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으윽…….”
이라네리아를 간호하다 잠깐 잠이 들었던 키네시아는 앓는 소리에 깨어났다.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한 그녀는 재빨리 이라네의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아!”
데일 듯이 뜨거운 체온에 놀라며 손을 떼어 냈다. 잠깐 내렸던 열이 신경 쓰지 못한 사이에 무섭게 올라 있었다.
키네시아는 물수건을 대야에 담갔다. 차가워진 물수건을 꼭 짜서 다시 이라네리아의 이마에 올려 줘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건 물수건으로 잡힐 열이 아니야.’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빈 복도를 달려 국왕 부부의 침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둘 다 깊게 잠들었는지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키네시아는 몇 번 더 문을 두드리다가 더는 기다릴 수 없어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막 깨어난 룩소르가 몸을 일으키며 눈을 깜빡였다.
“키네시아? 이 시간에 웬일이냐?”
작은 소란에 오틸리에가 옆에서 뒤척였다.
“아버지. 리아가 아파요. 열도 많이 나고 계속 끙끙 앓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뭐?”
룩소르가 곧장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 소리에 오틸리에도 잠에서 깨어났다.
키네시아의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은 실내화를 신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곧장 이라네리아에게 달려갔다.
방에 제일 먼저 도착한 오틸리에가 이마에 흠뻑 젖은 이라네리아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다급하게 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리아. 괜찮니?”
하지만 이라네리아는 대답이 없었다. 오틸리에가 안으려고 하자 이라네리아의 목이 뒤로 툭 넘어갔다.
그 모습에 놀란 룩소르가 방을 뛰쳐나가 곧장 궁정의의 방으로 향했다. 국왕 전하의 방문에 몸 둘 바 몰라 하던 궁정의는 공주의 소식을 듣자마자 진찰 가방을 꾸렸다.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에 시종장도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복도로 나왔다가 룩소르와 궁정의를 발견하고 그 뒤를 따라갔다. 거친 발소리가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자 다른 사람들도 잠에서 깨어났다.
대부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잠에 들었지만 플로레타는 달랐다.
겁이 많은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다가 키네시아의 방으로 갔다.
하지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놀란 그녀가 포넨트의 방으로 뛰어가 제 오빠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포넨트! 일어나 봐.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키네샤가 없어.”
그 말을 들은 포넨트가 주섬주섬 일어나 플로레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키네시아의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라네리아의 방이었다.
포넨트는 한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또 무슨 일이야.”
“모르겠어……. 가 볼까?”
방에 도착하자 열린 문틈으로 이라네리아를 진찰하는 의사가 보였다.
“열이 많이 나는군요.”
“그건 우리도 아네.”
“감기 증상이 있었습니까?”
오틸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감기 기운은 없었네만 요즘 걸어 다닐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곤 했네.”
“지금은 열 말고는 별다른 증상이 없으셔서……. 일단 해열제를 드리겠습니다.”
궁정의가 진료 가방을 뒤지는 사이 플로레타와 포넨트가 안으로 들어왔다.
인기척에 돌아본 오틸리에가 두 사람에게 팔을 벌렸다.
플로레타는 제 어머니에게 가서 안기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라네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혹시 또 독을 먹은 게 아닐까요?”
독이라는 단어에 룩소르가 창백하게 질려 고개를 홱 돌렸다. 오틸리에 역시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가. 그게 무슨 말이니?”
“저……. 얼마 전에 책에서 봤는데, 먹으면 별다른 증상 없이 열만 나다가 죽는 풀이 있다고…….”
“궁정의! 로라의 말이 사실인가?”
“그런 독이 있긴 하온데 그게,”
“시종장! 기사들을 불러, 아니. 내가 가겠소.”
궁정의의 말을 뚝 끊은 룩소르가 그대로 방을 나갔다.
말리거나 붙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룩소르의 머릿속에는 이라네리아가 깨어나 위험을 자처하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상주해 있는 기사들을 전부 불러들였다.
“지금 당장 궁전을 샅샅이 뒤져 수상한 약물이나 약초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기사들이 제각각 흩어졌다.
하지만 룩소르는 홀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사랑하는 막내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아찔해져, 룩소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로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전하!”
궁정의가 그의 앞까지 달려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왜 그러는가. 혹시 우리 리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게 아니, 허억, 아니옵고, 그런 독이 있긴, 후우……. 있긴 하오나 공주님의 증상과는 다르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그럼 리아가 독을 먹은 게 아니란 뜻인가?”
“단순한 열병일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해열제를 드리고 왔으니 아마 곧 열이 내릴 겁니다.”
룩소르는 그 말을 듣자 숨통이 트였다.
그가 휘청거리며 떨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시종장이 룩소르를 부축하며 물었다.
“전하. 그럼 기사들을 불러…….”
“아니. 그냥 두게.”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창문을 바라보며 룩소르는 자꾸만 무너지려는 다리에 힘을 줬다.
스스로 왕이 되라는 막내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앞으로 다가올 위험에서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참에 불법적인 약물을 소지한 자들을 모두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신, 그 누구도 독살 위협을 당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나는 리아에게 가 볼 테니 시종장은 적발된 사람들을 일단 감옥에 가둬 두고, 약은 수거해 궁정의에게 무슨 약인지 감별해 달라고 해 주게.”
“예, 전하.”
룩소르는 방으로 돌아왔다.
오틸리에는 대야에 한 손을 담근 채 졸고 있었다.
키네시아는 상체만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플로레타와 포넨트는 이라네리아의 양옆에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었다.
평화로운 모습에 룩소르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키네시아를 안아 들어 소파에 눕혀 두고 오틸리에의 손을 대야 안에서 빼내어 주었다.
그리고 이라네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려 보았다.
조금 따끈하긴 하지만 기겁할 정도로 뜨겁진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이라네리아가 눈꺼풀을 움찔거렸다. 몽롱한 눈을 가느다랗게 뜬 아이가 룩소르에게 손을 뻗었다.
“아버지……?”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본 호칭인지. 룩소르는 감격하며 이라네리아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그래, 아가. 아빠다.”
아이의 입술이 달싹였다.
“……마세요.”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이라네리아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리아. 뭐라고 했느냐? 잘 안 들리는구나.”
“……저 죽이지 마세요.”
희미하게 떠져 있던 눈꺼풀이 꾹 감겼다.
룩소르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이지 말아 달라니…….’
그는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제 딸이 한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졸음이 쏟아져 몸을 웅크릴 때까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
공기가 쌀쌀한 게 느껴졌다.
키네시아에게 한 말 때문인지, 아버지가 아픈 나를 죽이기 위해 친히 찾아오시는 꿈을 꿨다.
아버지가 내지른 칼에 맞아 죽어 가며 죽이지 말라고 애원하는, 거지 같은 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숨을 쉬기가 조금 버거웠다.
몸도 엄청 무겁다. 뒤척이려고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밤새 열이 나서 그런가?’
악몽 좀 꿨다고 해서 이렇게 꼼짝도 못 하지는 않을 텐데? 뭔가에 짓눌린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면 두꺼운 밧줄에 묶여 있거나.
이게 무슨 일이지? 납치? 습격? 몸이 포박된 건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다행히 제일 먼저 보인 건 내 방 천장이었다. 이상한 곳에 끌려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이 묵직한 건 뭐야.’
고개를 숙이자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포넨트가 보였다.
그의 다리가 내 배 위에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한 짝도 아니고 두 짝이나.
어쩐지 숨이 턱 막히더라.
낑낑거리며 포넨트의 다리를 치우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마에 올려져 있던 하얀 천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협탁에는 키네시아가 가져왔던 대야가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건 키네시아가 아니었다.
‘오틸리에잖아?’
얘는 왜 또 여기 있는 거야.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서 내려가기 위해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곳엔 오틸리에와 같은 자세로 룩소르가 엎드려 있었다.
양옆이 막혔으니 나갈 수 있는 건 아래뿐이었다. 엉금엉금 후진해 조용히 아래로 향하는데 발치에 뭐가 또 툭 걸렸다.
‘여기도 뭐가 있어?’
플로레타가 강아지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침대 모퉁이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 너머로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은 키네시아가 보였다.
왜 다 여기 모여 있는 거야? 다른 방 벽난로들이 죄 고장이라도 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