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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62화 (62/151)

<62화>

키네시아의 시선에 담긴 신뢰와 애정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차라리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한 말이면 딱밤이라도 때려 주었을 텐데, 내게 가족의 정을 요구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라는 거야.”

일부러 더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몸을 뒤로 뺐다.

표정 관리가 이렇게 되지 않은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설픈 모습을 보이기 전에 화제를 전환하려고 눈을 굴리는데 키네시아가 다시 말을 걸었다.

“성불은 꼭 해야 하는 거야?”

당연한 소리를.

“그럼 얘 몸에서 그냥 살라고?”

“그게 아니라, 비어 있는 몸이라면 하나 빌릴 수 있지 않을까?”

“몸이 무슨 지어 놓고 안 쓰는 별장 같은 건 줄 아니? 비어 있는 걸 빌리게.”

퉁명스럽게 말해도 키네시아의 표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 있는 게 더 낫지 않아?”

“글쎄.”

다른 몸을 얻으면 황제로 살진 못할 것이다. 그런 삶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황제로서의 삶을 되돌려 줄 테니 살아 볼 거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봤자 그게 어디 온전히 내 삶인가?

영혼은 몸을 떠나도 과거는 몸에 남기 마련이다. 결국 그렇게 삶은 연명하는 건 누군가의 인생을 빼앗는 것에 불과하다.

“흙은 흙으로,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야지. 그게 섭리야.”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룩소르가 방으로 들어오며 그 침묵을 깨트렸다.

“리아도 있었구나!”

마침 분위기도 이상했는데 잘됐다. 이 기회에 도망쳐야지.

대뜸 팔을 벌려 나를 안으려고 하는 룩소르를 쏙 피하며 문으로 향했다.

“나는 잠깐 외출 좀 하고 올게.”

“셰피오 자작의 편지는 어쩌고?”

“둘이 먼저 읽고 있어. 나는 나중에 볼 테니까.”

뒤에서 키네시아가 잠시 뒤에 같이 가자고 하는 소리가 언뜻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그냥 문을 닫았다.

그리고 타솔라를 불렀다.

“광장에 가십니까?”

“응.”

타솔라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반년 넘게 길거리의 아이들에게 음식을 챙겨 주시다니, 새삼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새삼스럽네. 난 언제나 대단했거든.”

하지만 단순히 동정심이나 의무감 때문에 아이들을 챙겨 주는 건 아니었다.

사실 내가 음식을 나눠 주기 전에도 룩소르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왕실 금고를 열었다.

내가 따로 챙기지 않아도 굶어 죽는 건 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반년 넘게 아이들과 친밀도를 쌓아 두었으니 이제 슬슬 그 목적을 드러내도 될 것 같았다.

“가자.”

주방으로 가서 아침 식사에 쓰고 남은 음식들을 봤다.

나는 그것들을 챙겨 하인들에게 들고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주방장에게 부탁한, 개별 포장한 사탕도 따로 챙겼다.

몇 달 전만 해도 묽은 수프나 싸구려 고기만 식사에 올라왔었는데 지금은 꽤 식사의 질이 좋아졌다.

별관도 재건을 시작해 이제 막 토대를 세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 자금이 부족해.’

군대를 키우고 성벽과 궁전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큰 돈이 필요하다.

사업을 하려고 해도 자본금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룩소르가 왕실의 재산을 하도 많이 지방으로 퍼다 날라서 세금만으로는 국정을 운영하기 빠듯했다.

‘취약한 지역을 보완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별말 안 하고 있긴 한데…….’

룩소르가 시장으로 임명한 자들이 그 돈이 진짜 필요한 곳에 쓰고 있는지는 가 봐야 알 일이었다.

그는 게텔린도 믿을 정도로 순진하니 제대로 된 사람을 파견했을지도 의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찾아가서 보고 싶지만, 10살짜리의 약해 빠지고 짤뚱한 몸으로는 나라를 다 둘러보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직접 볼 수 없는 곳의 정보를 전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골목으로 한참이나 들어가던 마차가 멈춰 섰다. 내리자마자 아이들이 내게 뛰어왔다.

“공주님이다!”

“야야, 공주님이 오셨어!”

“오늘은 왜 다른 공주님들은 안 오셨어요?”

“왕자님은 없어요?”

“맞아. 왜 혼자예요?”

애들이 나를 둘러싸면서 조잘거렸다.

5살부터 13살까지의 아이들이 20명쯤 모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얘들아.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나는 애들을 이끌고 헛간처럼 생긴 건물로 들어갔다.

안에는 둥글게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식탁과 의자 여러 개가 있었다.

타솔라가 내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아이들도 저마다 제 의자를 끌고 탁자로 모여들었다.

다들 착석한 것을 확인하고 손짓하자 하인들이 음식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애들은 식탁 위에 펼쳐지는 음식에 정신이 팔려 군침을 흘렸다. 나는 애들보다는 하인들의 옷차림을 눈여겨봤다.

그들이 신은 구두나 옷에 달린 단추의 색, 레이스의 모양같이, 다른 사람들이라면 관심도 없고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을 말이다.

마침 하인이 사탕이 담긴 유리병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건 나한테 줘. 그리고 너희는 나가 있어.”

“예, 공주님.”

아이들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내가 안고 있는 유리병에 흥미를 보였다.

식사가 끝나면 알려 주려고 했는데, 제일 어린아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공주님 그게 뭐예요?”

“사탕.”

“사탕? 사탕이 뭐예요?”

설탕은 아주 귀하니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주 달고 맛있는 거. 입에서 녹아.”

“눈처럼?”

“얼음처럼. 차갑지는 않고.”

아이의 커다란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다들 손으로는 열심히 음식을 퍼 나르면서도 눈은 내가 안고 있는 유리병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먹고 싶니?”

“응!”

나는 식탁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대체로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가지고 온 음식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우리 재미있는 놀이 할까?”

“어떤 거요?”

“아까 나간 남자 둘 있지?”

“응!”

“그중에 내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머리 색은 뭔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맞히는 사람한테 사탕 하나를 줄게.”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이 공격적으로 손을 들었다.

나는 손짓으로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제일 자세하게 말한 사람에게는 하나를 더 줄 거야. 대신 다른 사람이 말했던 건 말하지 않기.”

“나! 나! 갈색 머리였어요!”

“잘했어.”

아이에게 사탕 하나를 꺼내 주었다.

이제 막 5살이 된 아이는 사탕을 받자마자 통째로 입에 넣으려고 했다.

“종이 벗겨 내고 먹어.”

사탕을 까서 입에 넣어 주자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 커다랗게 변했다.

“너무 맛있어. 사과보다도 더 달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맞힌 아이들에게는 타솔라가 사탕을 전해 줬다.

사람이 많다 보니 갈수록 말할 수 있는 게 없어졌다.

15명이 말하고 나자 할 말이 똑 떨어졌는지 애들이 울상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더는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제일 나이 많은 여자애가 앉은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작은 아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왼쪽 셔츠 소매에 실밥이 튀어나와 있었어요!”

저건 나도 못 봤던 것이다. 나는 밖으로 나가 하인의 소매를 확인했다.

진짜 실밥이 튀어나와 있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다른 아이가 또 손을 들고 있었다.

“조끼 두 번째 단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대요!”

있었대요, 라니. 누군가 알려 준 모양이었다.

순진한 말이 귀여워 웃음을 터트리며 사탕을 주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손을 들어 누군가 알려 준 듯한 특징을 말하고 사탕을 받아 갔다.

남은 사람은 이제 한 명, 다른 아이에게 귓속말로 하인의 특징을 알려 주었던 여자애였다.

너무 알려 준 게 많아 아무 말도 못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내 걱정과 달리 그 애는 하인의 특징을 줄줄 말했다.

“목소리는 저음인 데다가 작았고, 귀를 뚫었던 흔적이 있었어요. 오른손 중지 옆면에 검은색 잉크가 약간 묻어 있었고, 눈썹은 정돈되어 있지 않았고, 목에 맨 레이스의 주름은 총 9개였어요.”

확인해 보니 다 사실이었다.

저런 기억력이 있는 애가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잠시 여자아이의 이름을 떠올리며 유리병에서 사탕을 꺼냈다.

“소피아 맞지? 기대 이상이야. 약속대로 사탕 두 개 줄게.”

“감사합니다, 공주님.”

“앞으로 이런 놀이를 자주 할 거야. 평소에 주변을 잘 관찰하는 습관을 들이면 도움이 될걸.”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사탕 병을 보았다.

아이들 머릿수만큼의 사탕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소피아를 불러 사탕이 든 유리병을 통째로 떠넘겼다.

“소피아. 이제 네가 대장이야. 이건 네 마음대로 쓰도록 해.”

“감사합니다, 공주님.”

소피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헛간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용을 대충 들어 보니 사탕을 나눠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피아는 쓸 만한 것 같으면 궁전으로 데려와야겠어.’

물론 다른 아이들도 재능이 있다면 지원할 것이다.

예술 쪽이든 행정 쪽이든 첩보 쪽이든, 인재는 귀한 법이니까. 오래도록 유심히 지켜봐야지.

나는 그림자처럼 서 있는 타솔라와 문 옆에서 나란히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에게 돌아가자고 말한 뒤 마차로 향했다.

그렇게 막 골목 앞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건물 그림자 아래에 몸을 숨긴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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