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내가 죽음에서 되돌아온 것과 의문의 남자가 상관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확실해졌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를 깨우고 지켜보고 있다.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흘리며 내가 그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마치 굶주린 사냥감을 유인하듯이.
감히 누가 황제를 사냥감으로 여긴단 말인가.
불쾌함과 함께 강렬한 호기심이 치솟으려 할 때였다.
“공주님!”
로그리예의 손이 나를 생각의 늪에서 건져 올렸다.
또래보다 조금 큰 손이 내 양 볼을 완전히 감쌌다. 그는 걱정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아름다운 청보라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처연히 반짝였다.
“생각하지 마.”
“…….”
“그냥, 신경 끄면 안 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그가 잠시 침묵했다.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불안한 얼굴로 우르르 말을 쏟아 냈다.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 미리 없앨 수 있었던 보라색 태양 장식물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가 보란 듯이 치운 것도 그렇고. 자꾸 주변을 맴도는 것도. 네 관심을 끄려는 거야. 네가 자신을 찾아 주길 바라는 거라고.”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어두침침해졌던 로그리예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문득 실소가 터졌다.
“너는 뭔가 알고 있구나?”
평소의 위치로 되돌아가려던 로그리예의 입꼬리가 일자로 굳었다.
나는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을 떼어 냈다.
“그 생소한 종교 단체가 원하는 게 뭔지,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말이야.”
“나도 정확한 건 몰라.”
“그래도 짐작은 하고 있겠지.”
그는 내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진작 알았으면 몰래 궁전을 빠져나가 로즈라를 찾아가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는 거 전부 말해.”
한 발자국 물러나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랜 침묵 끝에 로그리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나랑 약혼하면 알려 줄게.”
“도대체 왜 그렇게 약혼에 집착해?”
“그건 나랑 결혼하면 알려 줄게.”
얘는 나랑 장난하자는 걸까?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로그리예가 나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여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가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나중에 말해 줄게. 어차피 우리 결혼할 거잖아.”
아름다운 푸른 보라색 눈동자가 눈을 맞춰 온다.
“난 너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될 테니까.”
그의 위로 다른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찬란한 금발에 아름다운 청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내 정치적 동반자 라파일.
‘항상 펠리온 공작을 먼저 찾으시는군요. 폐하께 필요한 사람은 제가 아니었습니까?’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그 말이, 왜 지금 생각나는 걸까?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던 그가 떠오르자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로그리예를 밀어내고 뒤로 물러났다.
말하지 않으면 약혼도 없던 일이라고 협박해 볼까 하다가 또 라파일의 얼굴이 생각나 그만두었다.
나는 포기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용건은 그게 다야?”
“얼굴 보는 게 주된 목적이었으니까, 그렇지.”
“그럼 이제 가.”
“공주님 너무 매정해.”
“쫓아내 줘?”
로그리예는 젖은 코트처럼 축 처져서 터덜터덜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어떻게 돌아가려는 거지?
궁금한 마음에 발코니로 다가가자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배웅해 주게?”
“그래.”
그가 내 양손을 제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갔다가 금방 올게.”
“그럴 필요는 없는데.”
“응. 나도 사랑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로그리예가 순식간에 난간을 넘어갔다.
“너, 이, 미친!”
2층에서 냅다 뛰어내리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깜짝 놀라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낙법이라도 쓴 건지 로그리예는 1층에 멀쩡히 서 있었다. 그는 놀란 내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차갑게 쳐다보는데도 로그리예는 내게 유유히 손을 흔들며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궁전 안은 시끄러웠다.
발코니로 나가 밖을 보자 짐마차가 떠나는 게 보였다.
오틸리에는 플로레타 곁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밖에는 룩소르와 키네시아만이 서 있었다.
나는 방 발코니 난간에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레튜니아 황자가 남는다더니. 사실인가 보네.’
돌아갈 준비를 하는 레튜니아 사절단 사이에 황자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얼굴을 본 적이 없네.”
듣기로는 에피파네스에 온 뒤, 한 번도 방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파라돈 황자처럼 매일 시끄러운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파라돈 사절단이 보였다.
남겠다고 했던 이들이 전부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역시나 그쪽 사절단에도 황자는 보이지 않았다.
‘저긴 왜 또 황자가 없어?’
혹시 내가 못 본 건가 싶어 자세히 살피는데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맥 빠진 걸음으로 들어오는 포넨트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철퍼덕 드러누웠다.
“말도 없이 신전에 갔다고 혼났어.”
안 물어봤다.
“플로레타는?”
“괜찮아 보이더라. 가 볼 거야?”
“아니. 나중에. 그런데 쟤네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왜 갑자기 돌아가지?”
“어? 그거 키네시아한테 말 못 들었어?”
포넨트가 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로그리예랑 있는 동안 간 크게 파라돈의 황자를 납치해서 설득을 빙자한 협박을 했단다.
“죽어도 안 돌아갈 것처럼 굴더니. 아침에 사람을 보내서 돌아가겠다고 했나 봐. 그 새, 흠. 걔는 그 여관에서 바로 합류한대.”
“그 외출은 전하한테 안 들켰나 보네.”
“키네시아가 덕분에. 너 보는 줄 알았다니까? 아주 이상해졌어.”
“현명해진 거겠지.”
코웃음을 치고 다시 밖을 내다보는데 포넨트가 옆으로 다가왔다.
“이해를 못 하겠어. 나라면 마법에 걸렸다는 걸 안 알려 줬을 것 같은데.”
“그대로 뒀다가 여기서 자살 기도라도 하면 문제가 생기니까.”
가르친 지 얼마 안 됐는데 제법 주변을 둘러볼 줄 아네.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까지. 훌륭해.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좋지.
뿌듯하게 웃으며 키네시아를 내려다봤다. 배우는 게 빠르니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
이대로 옆에서 완벽한 군주가 되는 걸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바로 성불하지 않길 잘했네.’
성불할 방법도 없었지만.
나는 정원이 한산해질 때까지 밖을 구경하다가 몸을 돌렸다.
옆에서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하품을 하던 포넨트가 나를 졸졸 따라왔다.
“어디가? 플로레타한테?”
“아니. 기사단에.”
“기사단? 거기는 왜?”
“궁전에 사람도 좀 빠졌겠다, 이제 슬슬 해이해진 놈들을 잡아야지.”
***
“벌써 10일째야. 도대체 왜 저러고 계신대.”
“난들 아냐.”
“저번에도 저러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러고 3명 차출해 가셨다잖아.”
“그래서 뭐. 왕족 호위로 가 봐야 좋을 것도 없어. 일만 많이 하지. 넌 저게 편해 보이냐?”
모여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이라네리아 근처에 서 있는 기사 세 명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다른 기사들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중 한 명이 뒤로 드러누우며 투덜거렸다.
“젠장. 저러고 있으니까 제대로 쉬지도 못하겠네.”
“미친놈아. 네 자세가 제일 편해 보이거든?”
“그리고 훈련 시간에 왜 쉬려고 그래. 움직이지도 않아 놓고.”
낄낄거리며 핀잔을 주면서도 병장기를 드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말을 돌보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다들 춥다고 중얼거리며 시간을 때우다가 훈련 시간이 지나면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기사단장은 기사들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제 말만 잘 들으면 아무렴 좋다는 식이었다.
부기사단장은 처음에나 가끔 나와 이라네리아의 눈치를 봤으나 이제는 나와 보지도 않았다.
나머지는 설렁설렁 움직이며 시간을 보내는 게 다였다.
이라네리아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오합지졸에 엉망진창이군.’
차가워지기 시작한 바람에 코를 훌쩍이던 포넨트가 그녀를 쳐다봤다.
옆자리에 앉아 식은 차를 홀짝이며 인상을 쓰던 키네시아도 이라네리아를 봤다.
플로레타만이 늦가을에 피는 소담한 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라네리아는 제 형제들을 쓱 훑어보고 연무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깍지 낀 손을 이리저리 비틀어 풀자 포넨트가 질겁한 표정으로 따라왔다.
“야야. 너 또 막무가내로 들이밀지 말고. 가능하면 좀, 생각이란 것도 좀 하고. 어?”
“나는 잘 때도 생각을 하는 사람이야.”
“풉!”
근데 이놈이, 웃어? 포넨트가 항변하려는 듯 손을 들었지만 이미 내 주먹은 그의 이마를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아!”
작은 비명에 플로레타가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눈을 굴려 상황을 파악하더니 다시 꽃으로 관심을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포넨트는 매를 버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야!”
포넨트가 플로레타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붙잡고 마구 문질렀다.
“하, 하지 마아!”
이라네리아는 버둥거리며 노는 두 사람을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타솔라에게 물었다.
“타솔라. 경은 어떻게 훈련해?”
“아침에 달리기 30분, 저녁에 달리기 30분. 근무가 없는 시간에는 병장기와 체술, 근력 운동을 합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대련을 합니다.”
“제대로 하고 있네. 훌륭해.”
갑작스러운 칭찬에 타솔라는 기분이 오묘했다.
그녀는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원래 자리에 붙잡아 두고 고개를 가볍게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라네리아는 별다른 반응 없이 땅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수다나 떨고 있는 기사들 사이를 지나갔다.
300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이라네리아와 키네시아를 따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