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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67화 (67/151)

<67화>

네페르트 부인의 말투에는 미약하게나마 무시와 조롱이 섞여 있었다.

카랄드 백작은 모멸감을 느꼈으나 겨우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은 누구에게든 수그려야 할 때이다.

“국왕 일가가 지금처럼 나오면 네페르트 후작가라도 혼자 헤쳐 나가긴 힘들 겁니다.”

“혼자요?”

후작 부인이 코웃음 쳤다.

“카랄드 백작은 같은 탁자에 앉아 있는 분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시네요.”

그제야 카랄드 백작이 고개를 돌렸다. 레바나의 대신관은 여전히 세상사에 관심 없다는 얼굴을 한 채,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라돈을 등에 업고 사교계의 정점에 선 네페르트 후작 부인과 거대 종교인 레바나 신전의 대신관이 손을 잡다니.

이건 질 수가 없는 싸움이다.

국왕은 무슨, 국왕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되는 싸움인 것이다.

“그럼 저도 뭐든 돕게 해 주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카랄드 백작은 모르고 있었다.

국왕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되는 싸움이지만, 아네스 궁전에 붙어 있는 것은 국왕 할아버지의 할머니쯤 되는 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자고 싶어서 불편한 몸을 뒤척이려는데 온기가 느껴졌다.

며칠간 익숙해진 패턴에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역시나 로그리예가 보였다.

약혼식이 있을 때까지 아네스 궁전에 머물기로 한 그는, 방을 내어 주었음에도 달이 뜨면 어김없이 내 침대로 기어들어 왔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발로 쭉 밀어냈다. 아슬아슬하게 모서리에 걸쳐진 그가 뒤척이는 척하더니 데굴 굴러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너 안 자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런데도 로그리예는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발로 그를 다시 쓱 밀어 놓고 등져 누웠다.

조금 더 잘 생각이었는데 로그리예가 또 데굴데굴 굴러왔다. 이번에는 아예 내 등에 찰싹 붙어 허리에 팔을 감기까지 했다.

아니, 이럴 거면 자는 척이나 하지 말든가.

어이가 없어서 잠이 다 달아났다. 팔을 치우고 일어나자 로그리예가 눈을 반짝 떴다.

졸린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눈빛이었다.

“너 왜 자꾸 내 방에 기어들어 와? 우리가 약혼했지, 결혼했어?”

“결혼하면 들어와도 돼? 그럼 약혼은 건너뛰고 결혼할까?”

또 그놈의 결혼 타령. 지겨워서 딱밤을 때려 주었지만 로그리예는 실실 웃기만 했다.

“결혼해도 방은 따로 쓸 거야.”

“싫어.”

로그리예가 단호하게 반대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어. 그게 맞으니까.”

귀족이나 왕족은 잠자리를 가질 때가 아니면 대체로 방을 따로 쓴다.

나 역시 아르체와 다른 방을 썼었다.

그러나 로그리예는 납득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국왕 내외께서 방을 같이 쓰시잖아. 우리도 그 전통을 이어야 하지 않을까?”

“전통은 무슨. 그냥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 그런 거지.”

“사랑하는 사이만 방을 같이 쓰는 거구나.”

“그렇지.”

로그리예의 미소가 조금 굳었다. 어쩐지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럼 지금처럼 내가 계속 올게.”

“굳이?”

“사랑하면 같이 방을 써야 한다며. 지금은 나만 공주님을 사랑하니까 내가 올 수밖에 없지.”

“네가 날 사랑한다고?”

로그리예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 미심쩍은 대답이었다.

그가 나에게 결혼하자고 조른 것은 내가 10살 때부터였다. 젖살도 빠지지 않은 아이의 무엇을 보고 사랑을 느낀단 말인가?

연애 대상이 아니라 가족애 정도라면 느낄 만도 하지만.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라면 다시 생각해 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 그냥 친한 동생을 아끼는 마음일 수도 있으니까.”

“아니.”

그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릴 정도로, 오랫동안 너를 사랑해 왔어.”

저건 또 무슨 말이지? 태어나기 전부터 결혼을 약속했다는 것도 아니고 사랑했다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말인가?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분명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로그리예였다.

저게 무언가를 암시하는 말인지, 진짜 무슨 예지력 같은 것이 있어서 내가 태어날 것을 알고 미리 사랑에 빠져 있었다는 말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로맨틱해 보이고 싶어서 한 말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인에게 직접 묻기로 했다.

“무슨 헛소리야?”

그는 명확하게 대답하는 것 대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나는 일어나려는 그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로그리예. 나는 그렇게 애매하게 구는 걸 싫어해.”

그가 속 모를 미소를 지었다.

“말할 거면 확실하게 말하고, 숨길 거면 확실하게 숨겨. 독 묻은 비수를 검집도 없이 품고 다닐 순 없는 법이잖니.”

“내가 전부 말하면 다 믿어 줄 수 있어?”

“믿을게.”

로그리예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내 코끝을 콱 깨물었다.

짧게 비명을 지른 내가 미쳤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그가 내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부딪치듯 맞댔다.

“거짓말쟁이.”

“…….”

“그래도 사랑해.”

로그리예가 이마를 떼어 내며 그 자리에 입을 맞췄다.

“이제 안 그럴게. 한 번만 봐줘. 짝사랑만 하는 게 좀 억울해서 그랬어.”

“…….”

“그리고 방금 한 말 조금 로맨틱하지 않았어?”

그는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침대를 내려갔다.

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방문을 향해 가는 그의 등에다 대고 물었다.

“거짓말인 건 어떻게 알았어?”

이런 말을 하긴 좀 민망하지만 나는 거짓말에 재능이 있다. 뻔뻔함을 타고났기에 진심을 가장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거의 평생을 정치판에 구르며 그 뻔뻔함을 가다듬고 단련했다.

그런 거짓말을 갓 성인이 된 애송이가 간파해 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짜 무슨 예지력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랑의 힘이지.”

가볍게 눈을 찡긋거린 그가 그대로 쏙 방을 빠져나갔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랑의 힘이라니. 정말 허울 좋은 변명이다.

‘수상한 놈.’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했다. 대답도 제대로 해 주지 않는 편지를 5년간 꾸준히 보내는 것 역시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로즈라에게 아미르 공작가, 특히 로그리예에 대해 조사를 부탁했다.

필요한 것은 다 긁어 보았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아미르 공작가에서 태어나서 평범하게 자랐으며 다방면에 천재적인 두각을 드러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그냥 헛소리인가?’

로그리예라면 그럴 수도 있다. 워낙 실없는 짓을 많이 하니까.

그런데 가끔 보여 주는 예리한 모습 때문에 마냥 헛소리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진심인 것 같은데…….’

뒤를 캐도 약소한 왕국의 공주를 이용할 만한 이유는 나오지 않으니 말이야.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니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생각을 정리하고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로그리예는 굳이 찾을 필요 없었다.

그는 원래 아침이 오면 제 방으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나를 찾아왔다.

어디에 있든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추적 마법이라도 걸어 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마법 물품 따위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궁전 밖으로 나와 정원 벤치에 앉았다.

약혼식 초대장을 보낸 지 꽤 되었기에 궁전 안은 미리 도착해 머무는 귀족들로 북적거렸다.

슬슬 먼 곳에서 오는 손님들도 도착하기 시작했는지, 정원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로에도 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파라돈에서 온 마차잖아?’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파라돈 황실의 문장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누가 왔으려나?’

첫째인 요르고스 황자는 크게 데이고 갔으니 오지 않았을 테고…….

둘째인 황녀는 황태자로 임명되었다고 들었다. 이런 약소한 나라의 행사에 참석하기에는 바쁜 몸이었다.

막내는 아직 나이가 어려 황제가 끼고 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고위 귀족이 왔겠네. 대공이나 공작쯤?’

하지만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놀랍게도 요르고스였다.

‘저 새끼가 여긴 왜 와?’

키네시아를 괴롭히던 걸 두 눈으로 본 터라 당연히 그의 방문이 달갑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저 자식 포넨트도 괴롭혔다고 했잖아.

아주 이번에는 제대로 물어서 에피파네스의 이응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게 만들어 버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요르고스를 노려보았다.

멀리서도 시선이 느껴질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을 보인 건 그가 아니라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로그리예였다.

“파라돈의 황자는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질투 나게.”

그가 뒤에서 내 어깨에 양팔을 걸쳤다.

고개를 젖히자 로그리예가 눈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저놈한테 관심 있어? 흠……. 그렇다기엔 저번에 너무 열심히 패 놨던데. 아! 혹시 날 이렇게 대한 놈은 네가 처음이야, 이런 거야?”

“그게 무슨 100년 전에나 유행했을 연애 소설에나 나올 법한 소리야?”

고개를 바로 하며 심드렁하게 말하자 로그리예는 그대로 팔을 굽혀 나를 끌어안았다.

“뭐야아. 그럼 왜 보는데.”

그리고는 말꼬리를 늘이며 내 뒷덜미에 이마를 마구 문질러 댔다.

나는 손을 뒤로 뻗어 그의 머리통을 더듬었다. 쓰다듬어 주는 줄 알았는지 로그리예가 얌전해졌다.

나는 적당한 위치를 확인한 뒤 그대로 딱밤을 먹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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