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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58화 (58/151)

<58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편하게 식사를 마쳤다. 오틸리에가 내 입을 닦아 주는 사이 룩소르는 식기를 내려놓고 쟁반을 든 채 일어났다.

“리아. 아빠는 일하러 가야겠구나. 아프면 부르려무나.”

“응. 빨리 가.”

“걱정하지 말아요, 룩소르. 제가 옆에 있을게요.”

룩소르가 쟁반을 하녀에게 넘기고 방을 나갔다.

룩소르를 배웅하고 아이들까지 전부 내보낸 오틸리에는 내 곁으로 돌아와 입에 약병을 가져다 대 주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쓴 액체가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으…….”

혀를 입천장에 비벼 쓴맛을 지우는데 오틸리에가 내 옆에 누웠다.

“우리 리아. 오랜만에 엄마랑 같이 잘까?”

“아니.”

차가운 거절에도 그녀는 내 목 아래로 팔을 집어넣고 나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의 몸으로 어른에게 안겨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진짜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해 그녀를 밀어 냈다.

“놔. 더워.”

오틸리에는 내 팔을 갈무리해 고쳐 안고 부드럽게 내 등을 토닥였다.

“자자. 우리 아가. 푹 자고 빨리 나아야지.”

“아가 아니야.”

진심인데 투정처럼 들렸는지 그녀가 웃으며 내 머리에 입을 맞췄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심경이 복잡하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까지, 오틸리에는 내 옆에 있었다.

***

“안 돼!”

“맞아. 못 나가!”

포넨트와 플로레타가 똑같은 자세로 성벽처럼 나란히 서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키네시아도 그 옆에 같이 서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원래 공성전을 할 때는 가장 약해 보이는 부분부터 공략하기 마련이지.’

나는 키네시아 앞에 섰다.

“설마 내 일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겠지?”

키네시아가 곤란하다는 듯 눈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무서운 사람인 척하고 있던 플로레타가 키네시아에게 팔짱을 끼며 소리쳤다.

“키, 키네시아 협박하지 마!”

말을 더듬어서 전혀 위협적이진 않았다.

나는 양손을 모아 뾰족하게 만든 뒤, 팔짱 낀 둘 사이를 뚫고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포넨트가 두 사람 뒤로 가서 출구를 원천 봉쇄했다.

“비켜! 이러다 훈련 늦어서 내기에서 지면 너희가 책임질 거야?”

“너 아직 아프다고! 쉬어야 한다고!”

포넨트가 키네시아와 플로레타 사이로 들어와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

“조은 믈르 흘 때 놔라.”

이를 악물고 협박했지만 포넨트는 만만치 않았다.

“너야말로 좋은 말로 할 때 침대에 누워라?”

포넨트가 양팔로 내 어깨를 꾹 눌러 강제로 침대에 앉혔다. 나는 팔짱을 끼고 눈앞에 있는 세 사람을 바라봤다.

입을 꾹 다물고 불만을 표시하자 달래 보려는 건지 도망치지 못하게 밀착해 있으려는 건지, 플로레타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빈틈이다.’

그러나 엉덩이를 들썩이기도 전에 포넨트가 내 생각을 눈치채고 키네시아 옆으로 붙어 빈틈을 메꿨다. 옆에서 플로레타가 내 손을 잡았다.

“그러지 말고 리아, 기사단장에게 말해서 내기를 하루만 미뤄 달라고 하자. 다들 네가 아팠다는 걸 아니까 이해해 주지 않을까?”

순진한 소리다.

“플로레타.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특히 내기 상대는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쉽게 이기기 위해 포기하라고 종용했으면 종용했지 ‘아이구, 아프셨군요. 제가 졌습니다.’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고작 이틀 남았는데 포기할 순 없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훈련시키기 더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지금 같은 오합지졸들로 궁전을 지킬 수 없다.

훈련 시작까지 앞으로 30분. 그 안에 탈출해야 하는데…….

저 세 명이 앞을 딱 지키고 있으니 난들 뭐 어쩌겠어.

“알겠어. 여기서 꼼짝도 안 할 테니까 너희도 방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더 자. 꼭두새벽부터 이게 무슨 난리야.”

“말만 그렇게 하고 우리가 나가면 도망치려고.”

포넨트 주제에 왜 예리하고 그러지?

어린애한테 속내를 들킨 게 민망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포넨트가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너도 진짜 지독하다, 지독해.”

이제껏 석상처럼 서 있기만 하던 키네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가서 아버지 모셔 올게.”

“그런다고 얘가 눈이나 하나 깜짝하겠냐? 그냥 여기서 못 나가게 지키고 있는 게 나아.”

그 말에 뒤돌려던 키네시아가 다시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그녀가 나를 등진 틈을 타 웅크렸던 몸을 쭉 뻗으며 달려 나갔다.

“리아!”

“야! 너 거기 안 서?”

“어휴…….”

미열이 남아서 그런지 조금만 뛰었는데도 숨이 찼다.

덕분에 키네시아에게 잡히고 말았다.

“키네시아 너마저…….”

“미안. 일단 쉬자. 내가 대신 뛸게.”

“내가 괜찮다잖아!”

손을 뿌리치려는데 자유로웠던 반대쪽 팔도 포넨트에게 잡히고 말았다.

몸을 힘차게 비틀어도 두 사람은 나를 놓아주지 않고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포넨트가 나를 질질 끌고 가며 소리쳤다.

“나도 같이 뛸게! 그럼 됐지?”

되긴 뭐가 돼! 내기 상대한테 양해도 안 구하고는.

누구 하나라도 물어뜯어서 탈출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공주님, 왕자님.”

키네시아를 축으로 포넨트가 원을 그리듯 돌아 뒤를 봤다. 양팔이 붙잡힌 채 발이 달랑 들려 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같이 뒤돌아보게 되었다.

거기엔 기사 단장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체면상 이런 처참한 꼴로는 차마 인사를 받을 순 없어 두 사람을 떼어 놓고 옷을 털어 반듯하게 폈다.

“단장이 여긴 어쩐 일이야?”

“공주님. 잠시 시간 좀 내어 주십시오.”

“따라와.”

따라오려는 애들을 떼어 놓고 그와 마주 앉았다.

잠시 후 도라가 들어왔다.

그녀는 힐끗 기사단장을 보더니 나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차 좀 내와.”

“네, 공주님.”

도라가 나간 뒤, 힐끗 시계를 보았다. 훈련 시간까지 20분 남짓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빨리 말해 줄래? 시간이 얼마 없어서.”

“훈련이라면 안 가셔도 됩니다.”

승리를 직감한 입꼬리가 씰룩거리려 했다.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무슨 의미냐는 눈으로 기사 단장을 보았다.

그가 탐탁지 않지만,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의미 없는 대치가 짧게 이어지던 도중 도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차를 내려놓은 후 구석에 서 있으려다가 내 손짓에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차를 마시며 딴청 피우자 앞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성격이 나쁘시군요.”

“내가?”

“예. 제가 온 이유를 아시면서도 기다리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제 입으로 말할 때까지 말입니다.”

“제법 눈치가 있네.”

찻잔을 내려놓으며 수긍했다.

“맞아. 굴복은 확실하게 받아 내는 편이라서.”

“예. 제가 졌습니다.”

그가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터트리고 말을 이었다.

“저는 공주님이 3일도 못 버틸 거로 생각했는데 벌써 5일이나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좋아. 그럼 내가 말한 대로 훈련 시키는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쓰러질 정도로 힘든데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훈련시켜야 하니까. 앞으로의 에피파네스는 지금과 다를 거야. 기사들이 제 노릇할 일이 생길 테니 대비해 놔야지.”

“제 노릇이라니…….”

“왕가와 나라를 지키는 것.”

기사 단장이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와 반대로 나는 편하게 몸을 뒤로 기댔다.

“그대는 기사단은 제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던데.”

찔렸는지 차를 마시려던 기사 단장이 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가……, 말입니까?”

시치미를 떼지만 그도 알 것이다.

그는 공주인 내 앞에서도 기사단을 지칭할 때 ‘제 기사단’이라는 표현을 썼다.

내가 데려간 기사들에 대해 말했을 때도 ‘돌려받겠다.’고 했고.

무엇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왕의 서명이 있는 명령서로 기사를 움직였다고 그렇게나 빈정 상해했겠어? 기사단은 왕의 것인데.”

“그건 명령서 내용이 공주님의 필체라…….”

“내 필체면, 전하의 서명은 효력이 없어지나?”

“…….”

기사 단장이 입을 다물었다.

“기사도를 제대로, 그것도 아주 바로 세우는 게 좋을 거야. 더불어서 그대가 충성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기사단의 존립 이유가 무엇인지 유념해 두도록 해.”

“예, 공주님.”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스콘을 밀어 주었다.

“그럼 이제 기사단을 어떻게 꾸릴지 제대로 상의해 볼까?”

***

“단장님. 오셨습니까?”

오전 내내 이라네에게 붙잡혀 있던 기사단장은 완연하게 지친 표정으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집사장과 부단장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떠셨습니까?”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있던 기사단장이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10살답지 않게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시더군. 우리 딸도 열 살이 되면 저렇게 똑똑해지려나?”

“……그게 답니까?”

“공주님은 공주라기보다는…….”

기사단장은 이라네리아를 떠올리며 잠시 말을 골랐다.

총기 어린 황금색 눈동자. 핵심을 짚는 통찰력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화술.

마주하고만 있어도 권위가 느껴졌다.

이라네리아 공주에게는 국왕인 룩소르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을 복종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 마치 황제라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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