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나보고 폭군이래?-60화 (60/151)

<60화>

도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전을 나왔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시종장에게 집안에 일이 생겨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공주님께 인사는 드리고 가세요.”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혹여나 수상함을 느끼고 따라올까 걱정스러웠다.

도라는 마지못해 이라네리아 공주의 앞에 섰다.

일을 그만두고 궁전을 나간다는 말에도 공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잘 가. 기왕이면 잘살고.”

심드렁하기까지 한 반응에 도라는 긴장이 풀렸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손을 내젓는 이라네리아를 뒤로하고 도라는 외성과 제일 가까이에 있는 레바나 신전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미리 도착한 대신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라 양. 와 주셨군요.”

“네. 대신관님.”

그녀는 대답하면서도 돈주머니를 찾아 눈을 굴렸다.

대신관이 웃으며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는 도라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의 옆에 섰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진 무거운 상자를 열어 안을 보여 주었다.

넘칠 정도로 차 있는 금은보화에 도라의 눈이 반짝였다.

“이게 다 제 건가요?”

“가져갈 수 있다면 말입니다.”

“예? 그게 무……, 허억!”

갑자기 느껴지는 격통에 도라가 고개를 돌렸다.

대신관의 손에는 팔뚝만 한 길이의 검이 들려 있었다.

“대, 대신관, 님…….”

도라가 쓰러지며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미 힘이 빠진 손은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대신관이 혀를 찼다.

“레바나를 끝까지 섬겼다면 목숨을 부지하게 해 주려 했거늘.”

신성 제국을 건립하는 것은 성스럽고 고귀한 일이다.

하지만 위대한 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미개한 놈들이 보기엔 그저 반란을 꾀하는 것으로 보일 터였다.

그걸 들킨다면 레바나 교는 에피파네스에서 완전히 물러나야 한다.

안 그래도 이라네리아 공주의 행보가 과격해 걱정스러운데 비밀을 알면서도 협조하지 않는 자를 살려 둘 순 없었다.

대신관은 선한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로 숨이 꺼져 가는 도라를 응시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예리한 칼날과 핏방울을 선명하게 밝히며 반사되었다.

그 희미한 빛이 대신관의 얼굴에 시선처럼 닿았다.

마치 신은 모든 악행을 지켜보고 있다는 듯이.

***

게텔린 백작 부인은 서류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은 사교계에만 집중했기에 집안 사업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배워야 했다.

불법적인 돈과 사업은 나라에 몰수당했고 남은 것 중 일부도 자진해서 왕실에 바쳤다.

운영해야 할 것의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오히려 다행이었다.

예전 같은 양이었다면 아마 배울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짓거리가 할 만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교계가 그리웠다.

화려한 옷과 장식품, 웃음소리와 음악, 춤이 그리웠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내며 사람들이 제 발치에 앉아 비위나 맞춰 주는 그런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마침 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님. 초대장이 왔습니다.”

“초대장?”

게텔린 백작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게텔린 백작이 사형당하고 난 뒤 하루에 수십 통씩 오던 초대장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왕실에서 보내는 초대장에는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다.

좋지 못한 일로 주목받는 것이 불편했던 탓이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남편의 목을 내주고 명맥을 유지했다며 그녀를 비난하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초대해 주면 좋으련만 아무도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가끔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초대장을 보내긴 했지만 게텔린 백작 부인은 수락하지 않았다.

눈만 마주쳐도 치를 떨던 사람이 제 저택에서 열리는 다과회에 구태여 초대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여러 사람 가운데에 나를 앉혀 두고 비웃으려는 의도일 게 뻔해.’

오늘 온 초대도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보낸 것이라면 불태워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낸 것일 수도 있기에 그녀는 어서 내놓으라는 듯 손을 뻗었다.

집사가 초대장을 건네주었다.

기대와 달리 깨끗한 편지 봉투에는 왕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게텔린 부인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벌써 연말 연회를 할 때가 된 것이었다.

‘예전이었다면 궁전에 들어가서 살았을 텐데.’

게텔린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정말로, 화려한 삶이 진심으로 그리웠다. 자신은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시간만 죽이고 있을 만큼 시시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 볼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오만하게 뾰족 올라간 한쪽 입꼬리를 떠올리면 금세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그 음흉한 꼬맹이를 또 봐야 하는 거잖아.’

게텔린 부인에게 이라네리아 공주는 껄끄러운 사람이다.

물론 이라네리아 공주 덕분에 재물 말고는 모든 게 끔찍했던 남자와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가문의 재산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상당 부분을 빼앗겼어도 이혼할 때 받을 돈보다는 훨씬 많았다. 백작 부인이라는 지위도 유지되고 말이다.

그렇지만 사교계에 나갈 때마다 받는 비난과 눈총도 전부 이라네리아 공주의 탓이었다.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재산을 헌납하라는 요구만 하지 않았어도 동정 여론을 형성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라네리아 공주에게 보라색 태양에 관한 말한 뒤, 에리오와의 연락이 뚝 끊겼다.

젊음을 되찾아 준다는 기적이 코앞에 있었는데, 그걸 놓친 것이었다.

어쨌든 여러 이유로 고마워할 수도, 무턱대고 원망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집사가 물었다.

게텔린 부인은 초대장만 만지작거리다가 결심했다.

지금 그녀는 그저 저를 탐탁지 않게 보는 가문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며 겨우 백작 대리인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게텔린 백작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딸에게 물려주려면 슬슬 사교계 활동을 해야 했다.

“참석한다고 답장해.”

“알겠습니다.”

백작이 죽은 지 한 달이나 지난 데다가 사교계에는 항상 새로운 일이 생기니 수군거림도 좀 잠잠해졌겠지.

괜찮다면 이번에 나갔을 때 다른 귀족들과의 관계도 회복하고 데릴사위로 들일 만한 사람도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기대를 품고 연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훔쳐보며,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거리를 유지했다. 게텔린 부인이 용기를 내어 다가가려 하면 수군거리며 등을 돌리거나 자리를 피해 버렸다.

아직도 이런 취급일 줄이야.

게텔린 부인이 치욕스러움에 부채만 움켜잡고 있을 때였다.

그녀에게로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다가왔다.

“하도 집 밖으로 안 나오길래 다리라도 부러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백작 부인?”

게텔린 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노골적으로 티 낸 것은 아니었으나, 게텔린 부인의 눈에는 후작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였다.

‘나를 비웃고 있는 거야.’

게텔린 부인과 네페르트 부인은 태생부터가 달랐다.

데뷔 당시 네페르트 부인은 막 상경한 촌뜨기였고, 게텔린 부인은 나름 부유한 집안의 금지옥엽이었다.

그러나 분위기와 데뷔 시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항상 비교당했다.

원래도 서로를 언짢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이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것은 결혼 상대를 찾을 때부터였다.

백작 부인이라고 원래부터 게텔린 백작과 결혼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게텔린 백작가는 이인자에 불과했다. 그녀는 최고의 집안인 네페르트 후작가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먼저 그 자리를 꿰찼다. 그녀가 바로 지금의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후작과 함께 다니며 게텔린 백작 부인 앞을 얼쩡거렸다.

꼭 네가 원하던 것을 결국 내가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만 같았다.

단순히 게텔린 부인의 열등감 때문에 일어난 오해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낙은 분노에 찬 게텔린 백작 부인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전세가 역전되었다.

후작이 사고로 사망한 뒤 가세가 조금 기울었다. 그사이 아첨과 비열함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게텔린은 빠르게 돈을 불리고 귀족들의 정점에 섰다.

게텔린 부인 역시 사교계에서 입지를 얻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네페르트 부인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텔린 부인을 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그래. 이게 우리 위치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변두리 출신인 것만 보고 무시하더니. 꼴 좋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제 주변에 있는 다른 귀족의 어깨를 툭 밀며 지나갔다.

그 바람에 귀족이 들고 있던 와인이 게텔린 부인의 드레스에 쏟아졌다.

네페르트 부인은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사과를 하기는커녕 노골적으로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게텔린 부인에게 와인을 쏟은 귀족도 사과 한마디 없이 네페르트 후작 부인을 따라갔다.

게텔린 후작 부인은 손수건을 꺼내 와인이 묻은 치마를 힘주어 눌렀다.

‘유치하긴.’

그렇게 말했지만 속은 흙탕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자기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나한테 이런 모멸감을 줘?’

비록 불미스러운 일로 잠시 외면받긴 했지만 자신은 이런 취급을 당할 사람이 아니다.

특히 다른 누구도 아닌 네페르트 후작 부인에게는!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위치가 저보다 높을 수는 없다. 입지를 잃은 그녀가 다시 귀족들의 정점에 설 수 없다면 네페르트 후작 부인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

‘올라가지 못하면 끌어내리겠어. 그게 몇 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부채를 움켜쥔 손이 분을 이기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렸다.

이라네리아가 먼발치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며 황금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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