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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63화 (63/151)

<63화>

타솔라가 순식간에 검을 빼내어 낯선 사람에게 겨눴다.

나는 목에 칼날이 닿아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로 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나와 있었다.

“그건 안 되겠는데.”

“어머, 서운해라.”

나는 하인들에게 마차에 들어가 있으라고 손짓했다.

하인들이 사라지고 나자 로즈라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곳에서 몰래 정보를 모아 올 사람들을 키우고 있었다니, 서운한데요.”

라고 로즈라가 전혀 서운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애기씨가 여기 드나든다는 소문이 들리길래. 알려 드릴 게 있어서 왔지.”

“궁전에 있는 사람은 어쩌고?”

“공주님 때문이잖아요.”

“나?”

“그래요.”

로즈라는 타솔라가 겨눈 검을 손등으로 치우며 다가왔다.

타솔라가 나를 보았다.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검을 집어넣었다.

“내가 뭘 어쨌는데?”

“공주님이 앓고 난 뒤에 신원이 수상한 애들이 다 잘렸어. 당연히 우리 애들도 쫓겨났고요. 이젠 기사들도 제대로 일해서 밤에 몰래 잠입하기도 힘들대요. 그래서 일단 철수하라고 했죠.”

“그런 건 미리미리 대비했어야지.”

“어머. 정곡을 찌르시네. 맞아요. 내가 에피파네스 왕실을 너무 우습게 본 탓이야.”

그녀가 가볍게 대꾸하고 내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부탁했던 것 중 일부예요. 이건 핑계고 사실 애기씨 얼굴이나 보려고 직접 왔어요.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저렇게 말하는 건 에피파네스 왕가에 힘이 생길 거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사람 볼 줄은 아는구나?”

“그럼. 내가 이 바닥에서 하루 이틀 구른 것도 아니고. 조금이지만 빨리 가져왔으니까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알겠으니까 가 봐.”

내 말에도 로즈라는 떠나지 않고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애 같지 않단 말이야.”

“그래도 애는 애야.”

“이렇게 말을 받아친다는 점이 가장 애답지 않고.”

“안 가? 한가해?”

괜히 뜨끔해 퉁명스럽게 묻자 로즈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조심하세요. 누군가 공주님 주변을 맴돌고 있는데 우리 애들도 실체를 본 적이 없대. 우리 고객님, 무병이든 유병이든 장수하셔야 우리한테 의뢰도 많이 하지.”

뚱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붉은 미소를 머금고 내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인상을 찌푸리며 볼을 닦는 나를 보고 로즈라가 허리를 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또 봬요, 공주님.”

그리고 짧은 인사만을 남긴 채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타솔라가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저번에 도박장…….”

“맞아.”

가볍게 대답하며 로즈라가 전해 준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에 적혀 있는 건 내가 찾던 보라색 태양 문신을 손등에 새긴 남자. 에리오에 관한 내용이었다.

7개월이 걸린 것 치고는 정보의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레그레시오가 신흥 종교라는 것은 게텔린 부인에게 들어서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것 말고 새로운 정보도 있었는데 요약해 보자면 이러했다.

대주교는 신성력으로 만병을 치료하고 젊음까지 되돌려 주는 기적을 행한다. 그러나 샤마흐 신이나 레바나 신에게 속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에리오’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직위였다.

대주교의 직속 사제로, 신의 대리인을 자청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손등에 보라색 태양 문양을 새겼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신도들에게 헌금을 받고 기적을 볼 수 있는 날을 정해 준다고 한다.

하지만 본 사람마다 인상착의를 다르게 말해 에리오라는 직급의 신관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다였다.

신자 규모, 교리, 목표, 신전의 위치는 아직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로즈라의 정보력이 약해진 거야, 아니면 이 녀석들이 잘 숨어 있는 거야?’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품 안에 넣었다.

어쨌거나 일을 맡겼으니 더 기다려 봐야지.

키네시아가 왕위에 오르려면 멀었으니 시간은 충분하다.

***

셰피오 백작에게 맡긴 군사는 순조롭게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키네시아가 게텔린 백작을 해치우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줬다는 소문을 퍼트렸던 게 군사를 모으는 데에 제법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가끔 정책에 조언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밖에 나가서 길거리 아이들을 모아 훈련 시켰다.

사람의 특징을 기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하게 하는 것에도 공을 들였다.

재능 있는 아이들 몇 명은 오페라 가수나 화가로 키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소문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식사를 하면서 애들한테 오늘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물어보는 게 다였지만 말이다.

고문 역할이나 하면서 인재를 양성하고 있으니 진짜 은퇴한 느낌이었다.

‘내가 죽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 율시안에게 제대로 나라를 물려줬다면 이렇게 살았겠지?’

여유롭게 지내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렀다.

푸르던 궁전의 숲이 붉고 노랗게 물들기 시작할 즈음, 내 생일날이 되었다.

연회 전에 잠깐 시간을 내어 키네시아 방 발코니에서 후손들과 차를 마시던 나는 엄청난 호위를 받으며 들어오는 마차 3대를 발견했다.

“저게 다 뭐야?”

플로레타와 포넨트도 내 말에 고개를 돌려 밖을 확인했다.

플로레타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미르 공작가 깃발이야.”

“그러게. 로그리예가 놀러 왔나?”

포넨트가 키네시아를 보았다.

그녀는 우리와 동떨어져 책상에 앉아 서류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발코니 문이 활짝 열려 있어 대화를 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직접 온 건 아니고 선물만 보냈더라. 보석이래.”

“무슨 보석 보내는 데에 마차를 3대씩이나 써?”

포넨트가 어이없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나는 턱을 괴고 마차 안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상자를 구경했다.

보석을 담은 상자마저도 백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옮기느라 움직일 때마다 햇빛을 반사해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물론 이런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보석 상자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포넨트가 다가와 팔꿈치로 나를 쿡 찔렀다.

“너 엄청 만족스러워 보인다?”

“로그리예 놈. 능글거리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왕족을 제법 공경할 줄 알잖아.”

플로레타가 앞에서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리아 속물 같아…….”

하여간, 소심해 보이는데 은근히 자기 할 말 다 한단 말이야.

조금 뜨끔해 눈을 가늘게 뜨고 플로레타를 쳐다봤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플로레타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키네시아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들어와.”

중년의 남성이 문을 열고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아미르 공작가의 집사입니다. 로그리예 공자께서 이 선물은 직접 전해 드리라고 해,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나는 발코니에서 나와 소파로 자리를 옮기며 물었다.

“실례는 무슨. 어떤 건데?”

그가 안으로 들어와 눈짓하자 하녀가 벨벳으로 된 상자를 들고 왔다.

집사는 직접 뚜껑을 열어 상자에 든 것을 보여 주었다.

“이건…….”

둥글게 연마된, 자두만 한 크기의 붉은 다이아몬드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그 주위에는 작고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둥글게 박혀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세공된 보석들이 줄지어 둥근 원형을 그렸다.

나는 목걸이를 단번에 알아봤다.

“드래곤의 심장.”

이 목걸이는 내가 황제일 때 가장 자주 착용하던 것이었다.

멍하니 바라보는데 집사가 말을 덧붙였다.

“공자님께서 이 목걸이가 경매에 나온 것을 보고 이라네 공주님이 떠오른다며 구입하셨습니다.”

“……잘 받았다고 전해 줘.”

“예, 공주님.”

집사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상자를 든 채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옆으로 다가온 플로레타가 목걸이를 보고 감탄했다.

“우와. 예쁘다.”

“그러게. 신경 좀 썼네.”

포넨트까지 내 옆에 서서 목걸이를 보고 있으니 키네시아도 흥미가 생겼는지 슬그머니 다가왔다.

“갖고 싶었던 거야?”

“갖고 있었던 거지.”

“리아. 너는 이런 목걸이 없었어.”

“나 말고, 왕실이. 이거 이라네 황제의 목걸이거든.”

내 말에 포넨트가 깜짝 놀랐다.

“뭐? 그 폭군의 목걸이라고? 그러면 불길한 거 아니, 아! 왜 때려?”

성군을 음해하니까 때리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포넨트에게 싸늘한 눈빛을 쏘아 주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혼자 씩씩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생일이니까 이번만 봐준다.”

봐주긴 뭘 봐줘. 이기지도 못하는 게.

코웃음을 치자 그가 망아지처럼 날뛰다가 벽시계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뭐야. 벌써 4시야? 나 간다. 이따가 연회장에서 봐.”

포넨트가 갑작스럽게 떠나 버리고 나자 플로레타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도 할 일 있었는데……. 이따 봐, 키네샤, 리아.”

그녀도 곧 인사만 남기고 방을 나가 버렸다.

키네시아는 여전히 내 손에 들린 상자를 보고 있었다.

“폐하의 물건이라고?”

“응. 펠리온이 나에게 청혼하면서 준 선물이야.”

“성 라파일과 결혼했던 거 아니었어?”

“맞아. 이걸 받은 건 라파일을 만나기 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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