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동안 멀리서 훈련을 지켜봤던 집사장도 이라네리아의 끈기와 독기 가득한 눈빛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에피파네스 역사에 그런 이름을 가진 황제가 있지 않습니까?”
“이라네 황제?”
“맞습니다. 리아 공주님보다는 이라네 공주님이라는 애칭이 더 잘 어울리겠습니다.”
“에이. 그래도 폭군의 이름을 공주님께 붙이는 건 아니지.”
단장은 부정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장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몸살이 다 나은 이라네가 아침 훈련 직전에 기사단장을 궁전으로 호출해 연무장 앞에 세워 둔 탓이었다.
“혹시 제게 감독을 맡기시려는 겁니까?”
“아니. 무슨 소리야. 그대도 훈련을 해야지.”
“저 말입니까? 저는 단장입니다.”
“내기 내용 잊었어? ‘기사’들을 훈련시키기로 했잖아. 단장은 기사가 아닌가? 아니라면 여기서 제복을 벗고 퇴근해도 좋아. 물론 영영 출근할 생각은 하지 말고.”
기사 단장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당했다. 아주 철저하게. 기사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단장인 그가 자신이 기사임을 부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는 지독한 훈련을 함께하며 견디게 되었다.
덕분에 잊고 살았던 검술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기 시작했으나, 마냥 기뻐하기엔 몸이 너무나도 고됐다.
“이라네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게 맞았어. 무슨 10살짜리의 권모술수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기사들을 통해 널리 퍼졌다.
얼마 되지 않아 궁정인들까지 알음알음 막내 공주를 폭군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라네리아가 본의 아니게 본래의 이름을 되찾게 된 순간이었다.
***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쉬는 날, 도라는 아침 일찍부터 나갈 준비를 했다.
도라와 같은 방을 쓰는 하녀가 부산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도라, 오늘도 신전에 가?”
“응.”
대답하는 도라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하지만 잠에서 덜 깬 하녀는 그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할 뿐이었다.
“도라는 여전히 신앙심이 깊네.”
“그렇, 지…….”
신관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이거나 매우 신실한 사람이 아니면 신전은 필요할 때만 방문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도라는 매주 쉬는 날마다 신전으로 갔다.
보편적인 행동은 아니었으나 궁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어져 오던 것이기에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잘 다녀와.”
하녀는 도라에게 인사하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곧장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도라는 잠시 제 동료에게 눈길을 주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신전에는 외부인이 많지 않았다.
길거리의 아이들이 신전을 기웃거리긴 했으나 언제나 그렇듯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도라는 기도회장으로 들어가 거대한 달 문양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잠시 기도를 올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녀는 혼자 남자 자리에서 일어나 일반 신도는 들어가지 못하는 곳으로 향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들이 도라의 얼굴을 확인하고 길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고갯짓으로 인사한 뒤 긴 복도를 걸어 대신관의 방으로 들어갔다.
“도라 양. 오셨군요.”
“대신관님.”
“마침 차를 마시려던 중이었습니다. 여기 앉으세요.”
도라는 대신관의 맞은편에 앉았다.
보조 신관이 도라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도라는 인사를 하고 따뜻한 찻잔을 들었다.
그녀가 차로 긴장을 달래고 나자 대신관이 말을 걸었다.
“일주일간 궁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궁금하군요. 저번에는 막내 공주님이 크게 아프셨다고 했었죠. 지금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예. 지금은 괜찮아지셨어요. 그리고 요즘에는 기사들 훈련 감독을 하시는 모양이에요.”
“훈련 감독이라…….”
대신관이 찻잔을 들고 향기를 들이마셨다.
평소라면 묻지 않아도 이런저런 말을 꺼냈을 도라는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했다.
그러자 대신관이 먼저 물었다.
“그 외에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어떤,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국왕 전하께서 어떠셨다던가, 왕비 전하의 일이라던가, 하다못해 남은 사절단이나 키네시아 공주님에 관한 것이라도.”
“기사 단장이 공주님 방에 드나드는 걸 봤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듣지 못했어요.”
“저런. 아쉽게 되었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라는 대신관을 힐끔거리다가 치마를 움켜쥐고 용기를 냈다.
“대신관님.”
“네. 듣고 있습니다.”
“저 이제 이런 거, 그만두고 싶어요.”
“이런 거라니……. 하하하. 누가 들으면 저희가 나쁜 일이라도 하는 줄 알겠습니다.”
“…….”
“그냥 신앙심이 깊은 도라 양에게 제가 차를 대접하고, 도라 양은 그게 고마워 궁전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시는 것 아닙니까?”
표면상으로는 그렇기에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도라는 자신이 하는 짓이 어떤 것인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대신관의 의도도 명확했다. 그는 언제나 대화를 국왕의 국정 운영이나 이라네리아 공주에 대한 것으로 이끌고 갔다.
다시 궁전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도라는 밀고자가 된 듯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도, 이제 궁전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하려고요.”
“이유가 듣고 싶군요. 어떤 일이 도라 양의 마음을 움직인 겁니까?”
다정한 음성에 도라가 눈물을 글썽였다.
“저를 보시는……. 공주님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요.”
“이라네리아 공주님을 말씀하는 겁니까?”
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뭐 하나만 걸려 봐라. 당장 네 목을 날려 주마.’ 이런 눈으로 쳐다보신다고요.”
도라는 이라네리아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라가 레바나의 대신관에게 궁전에서 일어난 일을 처음 들려주었을 때만 해도 이라네리아 공주는 그냥 동네 꼬마 같았다.
그러나,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지금은 국왕보다 더 왕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궁전 전체가 이라네 공주님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에요.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면 큰일이 날 것 같아요.”
대신관의 표정이 굳었다.
레바나의 신도가 대신관보다 약소국의 공주를 두려워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면 레바나 신전이 궁전의 소식을 모은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했나?
“레바나 신전에 오는 것이 공주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입니까? 공주님이 저희를 적대하기라도 하시나요?”
“그, 그런 말이 아니라……! 공주님은 제가 레바나 신전에 기도하러 가는지도 모르세요.”
원하는 대답을 들은 대신관이 온화한 미소를 되찾았다.
원대한 포부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국왕 일가에게는 자신이 궁전 사정을 캐내고 다닌다는 것을 들켜선 안 된다.
‘조금만 더 인내하자. 조금만 더…….’
에피파네스의 영토는 커다란 강을 중심으로 광활한 평야가, 그 옆에는 자원이 풍부한 산이 있었다.
약소국의 손에 있는 풍요롭고 비옥한 땅이라니.
신성 제국을 이룩해 교황의 자리에 오를 사람에게 걸맞은 곳이 아니겠는가?
10년 전 에피파네스에 자리를 잡으며, 그는 이 땅을 차지해 교황이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왕실을 너무나 아꼈고, 신앙심은 부족했다.
그래서 귀족들에게 돈을 대 그들을 개종시켰다.
귀족들이 레바나 신을 믿는 걸 본 평민들 역시 신성력을 잃은 샤마흐 신전을 등지고 레바나 신전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평민들에게 신성한 물건을 팔며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귀족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왕실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신앙심이 깊어지면 이 나라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세력이 큰 게텔린과 친분을 유지하며 레바나를 국교로 만들어 영향력을 키울 생각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라네리아 공주가 그 계획을 막은 것이다.
‘그 어린애가 뭐라고.’
몇 달 전, 이라네리아 공주는 마법도, 신성력도 아닌 오묘한 기운을 몸에 두르고 레바나의 신전에 나타났다.
평소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사람 정신을 빼놓거나 간식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물 한 잔을 달라고 했다.
철이 든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뒤로 모든 게 변했다.
가장 큰 조력자였던 게텔린은 사형당했고, 대신관이 어렵사리 포섭해 놓은 귀족들은 이라네리아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그것만 어떻게 치우면…….”
“네?”
“아니요. 혼잣말입니다.”
“그럼 이제 저는 안 와도 되는 거죠?”
“도라 양.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주세요. 이건 신의 뜻을 받드는 고귀한 일입니다.”
“죄송해요.”
도라는 저를 붙잡으려는 대신관의 손을 뿌리치다시피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대신관은 온화한 빛을 잃지 않은 채로 도라를 타일렀다.
“그럼 제가 돈을 마련해 드릴 테니 수도를 떠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만약 말실수라도 해서 이라네리아 공주님의 의심을 사면 도라 양도 곤란해질 겁니다. 공주님이 포악해지신 것을 도라 양도 알지 않습니까? 고문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되어 드리는 말입니다.”
“고, 고문이요?”
도라는 이라네리아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폭군의 이름으로 자주 불리곤 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기사들도 그녀의 말이라면 꼼짝을 못 했다.
듣기로는 매일같이 고문과도 같은 훈련을 반복하며 세뇌당한 탓이라고 했다.
‘궁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신관님께 발설했다는 사실을 들키면 공주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야.’
대신관의 말처럼 위험하게 궁전에 있느니 도망치는 게 나았다.
신전은 부유하니 아마 돈도 섭섭하지 않게 챙겨 줄 것이다.
“알, 알겠어요!”
“그러면 돌아가자마자 짐을 꾸려서 외성 밖에 있는 신전으로 오십시오. 제가 사람을 보내 놓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감사합니다.”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어서 가 보라고 눈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