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요르고스는 약혼식의 하객으로 온 사람들을 위해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 중이었다.
사실 이런 구질구질한 곳에 올 생각은 없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키네시아가 룩소르를 대신해 자리를 지킨다는 말을 전해 들은 후, 정신을 차려 보니 대연회장 앞이었다.
하지만 들어가는 것은 망설여졌다.
며칠 전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보았던, 키네시아의 적개심 가득한 눈빛이 떠오른 탓이었다.
‘제깟 게 뭐라고 나를 그렇게 봐?’
떠올려 보면 키네시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재수 없었다.
아니지. 비단 키네시아뿐만이 아니라 에피파네스 왕족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으면서 행복하다는 듯 하하 호호 웃는 게 요르고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특히 일곱 살이나 먹어 놓고 툭하면 울먹거리는 포넨트는 정말 꼴 보기 싫었다.
‘파라돈이었으면 황제 폐하께 황실의 품위를 떨어트린다고 혼이 나고 종일 벌서야 했을걸.’
저렇게 정신 상태가 나약하니 에피파네스가 약소국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요르고스는 친히 포넨트를 강하게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에피파네스 놈들은 감사할 줄도 모르고 기어올랐다.
게 중에서도 키네시아가 제일 유난이었다.
“그만하세요!”
그녀는 요르고스의 앞을 막아서며 제 형제를 감쌌다.
‘저딴 멍청한 놈 때문에 나에게 반항하는 거야?’
요르고스는 키네시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쁘장하게 생겼으니 고분고분하게 굴면 귀여워해 줄 생각도 있었는데 키네시아는 그 뒤로도 사사건건 요르고스를 방해했다.
‘이게 다 저것들 탓이야.’
제 쌍둥이 뒤에 숨을 줄밖에 모르는 포넨트, 징징거리든 약해 빠졌든 그저 오냐오냐하는 에피파네스의 국왕 부부, 제 언니 말이라면 철석같이 따르는 동생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키네시아가 파라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요르고스는 내심 달가웠다.
파라돈은 제 나라이고 그녀의 편은 없었다.
그러니 그 콧대 높은 키네시아의 굴복을 얻어 내는 것쯤은 한여름에 얼음물을 마시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타지 생활에 지치면 나한테 의지하겠지.’
그러나 키네시아는 다른 귀족들하고는 친하게 지내면서도 요르고스만은 유난히 고깝게 여겼다.
‘왜 나한테만 저렇게 구는 거야? 나랑 제일 먼저 알고 지냈으면서.’
요르고스는 키네시아를 지켜봤다.
그녀는 다재다능하고 주변의 신뢰를 얻을 줄 알았다.
보면 볼수록 유능하고, 단단하고, 대단한 사람인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이 파라돈의 황녀이자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요르고스의 동생, 페라포네 카텔라코와 비슷해 보였다.
물론 두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다.
페라포네는 오만하고 사람을 벌레 보듯 하지만 키네시아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예의 발랐다.
하지만 비슷한 또래가 다방면에서 출중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열등감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요르고스는 심사가 뒤틀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키네시아를 제게 복종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키네시아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두려워할지언정 요르고스의 비위를 맞추려 하진 않았다.
오히려 에피파네스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질수록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제 나라로 돌아가면 다시는 요르고스를 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게 눈에 빤히 보여서, 요르고스는 키네시아를 볼 때마다 심기가 뒤틀렸다.
‘감히 내 손을 벗어나려고 해? 어림도 없지. 내가 그냥 놔줄 줄 알아?’
요르고스는 일부러 에피파네스까지 따라왔다.
그런데 키네시아는 에피파네스로 돌아오자마자 변했다.
폭력에는 면역이 없는 사람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그녀가 이라네리아 공주와 함께 요르고스에게 반격을 한 것이다.
그는 당황했다.
키네시아의 반항 때문이 아니라 이라네리아 때문이었다.
‘왜 저 쪼끄만 놈은 굴복시켜서 내 아래에 둬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지?’
오히려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려서 그런가? 나이만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막상 마주했을 땐 어리다는 느낌이 없었다.
외형이 어른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이라네리아 공주는 또래보다 조금 더 작아, 겉으로만 보면 그녀의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다.
거기다가 처음 만났을 때, 키네시아는 이라네리아보다 한참이나 어린 일곱 살이었다.
요르고스는 제 기묘한 집착이 키네시아만을 향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깊게 생각해 보기도 전에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키네시아의 도움으로 벗어나긴 했으나 그때부터는 다른 저주에 걸린 것만 같았다.
모국으로 돌아가서도 키네시아의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키네시아를 떠올리느라 힘으로 남을 찍어 누르는 것도 시들해졌다. 제 동생과 비교당해도 크게 분노가 일진 않았다.
요르고스는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제 감정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관계를 개선해야겠어.’
그는 매우 드물게 정상적인 생각을 했다.
‘사과를 하고 값비싼 선물을 잔뜩 안겨 주면 곧 마음이 풀릴 거야. 망나니 같이 굴어도 나 좋다는 것들이 한가득인데, 잘해 주면 키네샤라고 별수 있겠어? 금방 넘어오겠지.’
세상에는 사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아주 글러 먹은 사고방식이었다.
요르고스는 저주가 두려웠으나 키네시아만을 생각하며 에피파네스로 돌아왔다.
다행히 다시 저주가 발동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하며 도착하자마자 키네시아를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런데 왜 받아 주지 않는 거야!’
황자인 제가 자존심까지 버려 가며 이해할 수 있게끔 상황을 설명했음에도 키네시아는 냉랭하기만 했다.
요르고스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삼키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제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전부 쫓아낸 채 멀찍이 서서 키네시아를 지켜봤다.
파라돈에 있을 때와 달리 그녀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편안해 보였다. 국왕 부부가 없이도 주인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키네시아는 어린 티를 완전히 벗고 완벽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매정하게도 요르고스에게는 단 한 번의 눈길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이를 갈고 있을 때, 한 남자가 키네시아에게 다가갔다.
“저 새낀 또 뭐야.”
큰 키에 잘 빠진 몸, 단정하게 잘생긴 얼굴에 녹색 눈동자가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그러나 요르고스의 눈에는 흠잡을 만한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옷도 촌스럽고, 머리카락도 윤기 없이 불그죽죽한 갈색이잖아. 저런 게 키네샤에게는 왜 다가가는 거야.’
남자가 키네시아에게 춤을 신청하는 게 보였다.
요르고스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저래 봤자 거절이나 당하겠지.”
그러나 키네시아는 미소 지으며 남자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음악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중앙으로 나갔다. 키네시아의 손은 남자의 어깨에, 남자의 손은 키네시아의 허리에 닿았다.
요르고스는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맞닿은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속이 뜨겁고 고통스러웠다. 입 안이 바싹 말라 손에 든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으나 속이 끓는 것은 여전했다.
당장 남자를 키네시아에게서 떼어 내고 싶었다. 그 충동을 못 이기고 요르고스가 성큼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귀족들이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게 들렸다.
“공주님하고 춤추는 남자,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은데 누구래?”
“몰랐어?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양아들이잖아.”
“설마 지금 키네시아 공주님을 유혹하려는 거야?”
“그뿐이겠어? 듣기로는 부마 자리를 노린다던데.”
“어쩐지.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양자를 고를 때 외모를 유심히 봤다더라고. 이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후작 부인 안목이 높네. 두 사람 잘 어울린다.”
요르고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든 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자마자 음악이 뚝 끊겼다.
키네시아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두 눈이 마주쳤다.
요르고스는 저에게로 향한 키네시아의 황금색 눈동자를 보며 만족했다. 그러나 바로 자존심이 상했다.
‘이 내가 고작 저런 것에 기쁨을 느끼다니.’
그는 그대로 몸을 홱 돌려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혹시라도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릴까 걸음을 멈춰 봤으나, 당연하게도 키네시아가 따라와 그를 붙잡는 일은 없었다.
***
밤에 몰래 빠져나가 로즈라에게 가려고 했는데, 오늘도 내 옆엔 로그리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침대 머리에 몸을 기대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깨워서 내쫓아?’
그래 봤자 다시 방 안으로 기어들어 오겠지. 당연히 내가 몰래 외출한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아니면 자게 내버려 두고 나갔다 올까?’
역시나 좋은 방법은 아니다.
로그리예가 예민하다거나 잠귀가 밝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내가 뒤척이든, 그의 볼을 꼬집든, 딱밤을 때리든, 평소에는 잘만 잤다.
하지만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기 위해 침대를 벗어나면 귀신같이 깨어났다.
어둠 속에서 멀뚱히 앉아 나를 쳐다보는데, 아무 생각 없이 침대로 돌아가다가 간 떨어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두고 나가면 분명 일어나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그렇다고 낮에 외출하자니 왕실 꼬질이들이 귀찮게 굴 게 뻔했다. 로그리예도 종일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데다가, 무엇보다 술집이 문을 열지 않는다.
‘어떡하지?’
고민하는데 로그리예의 팔이 내 다리 위로 올라왔다.
눈은 여전히 감고 있는데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게 보였다. 곧 로그리예가 입술을 달싹여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나 자는 거 예뻐? 반했어?”
“너는 일어나자마자 헛소리니?”
로그리예가 아직 잠이 덜 가신 눈을 나른하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빤히 보고 있길래 영락없이 반한 줄 알았지. 뽀뽀라도 해 줄 줄 알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뽀뽀 대신 딱밤을 때려 주었다.
“아야야.”
로그리예가 성의 없는 목소리로 아픈 척을 해 주었다. 그러고는 내 등 뒤로 팔을 쑥 집어넣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직 새벽이잖아. 더 자자.”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 찰거머리를 잘 떼어 놓을 수 있을지만 고민하다 문득 깨달았다.
‘꼭 떼어 놓고 갈 필요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