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하!”
기사단장이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이라네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기사들과 함께 달릴게. 내가 일주일간 포기하지 않으면 앞으로 쭉 내가 짜 준 대로 훈련하는 거야.”
자신만만한 표정이 기사단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뛰는 것은커녕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아 춤조차 춰 본 적 없을 것 같은 공주가 저런 말을 하다니.
도대체 기사들의 훈련을 얼마나 만만히 봤길래 저런 제안을 한단 말인가. 그는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저녁 한 번으로 하시죠. 아마 그렇게 해도 아마 3일 이상 버티긴 어려우실 겁니다.”
알아서 조건을 줄여 준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기에 이라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공주님이 지면 기사단에 그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불쑥 찾아오시지도 마시고, 공주님 글씨로 쓴 명령서에 국왕 전하의 서명만 받아 와서는 제 기사단을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또 있어?”
“흐. 흠! 공주님이 데려간 세 사람도 다시 데려오겠습니다.”
벼르고 있었다는 듯 줄줄 쏟아지는 조건에 이라네리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인데,
“……쌓인 게 많았구나?”
기사단장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고 말을 돌렸다.
“그래서, 하실 겁니까?”
“해야지.”
“그럼 내일부터 시작하시죠.”
이라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뒤를 따라 포넨트와 키네시아가 나가고 타솔라와 지시스가 기사단장에게 짧게 인사하고 그들을 따라갔다.
기사단장은 갑자기 휑하니 빈 집무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손해 볼 것 없는 일인데 괜히 어딘가 찝찝하고 말려든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야. 그러다 지면 어쩌려고 그래?”
나오자마자 포넨트가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물었다.
“안 져.”
“무슨 자신감이야……. 아무리 안 져도 그렇지. 그걸 진짜 하겠다고? 일주일간? 너 그러다 죽어.”
“죽으면 자동,”
성불이라고 말하려다가 이글거리다 못해 절절 끓고 있는 키네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느리게 내 몸을 훑었다.
마치 그 몸은 네 것이 아니니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물론 전혀 찔릴 것 없었다.
몸 주인에게도 잘된 일이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체력과 근육을 가지게 되는 건데 이득이지.
동생을 튼튼하게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절을 받아도 모자랄 판인데 노려보다니.
배은망덕하기는.
뻔뻔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키네시아가 골이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기사들 기강을 잡으려는 거지? 그냥 아버지께 말하는 게 어때? 그러면 쉽잖아.”
“맞네. 명령 한 번이면 끝날 일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냐?”
생각 좀 한다고 칭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혀를 쯧쯧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명령이야 쉽지. 근데 따르는 놈이 곱게 따를까?”
“왕명인데 안 따르면 뭘 어쩔 거야.”
“아니꼽게 여길 거 아니야. 기사 단장의 태도를 좀 봐. 기사단을 완전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왕이든 뭐든 손대면 앙심 품게 생겼어. 그런 놈이 번쩍이들하고 손잡으면 전하의 권위가 위협받는다고.”
“아빠를 위해서 그런 거라고?”
포넨트가 감동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어유, 우리 리아 다 컸네! 아빠 평판도 생각할 줄 알고.”
“에피파네스를 위한 거야.”
“우쭈쭈. 그랬어?”
아니 근데 이놈이 진짜. 감히 선조를 쓰다듬어? 버르장머리 없게!
딱밤을 놔 주려다가 나를 기특하다는 듯 보는 눈빛에 소름이 돋는 바람에 실패했다.
팔뚝을 문지르며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키네시아 역시 나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를 위해서…….”
“아니라고.”
“고마워.”
“아니라니까?”
아니, 이것들은 왜 사람 말을 안 들어?
힘들게 게텔린을 치워 뒀는데 번쩍이들이 또 기세등등해지는 게 보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그러려면 룩소르의 힘이 약해져선 안 되고, 군권도 강력해져야 하니까!
가슴을 내리치는데도 징그러운 눈빛들이 따라붙었다.
단체로 약을 먹었나. 팔을 쓸어내리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포넨트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봤을 때 또 그런, 장성한 딸을 보는 눈을 하고 있으면 한 대 때려 주려고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표정이 멀쩡했다.
“그런데 내기 때문에 훈련이 힘들어지면 너를 원망하지 않을까?”
포넨트의 순진한 말에 픽 웃었다.
사실 나는 원망을 받든 말든 큰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네가 보기엔 내가 이길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하면 때릴 거야?”
“아니.”
“너 100m 전력 질주도 1분 걸릴 것 같이 생겼어. 비실비실해 보여.”
괜히 안 때린다 그랬네. 지금이라도 때릴까?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고 포넨트의 이마를 노려보는데 그가 슬그머니 제 이마를 가리며 말을 이었다.
“한 번은 어떻게 악으로 깡으로 버텨도 일주일은 힘들 것 같은데.”
“그런 애가 해내면?”
“대단하겠지.”
“그럼 나를 봤을 때, 짜증과 감탄 중에 어떤 감정을 더 크게 느낄까?”
“글쎄. 아마, 감탄?”
옆에서 듣고 있던 키네시아가 말을 거들었다.
“같이 훈련받겠다고 한 이유가 있구나.”
나는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럼. 나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해.”
사람은 본디 무언가를 해내는 걸 곁에서 지켜보면 친밀감을 느끼거나 감정이입을 하기 마련이다.
내가 10살짜리처럼 보이는 걸 감안했을 때, 내기에서 진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 보인다면 부정적인 평가를 받진 않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놈들도 있겠지만 그건 상관없다.
‘어차피 집단을 움직이는 건 다수니까.’
반면에 기사단장은 훈련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기사들의 분노를 살 것이다.
기사단장은 훈련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내기에서 지든 이기든 자신을 위해 기사단을 고생시킨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다지 충성도가 높은 집단처럼 보이지도 않으니 단장과 기사들 사이의 사이를 벌려 놓고 침투하면, 기사단을 장악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내 말을 따르게 한 뒤에 마구 굴려야지.’
기사단 건물을 나오고 보니 텅 빈 연무장이 보였다.
훈련을 빙자한 농땡이를 끝내고 생활관으로 들어가거나 근무를 서러 간 모양이었다.
연무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플로레타와 미론이 우리 쪽으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얘들아, 어디 갔었어!”
“기사단장한테.”
미론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렸다. 그가 타솔라와 지시스에게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들은 대답 없이 나를 보았다.
나는 말해도 좋다고 허락하는 대신 미론을 타솔라와 지시스 쪽으로 떠밀었다.
“오늘 호위는 여기까지야. 셋 다 생활관으로 돌아가. 타솔라와 지시스는 미론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고. 기왕이면 사람 많은 곳에서. 큰 목소리로.”
“소문을 내라는 뜻입니까?”
“그래. 단장이 기사단을 가지고 내기를 했다고.”
“알겠습니다.”
“좋아. 가 봐.”
이라네가 손을 내젓자 타솔라와 지시스가 경례를 했다.
얼떨결에 같이 경례한 미론이 눈짓으로 플로레타에게 인사하고 두 사람을 따라갔다.
***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연무장으로 나갔다.
어제 소식을 전해 들은 탓인지 기사들의 시선이 더 싸늘했다.
대부분 지나갈 때마다 노골적으로 비웃거나 고개를 저어 댔다. 가끔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기사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나는 연무장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맨 앞에는 부기사단장이 서 있었다. 여태껏 안 보이던 놈이 나온 걸 보면 내가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모양이다.
부단장은 나를 힐끔거리며 체조를 시작했다.
제대로 몸을 풀어 놓지 않으면 큰일이 날 걸 알기에 열심히 체조를 따라 했다.
몸을 트는 동작이 있을 때 설렁설렁하는 놈들을 노려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체조만 했는데도 죽을 것 같네.’
도대체 얘는 몸이 얼마나 말랑한 거야.
차가운 바람이 부는데도 이마에 땀이 흘렀다. 땀을 닦아 내는데 부기사단장이 기사들을 돌아서게 하고 외쳤다.
“구보 시작!”
나는 기사들의 속도를 맞춰 뛰었다.
그다지 빠르게 뛰는 게 아닌데도 보폭 차이가 커서 그런지 금세 숨이 가빴다.
한 바퀴도 돌지 않았는데 서서히 뒤처지는 게 느껴졌다.
맨 앞에 있던 타솔라가 속도를 늦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죽겠으니까 말 걸지 마! 소리치고 싶은데 숨이 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호흡. 호흡을 제대로 해야 해.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 노력하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말……. 걸지 마.”
“알겠습니다.”
정말 이를 악물고 뛰었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져서 다른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이번엔 미론이 다가왔다. 땀 때문에 흐려진 시야로도 그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잘 보였다.
“업어 드릴까요?”
“앞, 허억, 앞으로,”
“예? 앞으로 들어 달라고요?”
“앞으로 꺼져.”
미론이 입을 다물고 조용히 속력을 내어 대형에 합류했다.
지시스가 계속 힐끔거리길래 오면 죽이겠다는 눈빛을 보내고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눈을 질끈 감고 후계자 자리에 있을 때를 떠올렸다.
호위 기사가 항상 붙어 다녔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직접 몸을 지켜야 했다.
처음 검술을 배울 때, 그때도 이만큼 힘들었다. 체력 단련은 익숙해지려고 하면 강도가 높아졌다.
그래도 다 버텨 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