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아야.”
전혀 아프지 않은 소리를 내며 로그리예가 더 들러붙었다.
나는 그를 떼어 내고 몸을 돌렸다.
“우리 애들한테 해코지할까 봐 그런다. 왜!”
“저번에도 플로레타한테 우리 애라고 그러더니…….”
로그리예가 내 한쪽 팔을 꿰찼다.
“언제부터 우리 슬하에 자녀가 이렇게 많았지?”
“100년 전부터.”
대충 대답하고 걷는데 옆에서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로그리예의 웃음 포인트는 알아낼 수가 없기에 그냥 무시했다.
빨리 들어가서 황자 파라돈 놈이 키네시아를 만나지 못하게 방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안으로 들어가 키네시아를 찾아냈을 때, 그녀는 이미 파라돈의 황자 놈과 대치하고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서는 요르고스 놈의 뒤통수가 보였다.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게 생겼네.’
망설일 필요는 없지. 성큼 다가가려는데 로그리예가 내 손을 잡아 세웠다.
“뭐야?”
“쉬잇.”
로그리예가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세워 내 입술을 막았다.
눈을 치켜뜬 채 요망한 손가락을 물어뜯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움직였다.
내 손을 잡은 채 조각상 발판 쪽으로 다가간 그는 조각상을 세워 둔 단상 위에 손수건을 깔았다. 그리고 자기는 그 옆에 앉았다.
뭐 하는 건가 싶었는데 멀리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키네시아의 목소리는 드물게 격양되어 있었다. 게다가 무려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 로그리예가 깔아 둔 손수건 위에 앉았다. 그가 마법 주머니를 벌리더니 말린 복숭아가 박힌 쿠키를 내밀었다.
일단 복숭아니까 먹긴 하겠는데, 이런 건 왜 들고 다니는 거야?
‘하여튼. 이상한 놈.’
로그리예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앞을 봤다.
요르고스 새끼가 돌아서 가려는 키네시아의 팔뚝을 강하게 낚아채고 있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폭력적인 행태에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역시 뒤통수를 후려갈겼어야 했어. 일어나려는데 로그리예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기야, 진정해. 우리 큰딸에게도 성장할 기회를 줘야지.”
그를 쳐다보자 로그리예가 내 손에 쿠키 하나를 더 쥐여 주었다.
“키네시아는 자기를 닮았으니까 혼자서도 잘 해결할 거야.”
그가 속삭이는 와중에도 앞에서는 커다란 목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네가 싫어서 괴롭힌 건 아니었어! 그냥 너랑 나는 같은 첫째인데, 너는 뭐든 잘하고 가족들의 사랑도 받잖아.”
“그래서 뭐? 나를 싫어한 게 아니니까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할까?”
저번처럼 발발 떨고만 있을 줄 알았는데 잘 비꼬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쿠키를 요르고스 놈의 머리라고 생각하며 힘껏 깨물었다.
요르고스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여자인 데다가 후계자로 거론되고, 똑 부러지고, 아버지께 인정받고 그런 게 내 여동생하고 너무 비슷해서…….”
요르고스가 말을 하다 말고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키네시아는 요르고스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네 열등감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거야? 동정이라도 해 줘?”
“왜 말을 그딴 식으로!”
그가 언성을 높이다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키네시아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독기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고.”
저 오만하고 재수 없는 놈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온 건 의외였다.
그것도 진심 어린 사과가 나오다니.
마음 약한 키네시아가 혹시라도 저놈을 용서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속이 타 쿠키를 와그작와그작 깨물어 먹다 보니 어느새 손이 비었다.
로그리예가 새로운 쿠키를 꺼내 텅 빈 내 손가락 사이에 끼워 주었다.
나는 다시 입을 움직이며 키네시아의 표정을 살폈다.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져 대화를 이어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쓰레기처럼 굴었는데 넌 나를 도와줬어. 가족들도 그런 적이 없는데. 그건 잘 지내 보자는 뜻 아니야?”
“웃기지 마. 무슨 이유를 가져다 대든, 너 때문에 3년 동안 내 삶이 지옥 같았다는 건 변함이 없어. 너랑 잘 지내는 일 따위는 절대 없을 거야.”
키네시아답지 않은, 놀랍도록 냉정한 어투였다.
옆에서 로그리예가 작게 감탄했다.
“여보. 우리 애가 벌써 저렇게 크다니.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1절만 해.”
“응.”
키네시아가 요르고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요르고스가 꽉 말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저러다 달려드는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로그리예도 막지 않았다.
그러나 요르고스는 키네시아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나를 왜 저주에서 풀어 줬는데! 나를 용서할 마음이 있어서였잖아!”
키네시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요르고스가 키네시아를 거칠게 돌려세웠다.
“내가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 건데?”
“용서?”
키네시아가 차갑게 조소하며 어깨에 닿은 손을 뿌리쳤다.
“네가 날 위해 죽는다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 정도는 생각해 볼게.”
키네시아가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요르고스 황자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제 분을 못 이기고 벽을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쯧쯧. 어린놈이 성질머리하고는.”
다가가며 혀를 차자 요르고스가 뒤를 돌아봤다.
나를 발견한 요르고스 놈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안 그래도 성질 나빠 보이는 눈매를 더 뾰족하게 뜨며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너! 금고에 대한 소문을 퍼트려서 나를 함정에 빠트린 게 너지?”
목을 조르려는 듯 뻗어 오는 손을 피하려는데 요르고스가 비명을 질렀다.
옆에 서 있던 로그리예가 그의 손목을 그대로 잡아 꺾어 버린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려고 하십니까, 황자님?”
로그리예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붙잡은 손을 밀어 내며 놔주었다.
요르고스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안타깝게도 넘어지진 않았지만 꺾였던 손이 제법 아픈지 당장 덤비지 못한 채 제 손목만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로그리예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고 앞으로 나서서 팔짱을 꼈다.
“내가 금고 문을 열어 뒀든 안 열어 뒀든, 네가 남의 나라 보물을 노리고 들어가지 않았으면 저주에 걸리는 일도 없었을걸?”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요르고스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지가 못된 마음 먹고 들어간 걸 가지고 누굴 탓해?”
“……역시 너였어.”
“아닌데?”
진실을 말해 줬지만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나 역시 저런 놈을 붙잡고 구구절절 설명해 줄 만큼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적의를 가득 품은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너. 경고하겠는데, 키네시아한테 다른 마음 품지 마.”
“뭐?”
황자 파라돈이 얼굴을 붉히며 이를 악물었다.
“키네시아에게 관심 있어 보이는 눈치인데 마음 생기기 전에 접으라고. 알아들었어?”
여전히 벌건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놈의 어깨를 치며 지나갔다.
로그리예가 한 박자 늦게 내 곁으로 따라붙었다.
“그래도 풋풋하네.”
“저게 어딜 봐서 풋풋이야? 퍽퍽이지.”
퍽퍽 패고 싶다는 뜻이다. 물론 키네시아는 말고, 요르고스 놈만.
어딜 넘볼 게 없어서 우리 집 귀한 첫째를 넘봐? 양심도 없지.
콧방귀를 뀌고 목적지도 없이 걷는데 로그리예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미소 띤 얼굴로 제안했다.
“약혼식 때 입을 드레스 오늘 완성된다고 했는데 보러 갈래?”
마침 크게 할 일도 없고, 기분 전환도 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정원을 지나 별관 맞은편에 있는 건물로 들어왔다.
입구에서 하인을 부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별관은 반 정도 완성되어 있었다. 열심히 움직이는 인부들을 구경하는데 하인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양재사에게 내어 준 방으로 안내해.”
하인이 공손하게 대답하고 앞장섰다. 1층의 어느 문 앞에 멈춰 선 그가 문을 열어 주고 비켜섰다.
커다란 방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 열린 문 너머로 지켜보고만 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방 안의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라네 공주님!”
“아미르 공자.”
잠시 정적이 흐르고, 순식간에 인파들이 허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 양재사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
로그리예가 내게 팔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팔뚝에 가볍게 손을 얹고 에스코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사람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드레스를 보러 왔는데. 우리가 너무 일찍 왔나?”
“아닙니다, 공주님.”
양재사가 눈짓하자 그의 조수들이 바퀴 달린 마네킹 두 개를 끌고 왔다.
100년 전에는 저런 물건이 없었는데.
다른 옷을 제작할 때는 이렇게 찾아와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신기한 마음에 쳐다보자 양재사가 식은땀을 흘렸다.
“공주님.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점이라도…….”
고개를 젓고 양재사를 보았다.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던 그가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렸다.
아니, 그냥 쳐다만 봤는데 왜 저렇게 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