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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72화 (72/151)

<72화>

작성자의 이름도 눈에 익었다.

슈텔레. 그녀는 샤마흐 신전의 주교로, 신전 앞에 버려진 어린 라파일을 친자식처럼 키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와 라파일이 결혼할 때, 신권과 황권이 얽히는 것을 걱정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책의 중앙부를 펼쳤다.

[……아이는 내게 자신이 황제를 살해했노라 고해했다.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고 싶었으나 그의 눈에 깃든 죄책감에는 거짓이 없었다.

아이는 밀랍처럼 굳은 얼굴로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안아서 달래도 내게 기대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반나절을 서 있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걱정스러운 이 마음을 들어 줄 이는 샤마흐뿐이시니.

샤마흐시여. 부디 당신의 아이를 가엾이 여기어 보살펴 주소서.]

로즈라가 내 곁으로 와 일기장의 내용을 들여다봤다.

“그 이후로 샤마흐 교단은 성 라파일을 파면하고 교단의 명부에서 지워 버렸어요.”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도무지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치적인 야망도, 재물을 모으고자 하는 욕심도 없었다.

방 안에 들어온 거미 한 마리도 못 죽여서 번번이 산 채로 정원에 놓아주었고, 내 손에 작은 가시만 박혀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 라파일이 사람을, 그것도 부인이었던 나를 죽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뭔가 오해가 있을 거야.’

라파일이 울다가 바로 사라졌다고 했으니 슈텔레 주교는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써 놓은 거겠지.

내 죽음에 충격을 받은 라파일이 헛소리를 한 것일 수도 있고…….

슈텔레 주교가 쓴 하나의 진실을 부정하기 위해 수많은 가설을 떠올렸다. 그것들이 얽히고설켜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현기증이 일어 주변에 있는 것을 아무거나 잡으며 눈을 꾹 내리감았다.

겨우 어지럼증을 가라앉힐 즈음 로즈라가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책장으로 다가가 한쪽을 강하게 밀었다.

책장이 돌아가며 뒷면이 드러났다.

뒷면 역시 책장이었으나 반쯤 비어 있던 앞면과 달리 꽉 차 있었다.

“5년간 성 라파일, 펠리온 리베든 백작에 대해 모은 자료예요. 대부분 개인적인 기록들이라 와전되고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공통점만 모아 보면 진실이 보이기 마련이죠.”

“그 진실이, 뭔데?”

목이 갈라져 목소리가 뚝 뚝 끊겨 나왔다. 로즈라가 말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창백한데.”

“됐으니까 빨리 설명해.”

로즈라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성 라파일은 이라네 황제를 독살하고 광증에 시달렸어요. 교단에서까지 제명된 그는 폭주했고, 그걸 대마법사 펠리온이 막았죠.”

“막을 필요가 있어? 신성력은 파괴적인 힘을 낼 수 없을 텐데.”

“그래서 타락했다는 말이 나온 거겠죠.”

하나같이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마를 짚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펠리온 백작이 막았지만 수도 일부가 파괴된 건 어쩔 수 없었나 봐요. 폭주의 잔해가 가라앉고 난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대요.”

그녀가 책장으로 가서 검은 장서 하나를 빼냈다. 그리고 내용을 찾는 듯 책장을 넘기더니 내게 내밀었다.

눈으로는 글자를 읽으며 귀로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마법 협회의 기록을 필사해 온 거예요. 성 라파일이 봉인 마법을 습득했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추측하기로는 그가 영혼을 담보로 신성력을 자신에게 봉인해서 스스로 신이 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라파일이……, 도대체 왜?”

“그 이유까진 알아내지 못했어요.”

보통 신관들은 마법을 다룰 수 없다. 그러나 타락했다면 말이 달라진다.

마법의 자체가 신수였던 최초의 드래곤이 신의 힘을 훔쳐 변형시킨 것이었으므로 신관이 신을 배신하면 마법과 비슷한 힘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역사상 그런 경우는 딱 한 번 있었다.

아주 오래전, 타락한 성자로 인해 인류의 70%가 사망했고 세상은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문명을 일궈 이 수준까지 오는 데에 자그마치 10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라파일이 타락한 게 사실이라면 제아무리 펠리온이라도 그를 막지 못했을 텐데?”

“자연 상태의 마력까지 끌어다 써서 겨우 막았다나 봐요. 보통 자연 상태의 마력은 느끼지도, 사용하지도 못하는데. 괜히 드래곤의 화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게 아니었네요.”

“그럼 펠리온은…….”

“실종 상태지만 100년이나 흘렀으니 아마 사망하지 않았을까요?”

로즈라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며 흘러갔다.

과거에 펠리온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자연 상태의 마력을 느낄 줄 알면서 왜 안 써?”

“쓰면 죽어.”

“진짜? 내가 전쟁에서 쓰라고 할까 봐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

“정말로. 자연 상태의 마력은 신의 것이거든. 음……. 그래도 폐하가 쓰라고 하면 써야지. 나는 충신이니까. 어때, 쓸까? 전쟁에서 단숨에 이기게 해 줄까?”

“웃기고 있네. 쓰기만 해 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알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안 쓸게.”

웃음을 터트리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본 적도 없는 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느껴질 만큼, 상상은 그 장면을 지독하리만치 선명하게 재현해냈다.

몸은 소파 위에 있지만 정신은 여전히 과거를 헤매고 있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펠리온에 대한 생각을 끊어 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래서 마법사의 숫자가 급감한 거였어.”

“맞아요. 자연 상태의 마력이 사람에게 깃들어야 마법사가 태어나니까요.”

정신이 멍하다. 책을 내려다봤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 앞이 어지럽고 속이 매스꺼워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나는 몸을 숙인 채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떼어 냈다.

“율시안과 이라네 황제에 관한 건?”

“율시안 황제에 관한 기록은 특별한 게 없었어요. 오래 살지도 못했고, 살아 있을 때도 내내 정신병을 앓았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일을 벌였고 증세가 어땠는지 자세하게 정리해 둔 게 있는데, 보여 드릴까요?”

“……아니.”

나는 눈을 내리감고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로즈라가 내 앞에 앉는 게 느껴졌다.

눈을 떠 로즈라를 보았다. 그녀는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백 년 전 사람들 일에 비틀거릴 정도로 충격받았으니 이상해 보일 만도 했다.

‘동요한 모습을 보이다니. 황제답지 못했어.’

긴 숨을 내쉬고 몸을 바로 했다.

“계속해.”

“이라네 황제에 관한 건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이유를 설명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일단 공식 기록이 전혀 없어요. 그나마 파라돈에 것이 다인데, 너무 나쁜 말만 적어 뒀고 증명되지 않은 게 태반이라 쓸모가 없었어요.”

“레튜니아 쪽은?”

“렘브로스 바멜마흐 2세가 정복 전쟁을 하면서 이라네 황제에 관한 내용을 발견하면 족족 손수 태웠다는 기록만 발견됐어요. 개인 기록들은 전부 중구난방이고요.”

“……그래. 수고했어.”

“저 자료들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가져갈 수 있도록 조치해 드릴까요?”

“아니. 됐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금으로 줬던 돈의 2배를 넘기고 방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 문을 열자 바로 로그리예가 보였다.

“공주님. 왜 이렇게 늦었어? 걱정했잖아.”

그가 걸을 때마다 결 좋은 은빛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펠리온.’

시야가 빙글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죽었다니. 100년이나 지났으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확답을 받으니 발밑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은 로그리예를 보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지나쳤다.

“공주님?”

뒤따라오는 발소리를 모른 척하고 타솔라에게로 갔다.

“샤마흐 신전으로 가자.”

“이 시간에 말입니까?”

“그래.”

이미 기록들은 안에서 충분히 확인했다. 그런데도 내 눈으로 직접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밖으로 나와 타솔라의 말에 올랐다.

고개를 돌리니 로그리예가 보였다. 그는 우리 근처에 서서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사고하려고 했다.

로그리예는 100년 전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식으로 무시하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자꾸만 혼란스러워지려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으며 손짓으로 로그리예를 불렀다.

그가 고분고분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펠리온과 라파일의 잔재를 로그리예에게 덧씌우지 않으려 애쓰며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먼저 궁전으로 돌아가 있어. 나는 신전에 들렀다 갈게.”

“같이 가.”

“……금방 돌아갈 거야. 먼저 가서 쉬어.”

타솔라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말 머리를 돌렸다.

샤마흐 신전의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곧장 역대 성자와 성녀들의 초상화를 모아 둔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라파일의 초상화는 없었다.

“거기 누구십니까?”

몸을 돌리자 샤마흐의 신관과 눈이 마주쳤다.

“공주님이셨군요. 6년 전에는 둘째 황자님과 셋째 공주님이 쳐들어오셔서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가셨는데……. 왕실분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표지판이라도 붙여 놔야겠습니다.”

투덜거리는 그를 향해 물었다.

“성 라파일의 초상화는 왜 없죠?”

“그걸 물어보시려고 이 시간에 오신 겁니까? 지금 새벽 다섯 시입니다.”

“왜 없는지 말해 줘요.”

“타락한 성자라는 오명 때문에 제명당했습니다.”

로즈라의 말이 맞았다.

나는 짧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바로 신전을 나와 말에 올랐다.

“타솔라. 제일 높은 산봉우리로 가.”

“공주님. 이제 궁전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산으로 가. 어서.”

그녀가 마지못해 궁전 뒤에 있는 산으로 말을 몰았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의지해 산을 오르던 말이 걸음을 멈췄다. 나무가 빼곡해지자 시야가 더 어두워진 탓이었다.

나는 곧장 말에서 내려 직접 걸어서 정상까지 올라갔다.

서서히 떠오르는 여명 앞에 외면하고 싶은 진실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는 수도의 전경을 한눈에 담았다.

지평선 가까이에 있는 외성 주변만 시가지의 모습이 달랐다. 마치 거대한 폭발에 휩쓸려 사라진 부분을 새로 세운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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