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내 시대의 아네스 궁전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이상할 게 없었다.
샹들리에고 조각상이고 뭐고 다 벗겨 먹었는데 벽난로라고 멀쩡할 리가.
‘쯔쯧. 불쌍한 것들. 깨우지 말고 훈련이나 하러 가야지.’
아직 훈련이 시작되려면 1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방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보다는 나가서 몸이라도 푸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용히 움직여 나갈 준비를 마쳤다.
외투를 입고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방 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누워 있던 자리 주위를 둥글게 감싸듯 널브러져 있는 후손들.
그들의 위를 은은하게 덮은 벽난로의 주황 불빛.
불규칙적으로 타닥거리는 불꽃의 소리 같은 것들. 건조한 겨울의 냄새까지.
벽난로의 불이 꺼지기 직전이라 공기는 조금 차가웠다. 그런데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게 느껴졌다.
멍하니 그 풍경을 눈에 담다가 몸을 돌리려는데 오틸리에의 옷차림이 눈에 밟혔다.
그녀는 얇은 잠옷 차림이었다. 심지어 실내화조차 신고 있지 않았다.
룩소르도 비슷한 꼴이었다.
두 사람의 발과 손은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하인들이 움직일 시간이니까 신경 쓰지 말자.’
다시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그대로 나가려는데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벽난로로 다가갔다.
옆에 있는 궤를 열어 장작 몇 개를 벽난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불씨는 장작을 잡아먹고 금세 자라났다. 방 안에도 점점 훈기가 돌았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여전히 오틸리에와 룩소르의 발은 차가워 보였다.
담요가 보이지 않아 놀고 있는 베개를 두 사람의 발등 위에 하나씩 올려 주었다.
‘모양새가 좀 웃기긴 하지만 발이 시린 것보다는 낫겠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왔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연무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찬 바람만 부는 넓은 연무장에 덩그러니 서 있으려니 좀 민망했다.
괜히 몸을 푸는 척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고 팔다리를 늘려 보았다.
열이 많이 나서 관절이 삐그덕거릴 줄 알았는데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체온도 정상이고 두통도 없었다. 근육통도 씻은 듯이 사라진 채였다.
‘성수로 목욕이라도 한 기분…….’
오싹한 느낌에 생각을 멈췄다.
그래. 이건 진짜 딱 성수로 목욕을 하고 푹 잤을 때의 느낌과 똑같았다.
설마 내가 잠든 사이에 그 에리오인가 하는 놈이 다녀간 건가?
아니야. 방 안에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들어오진 않았겠지.
그리고 신성력을 써서 나를 회복시켜 줄 이유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아르체에게 축복을 받은 것 같은 효과를 내진 못할 것이다.
그는 성자니까. 세상에 그런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프고 나니까 별생각이 다 드네.’
나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 냈다.
몸을 마저 푸는데 건물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공주님?”
나를 발견한 그가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놀라며 물었다.
탐탁지 않은 반응에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었다.
“왜 이렇게 늦어?”
“……아직 훈련 시간 20분 전입니다.”
“나보다 늦었으면 늦은 거야.”
“그게 무슨 어린애 같은…….”
삐딱하게 쳐다보자 그가 말을 멈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애셨죠.”
아니다, 이놈아.
“그것보다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걸 부단장이 어떻게 알아?”
“새벽에 난리가 나서 알았습니다.”
“난리? 무슨 난리?”
“공주님이 고열에 시달리시지 않으셨습니까. 전하께서 공주님이 또 독을 드신 줄 알고 궁전을 전부 뒤지라고 명령하셨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제가 당직이었습니다.”
얘는 게텔린 때도 그러더니 무슨 일이 날 때마다 당직이네.
“원래 사고를 몰고 다니는 편이야?”
그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에게 물으신 겁니까?”
“여기 부단장 말고 또 누가 있다고.”
“제게 왜 그런……. 아니, 제가 공주님께 묻고 싶은 말입니다. 공주님 때문에 근래에 궁전이 아주 소란스럽습니다. 원래 사고를 몰고 다니셨습니까?”
“나는 그런 편이지.”
당당한 내 대답에 부단장은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나는 대화를 이어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를 내버려 둔 채 혼자 생각에 빠졌다.
‘그래서 그 방에 다 모여 있었던 거구나.’
추워서가 아니라 내가 아파서. 뭉글한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젓고 생각을 돌렸다.
‘그것보다, 의외네. 룩소르.’
또 질질 짜고 있을 줄 알았는데 궁전을 조사하라고 하다니. 물론 헛다리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기특하다.
‘어쩐지 벽난로에 장작을 넣어 주고 싶더라.’
황제다운 직감이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기사들이 웅성거리면서 연무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시끄럽게 몰려다니는 게 꼭 벌떼 같았다.
물론 속도는 벌떼에 한참 못 미쳤다. 긴장감이라고는 꿀벌 더듬이만큼도 없는 모습을 뚱하게 지켜보는데 무리를 이탈한 미론, 타솔라, 지시스가 내게 달려왔다.
“공주님! 괜,”
“응.”
“아픈 건 나,”
“응.”
귀찮은 질문을 칼처럼 차단하고 지시스를 봤다. 그가 어물쩍어물쩍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제 줄을 서려는데 다른 기사들이 몰려왔다.
며칠간 같이 뛰었다고 동료애 같은 거라도 생겼는지 이놈 저놈이 말을 걸어 왔다.
괜찮냐느니 어쩌느니 하는 질문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휴, 정신없어! 주변을 정리해야 하는데, 부단장은 훈련하자는 말도 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훈련 안 해?”
뾰족한 말투에도 다들 아랑곳 안 했다.
“이렇게 얇게 입고 나오시니까 감기에 걸리시죠.”
“아직도 열나시는 건 아니죠?”
“공주님. 아플 때 뛰면 더 아야해요.”
“아야라니. 그래도 공주님께 말투가 그게 뭐냐?”
“아야하십니다.”
“그렇지.”
그렇지는 무슨. 극존대를 안 쓴 게 문제가 아니거든?
잠깐, 방금 머리 쓰다듬은 놈 누구야. 감히 황제의 고귀한 정수리를……!
정수리에 손댄 놈을 찾기 위해 쌍심지를 켜고 고개를 홱 돌렸지만 손들이 너무 많았다. 슬슬 열이 뻗치려고 하는데 가만히 놀고만 있던 부단장이 그제야 끼어들었다.
“그만!”
확실히 상관이 큰소리를 내니 기사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불퉁한 얼굴로 머리를 정리하는데 타솔라가 내 옆에 서며 나지막이 말했다.
“공주님. 내기도 내기지만 건강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은 들어가서 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나약한 줄 알아?”
나약했다.
체조하는 도중에는 그냥 몸을 움직여서 더운 건 줄 알았는데 뛰고 나니 열이 오른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히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손을 내저어 다가오는 타솔라를 떨어트려 놨다.
“됐어. 너는 다른 훈련도 받고 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겨우 방으로 들어왔다.
후손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공기도 여전히 따뜻했다.
차가운 건 내 몸뿐이라 벽난로 앞에서 불을 좀 쬔 뒤,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내가 누워 있었던 자리를 보았다.
포넨트는 전생에 돌멩이기라도 했던 건지 어느새 플로레타의 옆까지 굴러가 있었다.
나는 플로레타를 넘고 포넨트를 건너 겨우겨우 아무도 깨우지 않은 채 침대 가운데로 들어갔다.
‘머리 아파.’
숨을 내쉴 때마다 입 안이 홧홧한 기분이었다.
조금 더 자야겠다고 마음먹고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흐억!”
포넨트가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훈련 못 가게 막아야 하는데!”
쯧쯧. 참 빨리도 일어난다.
무시하고 자려는데 여기저기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로레타 일어나 봐.”
“으응.”
발치에서 꾸물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다시 잠잠해지는 게, 아무래도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키네시아가 포넨트에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깨우지 말고 더 자게 두자. 리아 아직 침대에 있잖아.”
“어? 그러네.”
이번에는 오틸리에 쪽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녀는 애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동시에 가느다란 손이 내 이마 위로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아직 열이 있네.”
오틸리에가 내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리아. 일어나 보렴. 약 먹어야지?”
귀찮은데…….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오틸리에가 보였다. 그 옆에 포넨트와 키네시아도 붙어 있었다.
등 뒤에서 잠에서 덜 깬 듯한 룩소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빈속이니 일단 아침부터 먹입시다.”
그가 시종장을 불러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
하녀가 김이 올라오는 수프와 부드러운 빵을 가져오자마자 룩소르가 숟가락을 들었다.
“자, 우리 공주. 아- 하렴.”
“됐어. 내가 먹을게.”
“어허! 아빠가 먹여 준대도. 자, 어서 아-”
“아니면 리아. 엄마가 먹여 줄까?”
룩소르와 오틸리에를 번갈아 보던 포넨트와 키네시아가 말을 얹었다.
“나는 안 먹여 줄 거야.”
“제가 할게요.”
똑같이 생긴 것들이 정반대의 말을 내뱉었다.
숟가락은 여전히 룩소르가 들고 있었다.
받아먹는 건 진짜 환자가 된 것 같아서 싫지만 내쫓긴 귀찮을뿐더러 성질낼 힘도 없었다.
그냥 알아서 하라는 마음으로 입을 벌렸다. 그러자 룩소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는 신이 난 사람처럼 수프를 떠먹여 주었다. 그러고 나면 오틸리에가 잘게 찢은 빵을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나는 빵을 우물우물 씹어 삼키며 생각했다.
‘효도 받는 기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