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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66화 (66/151)

<66화>

고개를 돌려 로그리예를 봤다. 계속 나를 보고 있던 것인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사랑? 얘가 진짜 나를 사랑할까? 그렇다고 한들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나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따뜻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오틸리에와 룩소르에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전하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 사랑보다는 가족을 지키는 게 우선이야.”

로그리예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결혼을 조를 때 자신이 내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이 옳았다.

아미르 공작가의 부와 명예는 키네시아를 왕으로 만드는데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로그리예는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로그리가 말을 덧붙이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가 원한다면 나도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거야. 약혼은 그런 의미지. 피를 섞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동맹이니까.”

“역시 내 공주님이야.”

로그리예는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손에 깍지를 꼈다.

나는 그를 내버려 두며 룩소르와 오틸리에에게 말했다.

“그리고 내 행복은 정략혼 따위에 좌지우지되지 않아.”

자신만만한 말투에 룩소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결국 이렇게 됐군요.”

귀족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모여 앉아 있었다.

약혼식 초대장을 손에 든 그들은 한때는 번쩍이었으나 지금은 반짝이 수준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전부 국왕과 공주들 때문이었다.

몰래 탈세하거나 암살을 시도한 자들은 전부 영혼까지 탈탈 털려 죗값을 치러야 했다. 물론 그동안 모은 재산들로 말이다.

왕실은 귀족들의 돈을 야금야금 뜯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얼마 전에는 귀족들이 소유할 수 있는 사병의 수를 제한한다는 법안까지 발표했으나 아무도 크게 반발하지 못했다.

반발했다가는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앞도 뒤도 다 막힌 기분입니다. 아미르 공작가라니…….”

“지금이라도 국왕 전하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동안 우리가 탐욕스럽게 살긴 했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국왕 전하께서 마음을 다잡으셨으니 외교를 하든, 전쟁을 하든 나라를 더 크게 키우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한몫 챙길 수 있을 것이오.”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화를 듣고 있던 귀족 한 명이 탁자를 쾅쾅 내리쳤다.

“정신들 차리시오. 뭐가 어쩌고 저째? 그놈의 출신을 잊은 것이오? 다른 것도 아니고 양치기였소, 양치기!”

“국왕 전하가 양치기면 저는 양이 되렵니다!”

귀족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룩소르에게 붙는 게 낫겠다고 마음먹은 자들이 우르르 그를 뒤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제 남은 귀족들은 열 명 남짓이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께 갑시다.”

“그분은 정치에는 관여하시지 않지 않소.”

“그거야 게텔린이 건재할 때의 이야기지! 이제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파라돈의 황족들과도 친분이 두터우니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나서면 국왕이든 공주든 꼼짝 못 할 겁니다.”

“그분을 귀족파의 수장으로 추대해서 다시 우리들의 세상을 되찾읍시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에게 가자는 말을 꺼낸 카랄드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몰려가는 것은 품위에 어긋나지 않소? 내가 먼저 다녀올 테니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여기서 나가시오.”

다들 서로의 눈치만 보며 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었다.

카랄드 백작이 주위를 쭉 둘러봤다.

“그럼 모두 이견 없는 것으로 알겠소.”

카랄드 백작은 곧장 네페르트 후작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장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답장 대신 마차를 보냈다.

카랄드 백작은 마차에 올라 네페르트 저택으로 도착했다. 하인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후작 부인의 온실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미 다른 손님이 와 있었다.

“대신관님.”

“이거, 카랄드 백작님이 아니십니까.”

레바나의 대신관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앉은 채 빈자리에 잔을 놓아주고 차를 채웠다.

“손님이 와 있다는 말을 못 전했네요.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할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두 분이 담소를 나누는 걸 방해한 게 아닐까 송구스럽습니다.”

“설마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눌까요? 향이 아주 좋아요.”

“영광입니다, 후작 부인.”

긴장한 카랄드는 땀이 난 손을 연신 허벅지에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차로 목을 축인 그가 레바나의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대신관님은 어쩐 일로…….”

“원래 종종 와서 함께 차를 마시곤 합니다.”

“하긴. 대신관께서도 속 풀이할 때가 필요하시겠죠. 요즘 샤마흐 교단에 신도가 몰리고 있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속 많이 상하셨겠습니다.”

키네시아가 백성들을 구제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난 뒤, 수도에는 왕실의 마차가 샤마흐 신전에 드나드는 것을 봤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 뒤로 샤마흐 신전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신관의 수도 제법 늘었다.

아직 레바나 교단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이지만 만일 왕실이 본격적으로 샤마흐 교단을 가까이한다면 전세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속이 쓰리던 차라, 레바나의 대신관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것을 눈치챈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카랄드 백작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런 불필요한 대화를 하려고 제게 급하게 만남을 청한 건가요?”

그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부인.”

“담소나 나누다가 카랄드 백작의 근황을 물으려 했는데……. 그랬다가는 먼저 온 손님을 내쫓는 꼴이 되겠군요.”

그러니 헛소리하지 말고 용건이나 잽싸게 말한 뒤 꺼지라는 뜻이었다.

카랄드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그는 타는 목을 가다듬기 위해 차를 마셨다. 뜨거운 물이 목구멍을 지나가자 오히려 더 갈증이 이는 것 같았다.

“흠! 크흠, 흠! 제가 찾아뵙고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라네리아 공주와 로그리예 공자의 약혼 때문입니다.”

“초대장이라면 저도 받았어요.”

“후작 부인께서는 이대로 두고 보실 참이십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이대로 왕가와 공작가가 결합하면 다른 귀족들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카랄드는 미약한 기대를 품고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후작 부인께서 저희의 힘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고개를 틀어 카랄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우아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건 어렵겠네요.”

카랄드는 당황하고 말았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당연히 승낙할 것으로 생각했던 탓이었다.

아니, 적어도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흥미를 보일 줄 알았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진다면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단칼에 거절해 버릴 줄은 몰랐다.

도대체 왜? 왜 싫다고 하는 것일까?

“제가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유랄 것까지도 없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원래 천박한 것들을 싫어했다.

국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놈들은 핏줄은 좋으나 품위가 없었고, 귀족이랍시고 있는 놈들은 졸부처럼 하고 다녀 그녀의 심미안을 해쳤다.

사람들은 그녀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여겼으나 실상은 달랐다.

그저 급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어울리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국왕 쪽은 요즘 부쩍 왕실 같은 분위기가 난단 말이야.’

예전에는 크기만 컸지 허름했었는데, 지금은 말 그대로 궁전 같았다.

인품과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백성들은 물론 일부 귀족들까지도 그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왕국 못지않은 땅과 재산, 군사력을 갖춘 아미르 공작가 역시 국왕에게 붙었다. 말이 약혼이지 두 가문이 동맹을 맺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건 멍청이도 알 것이다.

거기다가 왕실 금고에는 보석과 금화가 넘쳐났다. 네페르트 부인은 잘만 하면 명예와 재산, 모든 것을 제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계 중에 양자를 들여서 공주 중 한 명과 결혼시켰으면 하는데.’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종종 건달처럼 구는 포넨트 왕자와 달리 공주들은 제법 품위가 있었다.

사실 가장 탐이 나는 사람은 이라네리아 공주였다.

귀족 중에 게텔린을 잡은 게 사실 이라네리아 공주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나이에도 영특했고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지녔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임자가 있었고,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키네시아 공주라면 어떻게 잘 요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키네시아 공주는 후계자로 유력하니 그녀를 내 양자와 혼인시킨 다음 국왕 부부를 죽이면 왕실은 내 손에 떨어질 거야.’

형제 사이가 좋다지만 그것도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클수록 의견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고, 어린애들을 이간질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후작 부인은 생각을 정리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카랄드 백작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할까요?”

명백한 거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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