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키네시아 공주님. 만찬에 초대된 분들의 명단입니다. 불참 의사를 밝히신 분은 따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고마워요.”
키네시아가 가볍게 명단을 훑었다.
파라돈에서 온 사절단은 대부분 불참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라네리아와 드잡이질을 한 놈 중에는 오직 한 명만이 만찬에 참석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파라돈의 사절단분들께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냥 형식상 묻는 말일 뿐, 사실 큰 관심은 없었다.
와 봤자 분위기만 망칠 게 분명하니 파라돈에서 온 놈팡이들은 그냥 방에나 처박혀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기왕이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발적으로.
문제가 생겼거나 괜한 트집을 잡아 불참하는 거면 찾아가 봐야 하니 귀찮아진다.
키네시아는 시종장의 입에서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시종장은 대답은 정반대였다.
“있습니다.”
키네시아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자세히 말해 보세요.”
“툭하면 비명에 고함을 지르고 기물을 파기하거나 기행을 벌인다고 합니다.”
긴장이 툭 풀렸다. 파라돈에 있을 때는 더한 짓도 하던 놈들이다.
그 정도 패악이야 그놈들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성질을 죽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이라네 황제에게 맞은 게 효과가 좀 있었나?’
어쩌면 외국에 왔다고 절제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놈들에게 그런 상식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건 뭐, 항상 있었던 일인데요. 다친 사람은요?”
“사절단 사람들이라면 다들 무사하신…….”
“파라돈 놈, 파라돈 사람들 말고요. 궁전에서 일하는 에피파네스 사람들이요.”
“애당초 에피파네스의 시종은 불쾌하다며 가까이하지 않아 다친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럼 됐어요.”
키네시아는 명단을 내려다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찬에 참석한다고 표시한 한 놈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타국의 사절단도 모이는 자리에서 함부로 굴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콕, 콕, 찔렀다.
“잠깐 다녀올게요.”
키네시아는 결국 시종장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사절단이 머무는 곳으로 들어서자마자 고함 소리가 들렸다.
곧 문 하나가 벌컥 열리며 엉망인 차림새의 파라돈 귀족 한 명이 뛰쳐나왔다.
“공자님, 진정하십시오!”
하인 여러 명이 그를 붙잡았다. 파라돈의 귀족이 악을 써 대며 팔과 발을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여러 명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는지 맥없이 문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으아아! 꺼져! 다 꺼지라고! 이 괴물들, 꺼져!”
악다구니가 서서히 닫히는 문에 잡아먹혔다.
키네시아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났다.
그리고 이라네리아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파라돈 놈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당장 말해 줘.”
***
만찬이 끝났다.
파라돈의 황자 요르고스와 그 일당들은 건강을 핑계로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다.
응수했던 남자 한 명도 결국 오지 않았다.
키네시아는 방으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포넨트에게로 찾아갔다.
“나 파라돈 황자한테 갈 건데 같이 가 줘.”
“이 시간에?”
포넨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키네시아를 따라갔다.
파라돈 사절단이 머무르는 곳은 밤이 되자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키네시아는 요르고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마침 지독한 악몽에 잠들지 않으려 버티던 요르고스가 막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깨어나 비틀거리며 문을 확 열어젖혔다. 키네시아와 포넨트가 서 있었으나 그의 눈에는 아버지가 보낸 암살자처럼 보였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이라네리아에게서 모든 것을 전해 들은 키네시아는 그가 환영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태라면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포넨트를 데려온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포넨트. 일단 입부터 막자.”
“뭐? 왜?”
“나중에 설명해 줄게.”
“……너 점점 리아를 닮아 간다?”
키네시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말에 오묘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준비해 뒀던 천을 꺼내 들었다.
키네시아가 겁에 질려 주저앉은 요르고스에게 다가갔다. 포넨트는 요르고스의 뒤로 돌아가 팔을 잡았다.
그러자마자 키네시아가 요르고스에 입 안에 천을 가득 구겨 넣고 재갈을 물리듯 입을 막았다.
“으읍! 읍! 으으음!”
“궁전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해.”
“뭐? 납치야?”
“아니. ……맞나?”
“야!”
포넨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요르고스가 기절해 버렸다.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차라리 잘 됐어. 일단 업자.”
“……내가 업을게.”
포넨트가 등을 보였다. 키네시아는 기절한 황자를 힘겹게 포넨트 등 위에 얹었다.
팔을 목에 둘러 주자 포넨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네시아는 요르고스의 입을 묶었던 천을 풀고 망토를 가져와 몸 위에 덮었다.
“가자.”
“가자니까 가긴 하는데……. 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
“괜찮아.”
조용한 복도를 걸어 정원으로 빠져나왔을 때였다.
“거기. 잠깐 멈추십시오.”
순찰하던 경비병들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포넨트가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가 긴장한 표정으로 키네시아를 보았다.
그녀는 제 쌍둥이에게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고 몸을 돌렸다.
얼굴을 확인한 경비병 두 명이 경계를 풀고 경례를 했다.
“공주님, 왕자님. 이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파라돈의 황자 때문에요. 아프다는데 굳이 신전을 가야겠다잖아요.”
“하인들 시키지 않으시고요.”
“괜히 다른 사람들이 만졌다가 요르고스 황자에게 화를 당할까 봐…….”
“그럼 마차까지 엄호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세요.”
포넨트가 움직이자 요르고스가 악몽을 꾸는지 끙끙거렸다.
그는 뒤에 따라오는 경비병들을 힐끗 보고 키네시아게 바짝 붙었다.
“야.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괜찮다니까?”
“중간에 깨어나기라도 하면 어떡해?”
“겁쟁이.”
키네시아가 속도를 올려 빠르게 걸었다.
마차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요르고스는 가끔 끙끙거리기만 할 뿐 깨어나진 않았다.
대신 식은땀을 어찌나 흘리는지 포넨트의 등까지 다 젖어 버릴 정도였다.
그 모습이 진짜 아픈 사람 같았기에 경비병들은 수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마차가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하자 한 명은 요르고스를 마차에 눕히는 걸 돕고 한 명은 마부를 깨워 데려왔다.
키네시아는 마부가 인사를 하는 것을 받아 준 뒤 경비병들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이제 가 보세요.”
“예, 공주님.”
경비병들이 그들을 두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키네시아는 그들이 정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마부에게 말했다.
“광장 근처에 있는 여관 중에 아직 연 곳이 있을까요?”
“아는 곳이 한 곳 있긴 한데, 그쪽으로 모실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키네시아가 말을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팔짱을 끼고 앉아 맞은편의 요르고스를 노려보던 포넨트가 키네시아에게 자리를 비켜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왜 이렇게 대책 없어졌냐?”
“대책 없는 거 아니야. 충분히 생각했어. 위험할까 봐 너한테 도와달라고도 했잖아.”
“도와……, 흠! 그치. 도와주는 거지.”
포넨트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네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가 요르고스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고서는 제 입을 막았다.
두 사람은 잠시 숨죽이고 있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 갔다.
“포넨트. 만약 요르고스 황자가 행패를 부리면 네가 막아 줘야 해.”
“그, 그래도 돼? 저 몸에 상처 냈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약점을 잡아 놔서 괜찮아. 그냥 제압만,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나를 뭐로 보고.”
포넨트가 보란 듯이 가슴을 폈다.
키네시아는 긴장을 다스리려는 듯 길게 숨을 내쉬며 요르고스를 보았다.
이라네리아에게 들었던 대로 궁전에서 멀어지면 저주가 약해지는지, 요르고스는 더 이상 식은땀을 흘리지 않았다.
그래도 앓는 소리를 내는 건 여전했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포넨트는 싫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다시 요르고스를 업었다.
키네시아는 마부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 여관으로 들어가 다른 객실과 가장 동떨어진 방을 잡았다.
“이제 어떡해?”
포넨트가 요르고스를 침대에 눕히며 키네시아에게 물었다.
“깨워야지.”
키네시아는 만지기도 싫다는 듯 방 한쪽 구석에 세워 놓은 빗자루를 가져와 막대기 끝으로 요르고스를 쿡 쿡 찔렀다.
인상을 찌푸리며 뒤척이던 요르고스가 비명과 함께 깨어났다.
“으아아악!”
그는 땀을 닦고 공포로 혼탁해진 눈을 힘겹게 떴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낯선 장소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포넨트와 키네시아를 발견하고는 발로 땅을 밀며 물러났다.
벽에 딱 붙은 요르고스가 쌍둥이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아직도 악몽 속에 있는 것인지, 현실인지 가늠하는 듯한 눈이었다.
키네시아는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앞에 앉았다.
“정신이 좀 들어?”
“너, 뭐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여긴 어디야, 납치야? 네가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왜 남겠다고 했어?”
요르고스는 키네시아의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려갓다. 포넨트가 붙잡으려 했지만 키네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문고리를 잡는 요르고스에게 말했다.
“악몽을 꾸고, 환각에 시달리지 않아? 이상하게 공포심도 더 심하게 느껴지고 말이야.”
요르고스의 손에 힘이 풀렸다.
뒤돌아보는 표정이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