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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64화 (64/151)

<64화>

내가 막 데뷔탕트를 치렀을 때, 펠리온은 이미 드래곤의 화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고대 도시에 걸린 마법을 해제하러 갔다가 ‘드래곤의 심장’이라는 보석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목걸이로 만들어 내게 주며 청혼했다.

“내 심장을 줄게, 나와 결혼해 줘.”

“이 보석 이름이 ‘펠리온의 심장’이었어? 나는 ‘드래곤의 심장’인 줄 알았는데.”

“나는 드래곤의 화신이니까 그게 그거지 뭐.”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한 제안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다.

나 역시 호감이 있었고, 누군가와 결혼해야 한다면 그건 펠리온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버지와의 불화로 입지가 위태로웠던 탓이었다.

“내가 조금 더 안전해지면, 그때 결혼하자.”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나는 시간이 아주 많거든. 대신 목걸이는 이라네 네가 보관해 줘.”

“그래. 잘 가지고 있다가 결혼식 때 착용할게.”

그렇게 약속했지만 결국 나는 나라의 부흥을 위해 라파일을 선택했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청혼을 승낙하며 받은 목걸이는 돌려주는 게 도리였다.

그러나 펠리온은 드래곤의 심장을 거절했다.

“네가 누구와 결혼하고 누구를 사랑하든, 그 목걸이는 네 거야, 이라네.”

그래서 항상 지니고 있었다. 라파일은 보석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학을 뗐지만 말이다.

“이게 다시 내게 올 줄 몰랐는데.”

그것도 결혼하자고 조르는 놈의 손을 거쳐서 말이다.

기분이 이상해져 상자를 옆에 내려놓았다. 키네시아가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 나에게 물었다.

“오늘 하고 갈 거야? 걸어 줄까?”

저녁에 몸 주인의 생일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심보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의 몸에 펠리온이 준 목걸이를 걸치고 싶진 않았다.

“됐어. 금고에 넣어 두라고 해.”

키네시아가 시녀를 불러 목걸이를 맡기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1층에서는 아직도 보석을 옮기는 중이었다.

“보석이 너무 많은데. 좀 부담스럽지 않아?”

“부담스럽기는. 곧 약혼자가 될 건데.”

“……로그리예와 진짜 약혼하려고?”

“당연하지.”

“만약에 리아가 돌아오면 어떡해?”

“어차피 왕족의 결혼은 정략혼이니까 네 동생한테도 나쁜 일은 아닐걸? 로그리예 정도면 괜찮잖아. 외모도 빼어나고, 가문도 훌륭하고.”

“리아는 원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 말도 맞네. 정 걱정되면 성불하기 전에 파혼 사유 하나 정도는 만들어 두고 갈게.”

어쩐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던 키네시아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잠시 끊겼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네시아가 내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가려고?”

“나도 무도회에 갈 준비 해야지. 너도 서류 적당히 보고 슬슬 옷 갈아입어.”

“알겠어.”

키네시아와 헤어져 준비를 마치고 대연회장으로 향했다.

무도회는 언제나 그렇듯 특별할 게 없었다.

개성 없는 선물을 들이밀면서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려고 하는 게 100년 전과 똑같았다.

심지어 나를 위한 무도회도 아니었다. 이 생일 파티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사랑받는 막내 공주, 이라네리아니까.

‘재미없어.’

애들하고 놀기라도 할까 했는데, 키네시아는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바빴고 포넨트와 플로레타는 보이지도 않았다.

중간에 룩소르와 오틸리에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명색이 생일 축하 무도회인데, 생일의 주인공을 이렇게 방치해 두다니.

‘다들 어딜 간 거야.’

무도회 분위기가 무르익어 주인공이 누구인지 신경도 안 쓸 즈음이 되자 키네시아가 내게 다가왔다.

“이만 돌아갈까?”

마침 지루했던 참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키네시아와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대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키네시아가 내 뒤를 쫓아왔다.

그녀는 내가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아도 제 방으로 가지 않고 주변을 얼쩡거렸다.

나는 문을 열려다 말고 뒤를 돌았다.

“할 말 있어?”

“아니. 할 말은 아니고…….”

키네시아가 말끝을 흐리며 손을 뻗어 내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돌려세우며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이라네. 생일 축하해.”

“맞아. 축하해. 이, 이라네.”

이라네?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하고 고개를 들자 포넨트와 플로레타가 보였다.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아 키네시아를 쳐다봤다. 그녀가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이라네, 네 생일이잖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포넨트가 끼어들었다.

“너 사실 그 폭군을 좋아한다며? 마음에 안 들지만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원하는 대로 불러 줄게.”

“누가 폭군이야.”

이상하게도 평소처럼 말이 뾰족하게 나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포넨트가 내 앞에 들이민 이상한 모양의 케이크가 보인 탓인가 보다.

“이건 또 왜 이 모양이야?”

“내가 꾸며서 그렇다 왜! 그래도 반죽하고 생크림은 엄마가 만들었어. 맛은 걱정 안 해도 돼.”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오틸리에가 조용히 웃었다.

내가 케이크를 받자마자 플로레타와 룩소르도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리, 이라네. 이건 내가 만든 꽃다발이야.”

“이건 아빠가 짠 담요란다. 곧 날이 추워지잖니.”

그들이 건넨 선물은 하나같이 전부 다 엉망진창이었다.

30번이 넘는 생일을 겪어 봤지만 이렇게 오합지졸 같은 선물은 처음이었다.

특히 룩소르가 준 양모 담요는 거대한 사다리꼴 모양에 울퉁불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웃음이 터졌다.

차디찬 눈 속을 헤매다 벽난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으로 초대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 피부가 녹을 때처럼 손등이 간질거리고, 배 속은 따뜻한 수프를 양껏 먹은 것처럼 묵직하고 뜨거웠다.

나는 가족들이 내민 선물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고마워.”

***

그 뒤로 4번의 생일이 더 지나갔다.

그리고 3달 뒤면 또 생일이 돌아온다. 이 몸을 차지한 것도 벌써 햇수로 6년째가 되어 간다는 뜻이었다.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내 몸 같았다.

“이라네. 로그리예가 또 선물을 보낸 모양인데? 항상 생일날에 맞춰서 보내더니, 이번엔 좀 빠르네.”

주변에서 나를 이라네라고 부르니 더 그랬다.

‘그런데 이게 어디 선조의 존함을 함부로 불러?’

딱밤을 때려 주려고 손을 들었는데 포넨트의 키가 너무 커서 머리에 닿질 않았다.

포넨트가 나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재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발길질을 하고 말았다.

“악!”

정강이를 얻어맞은 포넨트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맞은 부위를 마구 문질렀다. 나는 낮아진 그의 정수리에 딱밤을 놔 주었다.

“윽! 너는 어떻게 나이를 먹어도 손버릇이 나쁘냐? 누가 폭군 아니랄까 봐.”

“픅근이르그 흐즈므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들어 보이자 포넨트가 투덜거렸다.

우리를 구경하며 얌전히 따라오던 플로레타가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내 아픈 구석을 들쑤셨다.

“그런데 이라네라고 부르는 건 아무 말도 안 하면서 폭군이라고 그러면 화내? 이라네 황제는 폭군이잖아.”

“폭군 아니라고!”

플로레타의 이마에도 딱밤을 때려 주고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우리를 보며 웃고 있는 키네시아의 발등을 살며시 밟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문을 열고 뒤를 돌아보았다.

포넨트는 정강이, 플로레타는 이마, 키네시아는 발등을 열심히 문지르고 있었다.

사이좋게 고통스러워하는 세 사람에게 비웃음을 날려 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아미르 공작가의 집사와 마주쳤다.

나는 공손히 인사하는 그의 옆으로 고개를 빼내어 하인들을 보았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상자의 크기가 눈에 띄게 커다랬다.

“뭘 보냈길래 상자가 집채만 해?”

“열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내 방으로 가.”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타솔라가 따라 들어와 내 옆에 섰다.

나는 턱짓으로 카펫을 가리켰다. 그 자리에 하인들이 커다랗고 번쩍거리는 상자를 내려놨다.

집사는 평소와 달리 상자를 열어 주지 않고 인사만 남긴 채 방을 나갔다.

“수상한데.”

“뭐가 말입니까?”

“집사가 평소랑 다르잖아. 상자도 평소랑 다르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인데, 암살자라도 숨어 있는 거 아니야?”

“제가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농담이었어.”

로그리예가 어디 그럴 위인인가?

물론 중간에서 상자가 뒤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안 그래도 잊을 만하면 귀족들이 암살자를 한 명씩 보내긴 했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쪼그려 앉아 상자를 톡톡 두드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인지 타솔라가 상자 옆에 서서 검 자루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그런 타솔라의 뒤에서 손만 쭉 뻗어 상자 뚜껑을 툭 밀어젖혔다.

암살자가 튀어나오거나 무기가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다만,

“거기서 뭐 해?”

상자 안에서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 있는 로그리예를 발견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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