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로그리예의 검술 실력은 이미 유명하다.
저번에 황자 파라돈 놈을 제압한 것을 보면 맨손 격투도 좀 하는 것 같았다.
데려가도 짐이 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정보를 들으러 안쪽으로 가는 건 나 혼자뿐이니 그가 내 목적을 알아차릴 일도 없었다.
도박장에 가는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약혼식을 앞두고 도박장에 드나드는 공주라…….’
그림이 썩 좋진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단순한 호기심에 한번 가 본 것이라고 둘러대면 될 일이다.
매일같이 드나드는 게 아니니 이상할 건 없었다.
문제는 로그리예였다. 데려가면 나를 노름꾼이라고 생각하고 파혼을 요청하지 않을까?
‘그건 좀 곤란한데.’
아미르 공작가는 확실히 도움이 많이 될 테니까. 그의 영토가 탐이 나기도 하고 말이다.
“로그리예.”
“응?”
“도박하는 약혼자, 어떻게 생각해?”
로그리예가 미소 지으며 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나긋하게 대답했다.
“최악이야.”
역시. 예상했던 대답이다.
나는 라파일에게 하던 습관처럼 로그리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만약 도박장에 간 게 나라면?”
로그리예가 눈을 번쩍 떴다.
“공주님 도박에 손댔어? 그런 거 질색하잖아.”
역시 몸 주인. 내 후손이라 그런지 인생의 가치관마저 나를 닮아 훌륭한 모양이다.
“만약이라니까. 만약 그러면 어떡할 거냐고.”
로그리예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몸을 일으켜 세워 나를 마주 보았다.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는가 싶더니 내 양손을 잡고 마음을 굳힌 얼굴을 했다.
“공주님이 하고 싶으면 해야지. 괜찮아. 나 돈 많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로그리예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엄지로 내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대신 적당히, 즐기는 정도로만 하자. 그리고 도박보다는 내가 우선이어야 해. 나보다 도박을 더 좋아하면 안 돼.”
“파혼은?”
손등을 쓸던 엄지가 멈췄다. 로그리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속도에 맞춰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표정이 사라졌다.
“왜? 파혼하고 싶어서 그래?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어? 그래서 도박에 손대게?”
“무슨 소리야. 네 의사를 묻는 거잖아.”
“네가 도박을 하든, 다른 남자를 만나든, 사람을 죽이든 절대 파혼하지 않을 거야.”
“좋아. 그럼 가자.”
“……응? 가? 어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그리예를 침대 밖으로 끌어당겼다.
순순히 딸려 오는 로그리예를 대충 옆에 세워 두고 외투를 골랐다.
“너도 가서 외투 입고 정문 밖으로 나와.”
“이 시간에?”
고개를 끄덕이며 멀뚱히 서 있는 그의 등을 밀었다.
“정말? 나 방에서 내쫓으려고 괜히 하는 말 아니지?”
“내가 그럴 사람이야?”
“……조금?”
진짜 확 두고 가 버릴까 보다.
장난스럽게 웃는 그에게 친히 문까지 열어 주고 밖으로 내보냈다.
“정문.”
그리고 문을 닫았다. 나는 바로 옷을 갈아입고 비밀 통로를 사용해 정문을 빠져나갔다.
타솔라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로그리예는?”
타솔라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로그리예 공자도 옵니까?”
“응. 떼어 놓기 힘들어서 그냥 데려가려고. ……말이 안 보이네?”
“인적 드문 곳에 묶어 뒀습니다.”
“잘했어. 로그리예는……. 좀 기다려 보고 안 나오면 두고 가자.”
정말 두고 갈 생각이었는데 로그리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복장도 평소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제법 눈치가 있다고 칭찬해 주려고 했는데, 로그리예가 바로 눈치 없는 소리를 했다.
“데이트하려고 불러낸 거 아니었어?”
“아니었어. 가자.”
타솔라가 앞장서서 말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일행이 더 있을 거라는 말은 안 했기에 말은 두 필뿐이었다.
로그리예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가 먼저 말에 올라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앞에 탔다.
“타솔라. 앞장서.”
“예, 공주님.”
나는 편안하게 로그리예에게 기댔다.
안 그래도 밤이라 좀 추웠는데 따뜻한 게 등을 받치고 있으니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공주님. 졸리면 좀 잘래?”
“됐어.”
로그리예에게 짧게 답하고 졸음을 쫓기 위해 눈에 힘을 주며 앞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에 도착했다. 타솔라는 명령하기도 전에 알아서 말을 여관에 맡기고 돌아왔다.
우리는 곧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길인데, 로그리예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조용히 따라왔다.
‘귀찮게 안 굴어서 좋네.’
덕분에 편하게 선술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바로 로즈라를 찾아가 암호를 댔다.
“뒤쪽 벽에 걸 게 있어서 왔는데.”
주변에서 어린 게 벌써 도박에 손을 댔다느니 말세라느니 하는 말이 들렸다.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로그리예가 따라왔다.
내가 제재할 필요도 없이 로즈라가 허리까지 오는 문을 매몰차게 닫아 버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봤다.
로즈라가 같이 들어갈 거냐는 눈빛을 보냈다. 고개를 젓는데 로그리예가 문 위에 손을 올렸다.
그대로 두면 넘어올 것 같아서 일부러 문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로그리예가 불쌍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정말 도박하러 온 거였어?”
“잠깐 구경만 하고 나올 테니까 타솔라랑 맥주라도 마시고 있어.”
“혼자 들어가게? 안에서 위험한 일 생기면 어떡하려고.”
로즈라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머, 뭘 그런 걸 걱정하고 그런담? 내가 있는데. 내가 알아서 자알 모실 테니 걱정 말고 앉아 있어요.”
“그래. 앉아 있어.”
따라온다고 고집이라도 부릴 줄 알았는데 로그리예는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심각하게 걱정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못 박힌 듯 서 있는 로그리예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즈라가 내 옆에 바싹 붙어 팔짱을 끼며 속닥거렸다.
“아미르 공자는 초상화보다 실물이 낫네요. 키도 훤칠하고.”
확실히 내 취향을 다 때려 넣은 외모이긴 하다.
그를 잠깐 돌아보는 사이, 로즈라가 열쇠로 안쪽 문을 열었다. 나는 타솔라와 로그리예에게 눈짓으로 인사한 뒤 복도로 들어갔다.
로즈라가 나를 제 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먼저 들어가 소파에 앉으며 문을 잠그고 다가오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오라고 한 거야?”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요. 사람을 시켜서 전달하려고 해도 한참 걸릴 것 같고, 문서로 전해 드리자니 궁전 문턱을 넘는 게 쉽지 않잖아요.”
로즈라가 차를 내주며 말을 덧붙였다.
“최근 5년간 어떤 분 덕분에 궁전 경비가 더 삼엄해져서요. 이번에 말을 전한 것도 사정사정해서 겨우 한 거라고요.”
내가 기사와 병사들을 잘 훈련시키긴 했지.
고개를 끄덕이고 차향을 맡았다. 마시지 않고 그대로 찻잔을 내려놓았지만 로즈라는 내 행동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본론을 꺼냈다.
“말씀해 주신 게 전부 연관되어 있는 거라서, 시간 순서대로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해.”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들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네.
준비가 됐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희가 제일 먼저 찾아낸 건, 성 라파일이 이라네 황제를 독살했다는 거예요.”
“독살이라고?”
나는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갑자기 신빙성이 확 사라지는데.
“말도 안 돼.”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야…….”
물론 그즈음에 독을 먹은 적도 더러 있었다. 라파일이 곁에 있어서 언제든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크게 주의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뭐를 먹든 그가 감쪽같이 치료해 내니 후에는 아무도 독살을 시도하지 않았다.
내가 안전해진 뒤에도 라파일은 틈만 나면 나에게 축복을 내려 몸 안에 있는 질병이나 독을 정화했고 아주 사소한 상처까지 치료해 주었다.
그런 그가 나를 독살을 했다니.
“도대체 어디서 나온 정보야? ‘치정의 여제’라도 봤어?”
“어머, 공주님이 그 책을 어떻게 아세요? 아직 어린 분이 볼만한 책은 아닌데.”
음흉하게 웃는 로즈라를 굳은 얼굴로 바라봤다.
농담을 받아 주지 않자 로즈라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본 건 아니에요. 맞는 말이 거의 없더라고요.”
“하나도 없는 거겠지. 그럼 그건 어디서 나온 말인데?”
“원래 출처는 밝히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특별히 알려 드릴게요.”
그녀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이제는 무너져 버린 옛 샤마흐 신전 지하에서 찾아냈어요.”
로즈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 아래의 카펫을 걷어 냈다.
바닥에 파인 홈에 로즈라가 손을 집어넣어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책이 가득 차 있었다.
“성 라파일에 관한 것은 신전을 찾아보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남동 대륙의 샤마흐 신전은 에피파네스에 남은 것 하나 빼고는 전부 파괴된 상태였죠.”
신관이 한 명밖에 남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신전까지 파괴되었다니.
“누가 감히 성역을 파괴해?”
“모르죠. 하지만 신전이 파괴된 덕분에 지하가 드러나서 이 기록들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녀가 책을 하나 둘씩 꺼내 놓으며 말을 이었다.
“100년 전, 샤마흐의 주교가 남긴 일기예요. 마법이 깃든 책에 썼는지 좀먹은 곳 없이 깨끗하더라고요.”
얼마 되지 않아 바닥 위로 40여 권의 책들이 쌓였다.
나는 다가가 제일 마지막으로 꺼낸 책을 들어 올렸다. 가죽 표지를 넘기자 모서리에 작성된 연도와 작성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샤마흐력 1655~1656, 슈텔레가 기록함.]
이건, 내가 사망하고 난 다음 해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