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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55화 (55/151)

<55화>

조심스럽게 베개 밑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다 커서 질질 짤 만한 놈들을 추려 봤다.

한 사람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룩소르인가?’

생각하기가 무섭게 오틸리에가 소곤거렸다.

“룩소르. 그만 울어요. 그러다 리아 깨겠어요.”

다리에 화한 느낌이 났다. 룩소르가 근육통에 좋은 연고를 발라 주며 내 다리를 조심스럽게 주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아까 느꼈던 시원함도 플로레타의 손길이 아니라 연고였었나?’

잠결이라 잘 생각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키네시아가 주무르는데 갑자기 시원한 느낌이 들 리 없으니까.

눈을 감은 채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데 룩소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속이 상해 그렇소. 내가, 내가 너무 못난 탓에 아이들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구려.”

룩소르가 대답하자마자 흐느끼는 소리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오틸리에마저 울음이 터진 모양이었다.

양쪽 귀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자 흉가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짜증이 나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묘했다.

‘내가 아플 때 울어 준 가족이 있었나?’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 주셨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차갑고 매정하던 아버지. 앓는 딸에게 암살자를 보냈던 아버지. 다리를 주무르기는커녕 끊어내려 했던 아버지.

친아버지조차 하지 않았던 일을 룩소르가 울며 하고 있었다.

손에 쥔 칼자루가 무색해졌다.

나는 손끝으로 단검을 밀어내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고 깊게 숨을 고르는데 다리와 팔을 주무르던 네 개의 손이 떨어졌다.

“룩소르. 이제 우리도 자러 가요.”

오틸리에의 물기 어린 목소리를 끝으로 두 사람은 방을 나갔다.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다리는 여전히 끈적이고 말랑거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나 주물러 댄거야.”

괜히 툴툴거리며 가만히 침대에 기대어 앉아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키네시아가 들어오려다 말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 자고 있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키네시아가 내 옆에 앉아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연고로 반짝거리는 다리를 보며 그녀가 물었다.

“좀 괜찮고?”

“그 소리 지겨워. 하루에 10번도 더 듣는 것 같아.”

“네가 무리하니까 그렇지.”

키네시아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 시선이 민망했는지 그녀는 제 볼을 쓸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왜 그렇게 봐?”

“내 아들을 닮아서.”

키네시아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녀의 표정을 보자 좀 민망해졌다.

한 핏줄이니까 당연히 닮았겠지. 몸이 힘드니까 별소리가 다 나오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미안. 그런 이야기 할 줄 몰라서 놀랐어. 그러지 말고 더 말해 줘. 아들이면 율시안 황제 말하는 거 맞지?”

그래. 내가 오직 후계자로만 대했던 아이. 언젠가 내 적이 될 거라고 여겼던, 내 배로 낳아 내 손으로 기른, 내 걸작.

분명 죽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어쩐지 율시안을 닮은 키네시아를 마주 보는 게 힘들었다.

괜히 발끝을 내려다 보며 입을 다물었다.

눈앞이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맞아. 율시안. 너를 보면 내 아들이, 룩소르를 보면 내 아버지가 떠올라.”

“우린 한 핏줄이니까.”

언젠가 내가 룩소르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키네시아가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덧씌워져 있던 율시안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율시안이 제대로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면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왜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속이 쓰릴까.

나약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몸이 휘청거리는 게 느껴졌다.

키네시아가 내 어깨를 잡아 주었다가 놀란 눈으로 이마에 손을 대었다.

“리아. 너 열 나. 궁정의 데려올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키네시아를 붙잡았다.

“필요 없어. 너도 그냥 방으로 돌아가. 귀찮게 하지 말고.”

그녀를 놓아주며 침대에 누웠다. 키네시아가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감으려는데 다시 문이 열렸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단검을 손에 쥐며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방으로 들어온 건 자객이 아니라 키네시아였다.

그녀는 팔에 수건을 걸치고 물이 가득 담긴 대야를 들고 있었다.

“가라니까?”

키네시아는 내 말을 무시하고 협탁에 대야를 내려놓은 뒤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손을 야무지게 움직여 물에 적신 수건을 비틀어 물기를 빼냈다.

곧 곱게 접은 수건이 내 이마 위로 올라왔다.

“내가 아프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항상 이렇게 해 주셨어.”

그 말을 듣자 속이 뒤틀렸다.

“룩소르는 멍청해.”

“뭐?”

“바보 같고, 우유부단하고, 착하기만 해서 손해를 보잖아.”

“…….”

“그래도 좋은 아버지야. 그래서 좋은 왕은 되지 못하겠지만.”

“……둘 다 잘하실 수도 있잖아.”

눈을 감고 있어서 키네시아의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에서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여실히 느껴졌다.

“위대한 황제인 나도 못 한 걸 룩소르가 어떻게 해?”

“……네 아버지는 어땠는데?”

“군주는 속 이야기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야. 약점이 되니까.”

“지금은 황제가 아니잖아.”

그 말 한마디에 숨이 탁 트였다.

몸에 칭칭 감겨 나를 짓누르고 있던 두꺼운 사슬에서 해방된 것 같은, 죽어서도 끊어내지 못했던 족쇄를 드디어 끊어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

나는 죽었고 내 영광은 아주 먼 과거의 것이 되어 있었다.

내 책임과 의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네.”

“그래서 네 아버지는 어떠셨는데? 우리 아버지를 보면 생각난다고 했으니까, 다정한 분이셨어?”

다정이라니.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선왕께서는 나를 예뻐하셨던 것도 같아. 서로 의견이 갈리기 전까진 말이야.”

“그럼 성인이 되고 사이가 멀어진 거야?”

“아니. 그 전부터. 내가 왕세자가 되고 난 뒤에. 그때부터 서로 의견이 갈렸어. 선왕 폐하는 안정적인 왕권에 안주하려 하셨고 나는 나라를 더 크게 키우고 싶어 했지.”

“그게 몇 살 때였는데?”

“잘 기억나진 않지만 플로레타 나이 때쯤이었나?”

“13살?”

“응. 그즈음에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어. 아버지 명령으로 사냥 대회를 나갔는데, 누군가의 실수인지 의도된 공격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화살에 맞아 다리를 다쳤었거든.”

나는 내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열이 많이 나고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는데…….”

키네시아는 말 없이 수건을 다시 적시고 꼭 짠 뒤 내 이마에 얹어 주었다.

시원한 기운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정성 어린 간호가 그날 밤과 너무 대비되어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밤에 손님이 찾아왔지.”

“네 아버지가 오신 거야?”

“비슷해. 아버지가 보낸 암살자였으니까.”

숨소리가 뚝 멎은 게 느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키네시아를 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어떻게 딸에게……. 기록에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업적을 봐도 성군이라고만…….”

“강하고, 현명하고, 뛰어난 왕이셨지. 아버지를 보면서 나도 그런 왕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

“아버지를 원망했었어.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별다를 것 없는 어머니였던 것 같아.”

율시안이 아플때에도 일이 우선이었다.

일과가 끝나고 새벽에라도 시간을 내 율시안을 찾아가긴 했지만, 그 시간에 아이는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가도 더 강한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언젠가 나와 사이가 틀어져도 내게 지지 않도록. 나를 짓누르고 황좌를 차지할 수 있을 만큼 강하게, 그렇게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내 다리를 주무르며 우는 오틸리에와 룩소르를 보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죄책감에 가슴이 답답했다.

“신기해. 어떻게 나와 아버지의 피를 잇고도 룩소르 같은 애가 나왔을까?”

“아마 궁전에서 크지 않았다면 너도 비슷했을 거야.”

“그래. 환경이 문제였지. 눈짓 하나만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그 숨 막히는 분위기가.”

열에 들뜬 정신이 다시 고요히 가라앉는다.

“하지만 힘이란 원래 원하면 원할수록 위험해지기 마련이야. 남의 목숨을 취하려면 내 목숨을 내놓을 각오 정도는 해야 하니까.”

“…….”

“그런데도 키네시아 넌 아직도 힘을 원하니?”

흐려지는 목소리와 함께 눈꺼풀을 들고 있을 힘마저 빠져나갔다.

키네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건에 체온이 물들어 미적지근해졌다.

키네시아는 내 수건을 갈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떠나지도 않았다. 옆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게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기다려 주고 싶었지만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다. 반쯤 잠이 들었을 때, 키네시아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기며 스쳐 지나갔다.

“하지……, 이미 돌……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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