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요르고스가 살벌한 표정으로 키네시아에게 다가왔다.
“네 짓이지? 어쩐지 수상하다 했어. 네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지!”
그는 키네시아의 머리채를 휘어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키네시아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요르고스의 손은 키네시아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들지 못했다.
포넨트의 움직임이 더 빨랐던 탓이었다. 그는 요르고스의 팔목을 잡아 뒤로 꺾은 채, 뒷머리를 침대에 내리눌렀다.
“이거 놔! 놓으라고!”
요르고스가 악을 쓰며 몸을 뒤틀었다.
키네시아는 습관이 된 두려움을 애써 지우며 요르고스에게 다가갔다.
“너, 이라네 황제의 금고에 들어가려 했지?”
요르고스의 반항이 뚝 멈췄다.
키네시아는 의자를 하나 더 끌어와 제 의자 옆에 두었다.
그리고 포넨트를 끌어왔다. 포넨트가 요르고스를 놓아주며 키네시아의 옆에 앉았다.
몸을 일으킨 요르고스가 옷매무새와 머리를 가다듬으면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게 뭘 어쨌다는 건데?”
뻣뻣하게 서서 깔보듯 내려다보는 게 재수 없었다.
키네시아는 그간의 괴롭힘이 떠올라 요르고스가 이대로 미치광이가 되거나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더 큰 목표를 떠올렸다.
왕이 되는 것. 그리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강대국인 파라돈의 심기를 건들면 안 된다.
적어도 아직은 말이다.
“금고 입구에 마법이 걸려 있어.”
키네시아가 고개를 치켜들어 요르고스를 보았다.
그는 키네시아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정작 반응을 보인 건 포넨트였다.
“뭐!? 나랑 리아도 그 근처까지 갔었는데?”
“이라네 황제의 혈족이면 괜찮댔어. 허락받지 않은 자들은 마법에 걸려서 처음엔 악몽을 꾸고 나중엔 그 악몽이 환각으로 변한대.”
키네시아가 요르고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본인 눈에만 진짜처럼 보이게 되는 거지. 평소보다 더 심한 공포와 불안을 느끼고 말이야.”
비틀려 올라가 있던 요르고스의 입꼬리가 점점 제자리를 찾아갔다.
믿고 싶지 않아도 전부 자신이 겪은 일이라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레바나의 신전에서 자신이 마법에 걸렸다는 것을 확인받은 뒤였다.
궁전으로 돌아가자마자 극심한 공포가 덮쳐와 잠시 잊었지만 말이다.
요르고스는 목소리를 내리깔아 위협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길래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너희 나라로 돌아가.”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요르고스가 빈정거리며 침대에 앉았다. 그는 여전히 키네시아를 노려본 채로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건방진 태도에 키네시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요르고스의 몸이 튀어 오르듯 경직되었다. 그가 눈에 띄게 겁에 질린 얼굴로 문을 쳐다봤다.
키네시아는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풀숲이 흔들리는 소리에도 두려움에 떨 만큼 오랫동안 공포에 노출된 사람의 표정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해도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표정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분노가 가라앉았다.
동정심 때문은 아니었다. 요르고스 같은 놈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게 불쾌했던 탓이다.
불쾌함이 분노를 이겼다.
“그 마법은 궁전, 정확히는 금고에서 멀어지면 약해져. 국경을 벗어나면 후유증도 남지 않을 거랬어.”
“…….”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그렇게 그를 괴롭히던 환각과 악몽은 어느새 뒤로 물러나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조금 아프고 불안했지만 궁전 안에 있을 때처럼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파라돈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이다.
그동안 요르고스는 제 아버지, 파라돈의 황제에게 살해당하는 환각에 시달렸다. 악몽 속에서는 그의 동생인 페라포네가 죽어 가는 그를 보며 비웃는 악몽도 꾸었다.
그러다 보니 돌아가면 진짜 죽을 것만 같았다.
그가 남기로 결정하자 황자를 두고 갈 수 없었던 다른 파라돈 사절단들도 남겠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보고 네가 하는 말을 믿으라고?”
키네시아가 가만히 노려보자 요르고스가 이기죽대며 걸어왔다.
“나한테 그런 걸 알려 줄 이유가 없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사실 국경을 지나면 머리가 터져서 죽는 건 아니야? 대답해 봐, 키네샤.”
요르고스가 키네시아의 턱을 움켜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키네시아는 피하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그사이 포넨트가 요르고스의 손목을 낚아챘다.
“경고하는데, 내 쌍둥이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
“많이 컸다? 내 그림자만 봐도 벌벌 떨던 새끼가.”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아직도 우려먹냐? 너는 자랑할 게 과거밖에 없어?”
“이 거지 같은 것들이 쌍으로…….”
분노에 찬 요르고스가 버럭 화를 쏟아 내기 전에 키네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네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황금색 눈동자에 타오르는 증오는 고요하지만 확고했다.
말문이 막힌 요르고스가 힘을 빼자 포넨트도 더러운 걸 만진 사람처럼 그의 손을 패대기쳤다.
요르고스는 아픈 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입술을 악문 채 키네시아를 응시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마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 주는 이유가 뭐야.”
거기엔 여러 가지 계산이 깔려 있었다. 설명할 시간은 충분했으나 키네시아는 요르고스와 오래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가 창문을 쓸며 소리를 냈다.
요르고스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키네시아는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무던한 목소리로 답했다.
“일단은, 자비라고 해 둘게.”
“하!”
“어쨌든 나는 할 말 다 했어. 너희 나라로 떠날지, 아니면 궁전에서 저주에 시달릴지. 결정은 네가 해.”
말을 마친 키네시아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며 제 쌍둥이를 불렀다.
“가자, 포넨트.”
***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어렴풋한 시야 너머로 벽시계가 보였다. 짧은 바늘이 숫자 2를 가리키고 있었다.
‘굳이 소리를 내 깨운 걸 보면 암살자는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몰라 베개 밑의 단검을 손에 쥐었다.
몸을 일으키자 창 너머에서 일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키는 그렇게 크지 않네.’
포넨트나 키네시아와 비슷해 보였다. 둘 중 하나인가 싶었지만 두 사람은 굳이 위험하게 창문으로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도 그럴 필요가 없긴 했지만 말이다.
“들어와.”
허락하자마자 창문이 열리고 잘 닫힌 커튼 틈 사이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까꿍.”
“왜 창문으로 들어와?”
“낭만적이잖아.”
로그리예가 환하게 웃으며 실없는 소리를 했다.
낭만은 무슨.
녀석에게 뽑지 않은 단검을 들이대자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생글거리는 것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야밤에 무슨 일이야.”
“나 내일 떠나.”
“그게 뭐?”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왔지. 돌아가면 보고 싶을 테니까. 공주님은 아니야? 나만 진심이야?”
“너도 진심 아니야.”
“내 진심을 매도하다니. 너무해.”
로그리예가 상처받은 사람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우는 소리를 냈다.
침대에서 내려와 다가가자 로그리예가 몸을 더 틀었다.
여전히 흑흑거리고 있는 그의 옆구리를 검집으로 콕콕 찌르며 소매나 허리춤을 눈으로 훑었다.
무기를 숨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안 울지?”
“흐읍, 흑.”
완전히 뒤돌려는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자 위로 삐죽 올라간 입꼬리가 드러났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싸늘하게 쳐다보자 그가 손을 완전히 내리고 씨익 웃었다.
“들켰네.”
“용건이나 말해.”
로그리예가 잡힌 손목을 빼내는가 싶더니 그대로 내 손을 꼭 잡았다.
“진짜 보고 싶어서 온 건데.”
“만찬 때는 안 보이던데.”
“나 찾았어? 공주님도 내가 보고 싶었구나?”
“말 돌리지 말고.”
“…….”
“찾아온 목적이나 말하라는 뜻이야.”
할 일도 없는 녀석이, 보고 싶었으면 만찬에 왔겠지.
자기 아버지인 아미르 공작도 참석한 자리에 혼자만 쏙 빠져 놓고는 어디서 개수작이야?
잡힌 손을 빼내고 슬그머니 단검을 뽑으려 하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보고 싶어서 왔다는 것도 진짠데, 사실 겸사겸사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
“졸리니까 빨리 말해.”
“그 연고, 누가 준 거야?”
연고? 신성력이 깃든 그 연고를 말하는 건가? 그렇겠지. 내가 그에게 준 연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거 네가 준 거 아니야? R이 보냈다고 쪽지를 남겼길래 로그리예의 R인 줄 알았는데.”
미소가 점점 사라지고, 그의 얼굴이 곤란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표정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연고는 그가 보낸 것이 아니다.
애쓰지 않아도 이성이 습관적으로 머릿속의 정보를 모으고 짜 맞춘다.
신성력, R, 리그레시오, 그리고 나를 알고 있는 사람.
‘저는 진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서, 괜찮습니다.’
이성의 손가락이 또다시 보라색 태양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