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다행히 나 혼자만 당장 졸도할 것처럼 힘들어하는 건 아니었다.
300명 중 괜찮아 보이는 건 대략 50명밖에 되지 않았다.
체력이 괜찮은 놈들은 앞서가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머지 놈들이 대형을 맞춰 뛰었다.
몇몇 기사들이 대형에서 뒤처져 내 근처에서 뛰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 멈췄다가도 10살인 나보다 먼저 포기한다는 걸 용납할 수 없는지 이를 악물고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앞선 무리가 걸음을 멈췄다.
“일동 정지!”
그 말에 내 근처에서 뛰고 있던 기사들이 걸음을 멈춰 연무장을 가로질러 가려고 했다.
흐린 눈으로 그들을 한 번 쳐다보고 나는 제대로 된 경로로 뛰었다.
뒤와 옆에서 이런저런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대로 나를 따라 뛰어오는 게 느껴졌다.
먼저 도착한 기사들은 이리저리 흩어져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놈들 대형 맞춰 서 있는 훈련부터 시켜야겠다.’
그리고 도착한 순간, 정신을 잃었다.
***
“공주님!”
“야, 뭐 해! 빨리 부축해!”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정신 좀 차려 보십시오!”
먼저 도착해 있던 기사들이 이라네리아의 몸을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아이의 몸이 훨씬 작고 가벼운 탓에 그들은 놀라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기사들이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부기사단장과 타솔라, 지시스, 미론이 뛰어왔다.
부단장이 이라네리아를 똑바로 눕히며 소리쳤다.
“뭘 멀뚱히 보고만 있어! 물이라도 가져와!”
타솔라는 이라네리아의 조끼 단추를 풀었다.
그녀가 이라네리아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하자 지시스와 미론도 손을 거들었다.
다들 숨을 헐떡이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쓰러진 공주를 쳐다봤다.
이라네리아의 옆에서 오기로 달리던 기사가 숨을 헐떡이며 타솔라에게 물었다.
“괜찮으셔?”
타솔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라네리아를 안아 든 채 부기사단장에게 말했다.
“궁정의에게 모셔다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러도록.”
궁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타솔라를 보며 웅성거림이 커졌다.
“공주님 잘못되면 우리 다 사형 아니야?”
“내기를 한 건 단장님인데 왜 우리가 사형을 당해.”
“같이 뛴 건 우리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자업자득이지.”
“맞아. 훈련을 만만하게 보니까 저렇게 된 거 아니야.”
처음에는 조그만 몸으로 어른들이 하는 걸 열심히 따라 하는 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막상 뛰기 시작하면 제대로 따라오지도 못할 몸이었다. 어린애들이 응당 그렇듯 중간에 그만두거나 울음을 터트리고 말겠지.
그 누구도 이라네리아가 완주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타솔라나 지시스, 미론 역시도 이라네리아가 완주하는 건 무리라고 여겼으니 말이다.
그들도 이라네리아가 노력하는 모습만 보여 주고 관둘 줄 알았다.
하지만 이라네리아 공주는 어지간한 종자들보다 훨씬 잘 따라왔다.
체력이 좋거나 요령이 있는 건 아니었다.
“너 공주님 눈에 독기 봤냐?”
“어. 자기보다 뒤처지면 쳐다보는데 오줌 지리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무슨 열 살짜리가…….”
“그래도 쓰러졌으니까 내일은 안 나오시겠지?”
“당연히 안 나오겠지! 나는 진작 저렇게 될 줄 알았다.”
대부분 이번 일을 어린아이의 객기 정도로 생각했다.
내일 아침쯤 궁전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거나, 훈련에 나타나지 않거나, 기사단장에게 항복을 선언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다음 날, 이라네리아는 어제보다 더 흉흉한 눈빛으로 연무장에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녀는 빠지지 않았다.
도착 지점을 찍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중간에 멈춰 서지 않았다.
이쯤 되니 기사들은 이라네리아가 대단하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우리 단체로 단장님께 찾아가서 내기에 포기하라고 건의하자.”
“그럼 우리 훈련해야 하잖아!”
“아니, 막말로 기사가 훈련하는 게 뭐 잘 못 된 거야?”
분쟁이 일어나고 언성이 높아졌다.
타솔라와 지시스, 미론은 소란스러운 기사단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훈련하면서도 그들은 기사단 자체의 분위기가 절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궁전을 나가 용병이 되거나 귀족가의 사병이 된 선배의 말을 들어보면 궁전 기사들은 언제나 나태하고 오만했다.
그 선배, 그 선배의 선배들도 같은 것을 보고 회의감을 느껴 은퇴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성실하고 실력 있는 자들은 충성심을 잃고 기사단을 떠났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다 보니 왕실 기사단은 귀족 자제들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무도회에 모인 것처럼 서로 낄낄거리다가 헤어지는, 딱 그 정도의 장소였다.
그런데 그런 기사단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그것도 단 4일 만에.’
훈련이 끝난 지 한참 지났음에도 연무장에는 평소보다 훨씬 사람이 많았다.
타솔라는 그 광경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더러는 10살에게 지기 싫다는 자존심 때문에, 누구는 열심히 하는 공주를 보고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껴져서, 누군가는 공주가 귀엽다는 이유로 훈련에 참여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라네리아 공주의 호통과 눈빛 덕에 잊고 살던 기사도를 떠올리기도 했다.
고여서 썩어 가고 있던 웅덩이에 비로소 새로운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단은 유례없는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도 급속도로.
“공주님은 확실히 사람들을 다룰 줄 아시네.”
미론이 타솔라 옆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지시스도 그 말에 공감했다.
“타고난 지배자야.”
한 달이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귀족들도, 궁전의 분위기도, 기사단도 변했다.
이라네리아 공주는 사람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심리를 꿰뚫어 보고, 상황과 사람들을 공주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이끌고, 결국엔 그녀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누군가에겐 자비로, 누군가에게 공포로, 또 누군가에겐 회유나 내기로.
생각해 보면 지금 궁전 안은 모두 이라네리아 공주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새삼 깨닫고 나자 타솔라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불쾌한 감정은 아니었다. 마치 찾아 헤매던 운명에 드디어 발을 들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단정 지었다.
만약 새로운 왕이 필요하다면, 그건 반드시 이라네리아 공주가 되어야 한다고.
***
“리아, 괜찮아……?”
침대에 엎드려 있는 나에게 플로레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주물러 주기라도 하려는 듯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플로레타.”
“응?”
“만지면 죽일 거야.”
내 말에 플로레타가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가 금세 울상을 지었다.
“궁정의가 그대로 두면 아플 거라고 풀어 주라고 했는걸?”
옳은 말이다. 뭉친 근육은 그냥 두면 오래 간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제 포넨트가 근육을 풀어 주겠다고 내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가 죽을 뻔했다.
물론 내가 아니라 포넨트가. 나한테 맞아서.
힘이 없어 제대로 때리지도 못했지만 성질부리다가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 오전 내내 누워 있어야 했다.
상황이 이런데 근육이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모르는 플로레타에게 내 다리를 맡길 순 없었다.
“죽일 거야.”
“그치만…….”
“만지면 죽일 거야.”
“으. 으응.”
플로레타가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책장으로 가서 품에 책 한 권을 안고 돌아왔다.
“그럼 리아, 내가 책 읽어 줄까?”
“아니.”
“으응…….”
옆에 자리를 잡은 플로레타가 혼자 조용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틈이 날 때마다 룩소르와 오틸리에가 찾아왔다.
룩소르의 일을 거들기 시작한 키네시아도 바쁜 와중에 꼭 얼굴을 비췄다.
포넨트도 가정 교사에게 수업을 듣지 않는 시간에는 내 방에 죽을 치고 앉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 몸의 주인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최대한 빨리 돌려줘야겠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나약한 소리 하지 말자. 자신을 달래며 눈을 감았다.
두들겨 맞은 듯이 온몸이 욱신거리는 와중에도 다 달은 체력 덕분에 잠이 오긴 했다.
“리아, 자?”
잠결에 플로레타의 목소리가 들려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만지면……, 죽어…….”
“안 아프게…… 조심…….”
플로레타의 대답이 드문드문 끊기며 흐려졌다.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다리에서 손길이 느껴졌다. 분명 만지면 죽인다고 했는데 플로레타가 기어이 내 다리에 손을 댄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의 주무른다기보다는 더듬는 것에 가까웠다.
만지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너무 졸린 나머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플로레타의 손길이 시원했다. 꼭 신성력이 깃든 연고를 바른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연고……. 로그리예 주지 말걸.’
그러면 이렇게 고생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물 밑으로 쑥 끌려가듯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리 쪽에서는 여전히 손길이 느껴졌다.
플로레타가 아직도 내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건가 싶어 뒤척이려는데,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