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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69화 (69/151)

<69화>

“왜 그렇게 겁먹었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니?”

“송구합니다.”

“송구할 것까지야.”

괜히 말을 걸면 식은땀으로 샤워라도 할 기세라 관심을 끄고 드레스나 살펴보았다.

하얗고 풍성한 드레스 위에는 복잡한 문양이 금색 비단실로 빼곡하게 수놓아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옅은 금색 드레스로 보일 정도였다.

단추나 장식의 보석은 전부 투명한 붉은색이었다.

등 뒤로 늘어진, 금빛이 도는 갈색 로브는 땅에 끌릴 정도로 길어 위엄 있어 보였다. 하얀 털이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도 우아해서 보기 좋았다.

로그리예의 옷 역시 하얀색 바탕이었다. 어깨에 달린 장식 줄은 내 로브와 같은 금빛 갈색, 단추와 보석은 붉은색이었다.

나란히 서 있는 옷을 번갈아 보는데 로그리예가 내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어때?”

“예쁘네.”

나는 일부러 고개를 돌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양재사와 눈을 맞췄다.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공주님.”

칭찬을 들은 양재사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자신감이 차오른 것인지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자 곧 이 예복들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걸 배경 삼아 손짓으로 드레스를 이리저리 돌리게 하며 구경했다.

로그리예도 제 옷을 보다가 고개를 기울여 내 머리에 제 볼을 기댔다.

“공주님이 약혼식 드레스 입은 거 빨리 보고 싶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몸에 잘 맞는지 확인하려면 어차피 한 번은 입어 봐야 하니까.

“그러지 뭐.”

“정말?”

반색하는 로그리예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몸을 틀었다.

양재사가 말을 멈추고 제 조수에게 눈짓했다.

조수 한 명이 마네킹을 끌며 파티션 뒤로 들어가는 나를 따라왔다.

옷 벗는 것을 돕던 그녀가 몸이 가까워졌을 때 아주 작게 속삭였다.

“약속된 5년이 지났으니 언제든 찾아오시라고 하셨어요.”

로즈라에게 소속된 사람인가 보다.

고개를 끄덕여 들었다는 것을 표현하자마자 조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 번도 입을 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인 척 조용히 옷을 갈아입혀 주고 뒤로 물러났다.

파티션을 돌아 나왔다. 양재사가 사람들을 내보냈는지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시중들 두세 명의 인원도 벽 쪽으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방 가운데에는 약혼식 예복 차림의 로그리예가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하지만 날개뼈 위에 닿는 긴 은빛 머리카락을 보자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펠리온.’

물론 펠리온의 머리카락이 더 길긴 했지만 색깔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눈앞에 100년 전 기억이 덧씌워졌다.

펠리온이 나에게 청혼을 하던 날, 우리는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슷한 옷을 맞춰 입었었다.

뒤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 로그리예의 얼굴 위로 펠리온의 잔상이 덧씌워졌다.

그때, 로그리예가 입을 열었다.

“멋있는데? 잘 어울려.”

“멋있는데? 잘 어울려.”

비슷한 어조의 전혀 다른 목소리 두 개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

로그리예가 한 말은 그날 펠리온이 내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그러나 로그리예를 펠리온으로 착각하는 일은 없었다.

펠리온의 눈동자는 맑은 하늘색이었다. 그러나 로그리예의 청보라색 눈동자는 내가 살아생전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했던 라파일의 것과 비슷했다.

어렵지 않게 100년 전 사람의 잔재를 지웠지만 그리움은 여운이 길었다.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생글거리는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왜 이렇게 넋을 놓고 있어? 너무 잘생겨서 반했어?”

“신기하네.”

“뭐가? 이렇게 근사한 남자가 공주님 약혼자인 게?”

어쩜 저렇게 펠리온와 라파일을 반반 섞어 놓은 것처럼 생겼지?

둘이 결혼해서 로그리예를 낳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아미르 공작 맞지?”

“응? 그건 무슨 질문이야?”

“아니야. 너도 멋지다고.”

나는 고개를 젓고 몸을 틀어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로그리예가 내 옆으로 와서 손에 깍지를 꼈다. 나는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온 로그리예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정략혼이긴 했으나 라파일과 결혼하고 난 뒤에는 그에게 충실했다. 펠리온과도 친구로 남았고, 라파일 이외의 다른 남자는 품지도, 옆에 세우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왔다고는 하나 라파일이 아닌 사람을 옆에 두려니 기분이 묘했다.

로그리예가 웃음기 없는 청보라색 눈동자로 거울 속의 나와 눈을 맞췄다.

“무슨 생각해?”

이젠 전 남편이 되어 버린 성 라파일을 떠올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어 대충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몸을 틀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5년 전에도 이렇게 길었었나?”

“아니. 기른 거야.”

“왜?”

“공주님이 내 머리카락 좋아했잖아.”

몸 주인은 이런 면에서도 나와 취향이 같았나 보다.

이렇게 결 좋고 광택이 흐르는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트려 놓았을 때 유독 아름다웠다.

나는 펠리온의 긴 머리를 떠올리다가 로그리예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자를 생각은 없어?”

“긴 머리 싫어?”

싫다기보다는, 머리가 등에 닿으면 그를 마주할 때마다 펠리온을 떠올리게 될 것 같았다.

설명하기 애매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로그리예는 별다른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다가 생긋 웃었다.

“공주님이 내 부탁 들어주면 나도 머리 자를게.”

“뭔데?”

“약혼식 때 ‘드래곤의 심장’을 착용해 줘.”

하필 펠리온이 내게 청혼했을 때 썼던 보석을 약혼식 때 걸고 나와 달라니…….

“그냥 머리 길러.”

“왜? 그 보석 마음에 안 들어?”

“머리 길러. 아주 길게. 오금에 닿을 정도로.”

붙잡힌 손을 쏙 빼내고 다시 파티션 뒤로 들어갔다.

“착용해 줘어!”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리며 떼쓰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예복을 벗고 나왔는데도 로그리예는 여전히 약혼식 예복을 입은 채 뚱한 표정으로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뭐야? 시위해?”

로그리예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처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일부러 드레스에 달린 보석도 붉은색으로 해 달라고 했는데…….”

“붉은색 보석이 ‘드래곤의 심장’뿐인 것도 아니고. 다른 거 걸게. 네가 보내 준 거에도 붉은색 많아.”

“너무해.”

“너무한 나는 갈게. 로그리예는 여기 있어.”

문을 향해 가려는데 로그리예가 내 손을 붙잡았다.

“……잠깐 기다려 줘.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힘 빠진 걸음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진심으로 실망스러워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대신 평소보다 좀 더 예뻐해 줘야겠다.

마음먹으며 앉을 곳이 있나 고개를 돌렸는데 양재사가 의자를 들고 후다닥 달려왔다.

“공주님. 여기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녀석. 제법 눈치가 있잖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양재사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옆에서 조잘거렸다.

“정략혼이라고 들었는데 사이가 무척 좋으십니다.”

“다 내 훌륭한 인품 덕이지.”

“하하하.”

양재사가 웃었다.

“폭군의 이름으로 불리셔서 무서운 분인 줄 알았는데 농담도 할 줄 아시고, 제가 오해했었나 봅니다.”

뭐? 폭군?

고개를 홱 돌렸다. 양재사는 자신이 위대한 황제를 음해했다는 것을 모른 채, 긴장을 완전히 풀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들어오자마자 누가 나한테 이라네 공주라고 불렀지.

그럼 나한테, 그러니까 이라네 황제한테 폭군이라고 한 거야?

“농담? 폭군이 농담하는 거 봤어?”

분위기가 싸해졌다. 양재사가 다시 긴장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농담한 거 맞아. 나는 폭군이 아니니까.”

“예, 이라네리아 공주님.”

“이라네라고 불러도 돼.”

“예, 예?”

“이라네는 되고, 폭군은 안 되고. 알아들었어?”

“예. 이라네 공주님.”

대답은 그렇다고 하는데 표정은 여전히 아리송한 게 영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나는 일부러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확실하게 짚어 주었다.

“이라네 황제는 폭군이 아니니까. 이라네는 되고 폭군은 안 되는 거야. 알겠니?”

여전히 멍청한 표정으로 있는 양재사에게 조수가 후다닥 달려와 속닥거렸다.

“막내 공주님이 이라네 황제를 좋아하신다잖아요. 좋아하는 인물을 폭군이라 그러면 어떡해요.”

“뭐? 폭군이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원래 저 나이 때에는 세 보이는 거 좋아하잖아.”

“어? 그런가?”

다 들린다, 이놈들아!

그리고 ‘어? 그런가?’는 뭐가 ‘어? 그런가’야!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할 때 뒤에서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다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걸 들었는지, 로그리예가 배를 잡으며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 이라네를, 세 보여, 세 보여서 좋악하하하!”

저기서 속닥거리는 게 들린단 말이야? 귀도 밝네.

“재밌니?”

“응. 풉, 푸하하하!”

그제야 자신들의 목소리가 제법 컸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조수와 양재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만 마주쳐도 움찔 놀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코로 숨을 후 내쉬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들, 들어가십시오, 공주님.”

인사하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문을 나왔다.

“같이 가, 이라네 공주님!”

물론 로그리예의 목소리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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