.

키네시아까지 자리에 앉자 소피아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애들이 네페르트 저택을 감시하다가 발견한 게 있다고 해서요.”

“뭔데?”

“3주 전부터 귀족들이 자주 드나든다더라고요. 그리고 그녀의 저택에 다녀간 귀족은 어김없이 사병들을 움직인다고 하던데요.”

키네시아가 소피아에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사병을?”

“네. 그것도 수도 쪽으로요.”

명백한 반란의 조짐이었다.

키네시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라네리아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반응도 심드렁했다.

“그래?”

그게 다였다. 키네시아는 기가 막히다 못해 헛웃음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자신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태도라니. 동시에 무슨 방법이 있는 건가 싶어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이라네. 알고 있던 거지?”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양자가 너한테 계속 집적거렸잖아. 제 양자를 부마로 만들어서 나라를 주무르려던 속셈이었겠지. 그런데 그게 황자 파라돈 놈 때문에 잘 안됐으니 다른 방법을 모색한 게 아니겠어?”

“요르고스?”

키네시아는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쾌해 인상을 찌푸렸다.

앞에 있던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본 것들을 말했다.

“네페르트 공자가 공주님께 다가갈 때마다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던데요. 저는 공주님과 요르고스 황자가 무슨 사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소피아. 끔찍한 소리 하지 마.”

키네시아는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사람처럼 얼굴을 구겼다.

픽 웃은 이라네리아가 말을 이었다.

“양자를 들였을 때부터 왕실이 제 것인 것처럼 느껴졌겠지. 그런데 파라돈의 심기를 건드릴 순 없고…….”

“그래서 우리에게 불만이 있는 귀족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거구나?”

“그렇겠지. 황자 파라돈 놈한테 너를 제물로 넘기면 관계가 망가지지도 않을 거고, 명분이야 신의 이름만 한 게 없는데 마침 레바나하고도 친하잖아?”

정확한 판단이었다. 소피아가 이라네리아의 추론에 증거를 붙여 주었다.

“레바나의 대신관도 이전보다 더 자주 저택에 방문하는 것 같았어요.”

“쯧쯧. 제집에 들어온 게 독사인 것도 모르고. 그런 통찰력으로 반란을 일으켜 봤자 성공할 수나 있겠어?”

이라네리아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에, 키네시아는 플로레타가 하던 걱정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대화에 집중했다.

“그럼 나는 셰피오 자작에게 연락해 군대를 산맥 뒤로 집합시키라고 할게.”

“이젠 시키지 않아도 혼자 잘 생각하네? 제법이야.”

드문 칭찬에 키네시아의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라네리아의 말에 금세 미소를 거뒀다.

“하지만 당장은 말고. 군사를 움직이는 건 전하와 상의를 해야 하니까. 그리고 중요한 건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아니야.”

“그럼?”

“두 번 설명하니 귀찮으니까 전하랑 같이 있을 때 이야기하자. 일단 키네시아 너는 다시 연회장으로 가서 귀족들의 동향을 살펴.”

“알겠어.”

이라네리아는 키네시아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방문이 닫히고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이라네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라네리아는 키네시아를 보며 제 아들을 떠올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소피아가 묘한 눈으로 이라네리아를 보고 있었다.

“뭘 봐?”

뾰족한 말투에도 소피아는 미소 지었다.

“그냥, 언니를 딸 보듯이 보셔서요.”

귀신같기는. 이라네리아는 놀란 심정을 티 내지 않으며 말을 돌렸다.

“게텔린 부인은 이제 제법 사교계에서 자리를 잡았나?”

“네. 3년 전부터는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게텔린 쪽에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살짝 흘려. 알면 안 망치고는 못 배길 테니까, 병력 분산에 도움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나가 봐.”

“예, 공주님.”

소피아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이라네리아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옅고 긴 숨소리가 조용히 흩어진 뒤, 그녀의 위로 적막이 어둠처럼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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