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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65화 (65/151)

<65화>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리자 그가 나를 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까꿍.”

“까꿍은 무슨.”

로그리예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핀잔을 무시했다.

“올해는 내가 선물이야. 감동이지?”

“미친놈.”

“응? 왜 불러?”

“감탄사니까 대답하지 마.”

로그리예가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왜 계속 올라와? 그만 올라와.”

“나도 그러고 싶은데, 키가 많이 컸거든.”

“포넨트보다 더 큰 것 같네.”

“그래? 구경하러 가야겠다.”

로그리예가 내 양어깨에 팔을 걸쳤다.

생글거리는 얼굴에 소년 같은 느낌은 남아 있지 않았다.

“네가 올해 20살이던가?”

“맞아.”

“뭐, 나쁘진 않네.”

로그리예의 앳된 얼굴을 마주하면 약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는데, 다행이다.

저 정도면 약혼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진 않겠어.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가 내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보고 싶었어.”

빼곡한 은빛 속눈썹이 지척에서 나울거렸다.

청보라색 눈동자는 이슬을 맞은 제비꽃처럼 맑게 빛났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색감이라 가만히 감상하는데 등 뒤로 타솔라가 조용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곧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쟤는 왜 갑자기 나가고 그러는 거야?

어이가 없어 뒤를 돌아보려는데 로그리예가 양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공주님은? 나 안 보고 싶었어?”

“자주 편지했잖아.”

로그리예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 각도가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졌다.

“편지 봉투에 내 얼굴이 달려 있진 않잖아.”

“대신 안에 들어 있었지. 네가 매년 초상화를 동봉해서 보냈잖아. 기억 안 나니?”

“공주님이 내 얼굴을 까먹으면 안 되니까. 해마다 무섭게 자라더라고.”

“그런 것 같긴 하네.”

코와 코끝이 맞닿았다. 나는 고개를 슬쩍 뒤로 뺐다.

“그런데, 너무 들이대는 거 아니야? 5년 전보다 심한데.”

“5년 치 몰아서 하는 중이야.”

요망하긴. 그의 얼굴을 밀어 내고 몸을 돌렸다.

방을 나가는데 로그리예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고 무작정 따라왔다.

마침 그도 들어야 하는 일이기에 그대로 옆에 달고 룩소르의 집무실로 향했다.

예의상 문을 몇 번 두드리긴 했으나 별로 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바로 문을 열었다.

룩소르는 이제 내 난입이 익숙해졌는지 놀란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리아! 아빠가 보고 싶어서 온 게냐?”

룩소르가 벌떡 일어나 책상을 돌아 나오며 양팔을 활짝 펼쳤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친히 팔을 내려 줬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집무실 문 언저리에 서 있는 로그리예를 가리키며 바로 용건을 꺼냈다.

“약혼할래.”

“……응? 리아야. 아빠 귀가 좀 이상한 것 같구나. 약혼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안 이상해.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약혼.”

“뭐, 뭐라고, 지금 뭐라고…….”

룩소르가 고장 난 톱니처럼 버벅거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약혼한다고. 쟤랑.”

로그리예가 양손을 다소곳하게 가슴에 올린 채로 작게 감탄했다.

“자기야……!”

그러더니 내가 낯부끄러운 호칭에 반발하기도 전에 달려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커다란 몸이 부딪혀 오자 말문이 턱 막혔다.

“자기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억!”

“응. 나도 사랑해. 식은 당장 올릴까? 여기서 맹세의 키스라도 할까?”

로그리예가 키스라도 퍼부을 기세로 얼굴을 들이밀자 룩소르가 기함하며 그를 떨어트려 놨다.

“로그리예 공자, 이게 무슨 짓이오!”

그러거나 말거나 로그리예는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공주님 추진력, 멋져.”

내가 멋있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이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룩소르는 오랜만에 정신이 혼미해졌는지 이마를 짚고 있다가 시종장에게 다른 가족들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10분도 되지 않아 나와 로그리예는 나란히 앉은 가족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왜 로그리예 옆에 앉혀 둔 거야?

슬쩍 일어나서 키네시아 옆으로 가려는데 로그리예가 내게 팔짱을 꼈다.

“자기. 나만 두고 가게?”

“그래, 리아. 거기 앉아 있으렴. 보기 좋구나.”

그들 중 오틸리에만이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키네시아는 평소와 별다를 게 없었고, 플로레타, 룩소르, 포넨트는 로그리예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특히 플로레타는 툭 건들면 울음을 쏟아 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도 저렇게 반대했었지.

‘혹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물어보려고 로그리예 쪽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였다.

플로레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저는 이 결혼 반대예요!”

“결혼 아니고, 약혼.”

내가 정정해 주었지만 플로레타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로그리예 공자는……!”

그녀가 말을 하다 말고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로그리예를 노려봤다.

로그리예의 입술은 언제나처럼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눈빛은 묘하게 차가워 보였다.

나는 로그리예의 발등을 꾹 눌렀다.

“우리 애 겁주지 마라.”

순식간에 분위기가 풀어지며 그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언제부터 플로레타가 우리 애였어? 나는 저런 딸 둔 적 없는데.”

내가 로그리예의 옆구리를 꼬집는 사이 키네시아가 플로레타를 다독여 자리에 앉혔다.

나는 훌쩍이는 플로레타에게 말했다.

“약혼은 내가 하자고 했어.”

반응이 나온 건 의외로 포넨트에게서였다.

“뭐? 너 저 새끼 사랑해?”

“뭔 소리야.”

“그런데 결혼은 왜 해! 나도 반대야!”

“결혼 아니고 약혼. 왜 자꾸 결혼이래?”

“이거나 저거나. 약혼이 결혼 되는 거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오틸리에가 아이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셋 다 나가 있으렴. 이건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니까.”

포넨트가 바로 반발했다.

“엄마. 우리도 성인이야!”

“나이만 찼다고 다 어른인 건 아니란다, 아가.”

오틸리에의 단호한 말에 포넨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옆에 앉아 있던 플로레타도 시든 양배추 같은 몰골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성인도 아니야…….”

키네시아가 포넨트의 팔뚝을 잡고 문으로 향했다.

맥없이 질질 끌려가던 포넨트가 별안간 키네시아의 손을 떨쳐 냈다.

“잠깐! 그렇게 따지면 저기 둘도 어른은 아니잖아! 아미르 공작이 올 때까지 이 이야기 미루는 게 어때?”

“맞아요!”

플로레타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미루겠다고 하면 플로레타는 나를 데리고 옆 나라로 망명이라도 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로그리예는 여유로웠다.

“저런 말이 나올 줄 알고 가져온 게 있습니다.”

로그리예가 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냈다.

“약혼을 허락한다는 내용이 담긴 아버지의 친서입니다. 정식 청혼서이기도 하고요.”

황당해 웃음이 나오는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나가려던 키네시아까지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룩소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편지를 받아 읽었다. 그는 멍하니 있다가 오틸리에에게 편지를 넘겨주며 헛기침을 했다.

“하, 하지만 초청장도 만들어야 하고…….”

“그것도 제가 다 만들어 왔습니다. 날짜만 기입해서 보내면 됩니다.”

잠시 방에 정적이 흘렀다. 덕분에 제법 멀리 있는 포넨트가 중얼거리는 게 선명하게 들렸다.

“저 새끼 아주 작정을 하고 왔네.”

동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기왕 할 거 질질 끄는 것보다는 빠르게 해치우는 게 나았다.

잘했다는 의미로 로그리예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러자 그가 본격적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내 손바닥에 문질러 댔다.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으로 쓰다듬어지니 편하네.

이것도 5년간 참은 끼 부림의 연속인가 싶어 얌전히 손바닥을 내어 주었다.

포넨트는 토하는 시늉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굳어 있는 키네시아를 제 팔꿈치로 툭 쳤다.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네. 야. 그냥 가자. 괜히 반대했어.”

“……그래.”

키네시아가 플로레타의 손을 꼭 잡은 채 포넨트와 함께 방을 나갔다.

룩소르는 여전히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리아. 아무리 그래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는 거란다. 그리고 리아 너는 평생의 배우자를 정하기엔 아직 어리지 않니?”

룩소르네가 특이한 것이지, 왕족이 16살인 건 어린 게 아니다.

이미 결혼 시장에 던져져 수많은 정략혼 상대들을 물색할 나이이다. 나 역시도 그 나이쯤에 펠리온을 부군으로 점찍고 왕이 되면 그에게 대공의 직위를 내려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아 라파일과 결혼하게 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훨씬 더 일찍 펠리온과 결혼했을 것이다.

“안 어려.”

룩소르가 정말 놀랍게도 철없는 아이를 보듯 나를 바라봤다.

저런 눈빛을 언제 마지막으로 받아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신기한 기분에 빤히 쳐다보고 있자 오틸리에가 말을 거들었다.

“아가. 엄마는 반대하지 않을 생각이야. 로그리예 공자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눈에 보이거든.”

로그리예가 제 볼을 감싸며 가증스럽게도 부끄러운 척을 했다.

“그리고 사실, 엄마도 처음부터 아빠가 마음에 든 건 아니란다.”

“오틸리에!”

룩소르가 충격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어지는 말에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결국 사랑하게 되었지.”

오틸리에가 룩소르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니 리아 너도 로그리예 공자를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그때까지 좀 더 지켜보는 게 어떻겠니?”

“그래, 리아야. 우리는 네가 행복하길 바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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