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이라네리아가 알려 준 대로 아버지를 구출해 낸 아르만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소도시 변두리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이라네리아가 준 돈으로 숨어서 살았다.
하지만 있는 돈만 믿고 살기엔 미래가 너무나 불안했다.
혹시 게텔린이 쫓아와 또 도망쳐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돈은 아낄 수 있으면 아껴 놔야 했다.
그래서 아르만은 도시에 머무르는 용병단에서 무술을 배우며 허드렛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수도의 소식이 들려왔다.
“게텔린 백작이 사형당했다며?”
“키네시아 공주님이 억울하게 빚진 사람들 앞에서 채권을 다 불태우셨다던데.”
“그럼 땅을 뺏긴 사람은 어떻게 된 거야?”
“듣기로는 공주님이 사람을 보내서 돌려주셨다더라고.”
아르만은 대화하고 있던 용병들에게 다가갔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내가 수도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직접 들었다고. 거기 광장 공고문에도 붙어 있었어.”
“그럼 행적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된답니까?”
“그건 우리도 모르지.”
아르만은 초조해졌다. 그는 숨어 있는 상태기에 궁전에서 사람을 보내도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땅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아버지를 모시고 수도로 가야 해.’
돌아갈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도 가슴이 뛰었다.
‘혹시 공주님도 뵐 수 있을까?’
그는 기대를 품고 일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불이 환하게 켜진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문 앞에 묶여 있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자 아는 얼굴이 보였다. 달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게텔린의 명령으로 빼앗은 땅을 운영하던 남자이니 원수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혼자 왔다면 당장 내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옆에는 궁전에서 온 기사도 앉아 있었다.
아르만이 들어오지 않고 서 있자 아버지가 그에게 손짓했다.
“아르만. 들어와 앉거라.”
아르만은 외투를 벗고 제 아버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지시스라고 합니다. 공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지시스라면 이라네리아 공주님이 쓸 만한 것 같다며 눈여겨보던 기사 중 한 사람이었다.
‘이라네리아 공주님이 보내신 거야.’
어쩌다 모든 일이 키네시아 공주가 한 것으로 소문이 난 것인지, 숨어 있는 자신을 어떻게 찾은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르만에게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나를 잊지 않으셨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어떻게 지내고 계실지 참기 힘들 정도로 궁금해졌다.
그가 이라네리아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아버지와 영지 관리인의 대화는 채권 말소에 관한 이야기를 지나 다른 주제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럼 광산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지만 게텔린의 수하는 광산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대답한 것은 의외로 지시스였다.
“남고 싶은 사람은 제대로 돈을 받고 일하기로 하고,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자는 탕감되었고, 무보수로 일한 시간은 보상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아르만의 아버지가 눈을 감고 울컥 치미는 감정을 한 번 삼켰다.
“감사합니다.”
“그 말 그대로 공주님께 전하겠습니다.”
지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게텔린의 수하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르만과 그의 아버지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그래도 관리는 잘해 두었으니 그대로 운영하시면 될 겁니다.”
갑작스러운 방문객들이 떠나려 하자 아르만은 자신이 배웅하겠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다.
지시스는 게텔린의 수하를 묶어서 말에 태우고 있었다.
아르만이 그에게 다가갔다.
“기사님.”
지시스가 몸을 돌렸다. 아르만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공주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아프신 곳은 없으시고요?”
“예.”
짧은 대답이었지만 아르만은 만족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시스가 말에 올라 아르만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아르만은 지시스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공주님을 위해 움직이는 기사를 보니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확실하게 보였다.
그는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이미 얼마 없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아버지. 저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허리를 편 아버지가 아르만을 바라보았다. 아르만은 제 결심을 말했다.
“저는 궁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가서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싶어요.”
아버지는 잠시 아들을 응시했다.
혼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쓸쓸하겠지만, 도망치며 자초지종을 모두 들었기에 아르만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사람이 은혜를 받았으면 응당 갚아야지. 하지만 어떻게 궁전으로 갈 셈이냐?”
“일단 검술을 계속 연습해 용병이 될 생각입니다.”
용병단에 정식으로 입단해 세상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배우다 보면 공주님께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면 시종이든 기사든, 무엇이든 되어 궁전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엔 곁에 남을 겁니다.”
***
해가 바뀐 지 벌써 7개월이 지났다.
한여름 무더위에 늘어져 있으려니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할 일이 너무 없으니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편지나 볼까?’
게텔린이 사라진 후 뭔가 변화를 느낀 것인지 나나 키네시아에게 줄을 대려는 놈들이 많아졌다.
물론 받아 주진 않고 있다. 그런 번쩍이들은 데리고 있어 봤자 골치만 아프다.
내가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하나는 몰래 군사를 양성을 맡긴 반겔레스 셰피오 자작. 다른 하나는 약혼자가 될 로그리예 아미르.
반겔레스에게서 오는 것은 사실 보고서에 더 가까웠다. 룩소르, 키네시아와 함께 볼 것이니 따로 두었다.
그리고 로그리예의 편지는…….
[영원히 하나뿐일 나의 공주님께.
안녕, 내 사랑? 오늘도 따사로운 햇살이 유리창에 맺혀, 황금빛으로 반짝일 때면 공주님의 눈동자가 떠올라. 마음에 드는 걸 보던 공주님의 눈도 꼭 그런 빛으로 반짝이고는 했었는데. 오늘따라 공주님이 더 그립다. 너무 보고 싶어.]
대충 이렇게 징그럽고 낯간지러운 헛소리뿐이다.
그래서 로그리예의 편지는 뒤에서부터 읽어야 한다. 날짜와 ‘오늘도 사랑을 담아, 네 이름을 영혼에 새긴 로그리예로부터.’라는 문장의 밑에 진짜 내용이 있었다.
[추신 1. 곧 생일인데 갖고 싶은 거 있어? 말만 해. 내가 뭐든 구해다 줄게.
추신 2. 우리 약혼은 언제 해?]
이렇게 말이다. 나는 종이를 한 장 꺼내고 깃펜을 들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답장을 썼다.
[로그리예에게.
1. 보석
2. 5년 뒤
이라네가.]
아. 이름을 잘못 썼네. 요즘 하도 주변에서 이라네 공주라고 불러대서 헷갈렸다.
그런 어려움이 있지만 이라네라고 부르라고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중이다.
‘이라네리아보다는 이라네가 더 위엄 있어 보이잖아.’
잉크를 찍어 잘못 쓴 이름 위에 두 줄을 찍찍 긋고 이름을 바꿨다.
[이라네리아가.]
잉크를 말린 뒤에 편지를 봉인하고 시종을 불렀다.
“이거 로그리예 아미르에게 보내.”
“예, 공주님.”
시종이 나가고 난 뒤에 셰피오 자작에게서 온 편지를 들고 방을 나왔다.
집무실로 들어가자 서류에 파묻혀 있는 키네시아가 보였다.
“전하는?”
“잠깐 회의하러 가셨어. 왜?”
“셰피오 자작한테 편지가 와서. 그런데 나 생일이야?”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로그리예가 불어서 알았지.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키네시아가 서류를 든 채 내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은근슬쩍 서류를 건네는 키네시아의 손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물었다.
“그래서 이라네리아 공주의 생일이 정확히 언젠데?”
“9월 16일이야.”
“9월 16일이라고?”
“왜 그렇게 놀라?”
안 놀랄 수가.
“네 동생, 나랑 생일이 똑같아.”
“정말? 폐하 생일이 9월 16일이야?”
“응. 샤마흐력 1618년 9월 16일. 신기하네. 어쩜 이렇지?”
“그러게. 이름도, 생일도, 좋아하는 것도 같잖아…….”
키네시아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그녀가 제 의혹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몸 주인이랑 내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망상한 거 아니야?”
“망상이라니…….”
키네시아는 머쓱해하면서도 내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게 비슷한 건 그렇다 쳐도, 태어난 날이 같고 이름이 비슷한 건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라네리아 공주가 태어날 때 100살도 더 먹은 마법사가 나타나, 막내 공주 이름을 이라네 황제와 비슷하게 지어야 한다고 세뇌라도 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까지는 백 번……, 아니지. 백 번도 적다. 한, 만 번 정도 양보해 그랬다고 치자.
하지만 태어나는 날짜를 똑같게 만드는 건 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뚱한 표정으로 빤히 보자 키네시아가 수긍했다.
“나도 우연이라는 거 알아. 그래도 그냥 그러면 좋을 것 같아서.”
“뭐가 그러면 좋아?”
“폐하가 리아면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아도 되잖아.”
“…….”
“폐하가 계속 우리 곁에 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