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하사품은 정말 치하하기 위한 거였지만, 시험이라면 시험일 수도 있지. 그리고 재상과 다른 귀족들에게는 군대를 맡기지 않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다들 믿을 만한 사람이야. 특히 하먼 재상은. 그리고 반겔레스 자작에게 다 맡기기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규모가 작은 군대를 만들라고 하는 게 낫지 않아?”
“낫지 않아.”
키네시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던 그녀가 다시 나를 올려다봤다.
“모르겠어.”
“번쩍이들도 잠시 몸을 사렸을 뿐이지 아직 건재하잖아. 거기다 파라돈이나 레튜니아도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고. 레바나 신전도 그렇고.”
“레바나 신전은 왜?”
“몰랐어? 에피파네스에 돈을 제일 많이 빌려준 게 레바나 신전이던데? 귀족들과의 유착도 심하고.”
“몰랐어…….”
그랬겠지. 신전놈들이 대부업을 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물론 이자는 터무니없이 낮긴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하다. 야금야금 국왕 소유였던 땅을 사들이는 것도 그렇고.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신성력이 돌팔이 수준이지.
“어쨌든.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들키기 쉬운 법이야. 만약에 왕당파 귀족들이 한꺼번에 군대를 키운다는 게 들통나면 어떻게 되겠어?”
“경계해서 과격하게 나오겠구나.”
“맞아. 그러니까 은밀하게 해야 하지. 한꺼번에 몰려온 놈들은 중요한 일을 상의할 정도로 가깝고 교류가 많은 사람들일 거 아니야. 비밀을 엄수해야 하려면 사회적으로 좀 동떨어져 있는 사람이 낫지.”
“그 짧은 사이에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키네시아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키네시아가 미소를 지었다가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내 배려와 상관없이, 문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키네시아의 사색을 방해했다.
곧 문이 벌컥 열리며 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큰일이에요!”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겹의 파티션에 당황했는지, 도라의 목소리가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이내 파티션을 돌아들어 와 상황을 알렸다.
“플로레타 공주님이 쓰러지셨대요.”
키네시아가 벌떡 일어났다.
“왜, 아니, 로라는 지금 어딨어?”
“방에…….”
도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네시아가 방을 뛰어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안내해.”
“예?”
“뭘 놀라? 내가 나가면 혼자 여기 있으려고 했어?”
“아니요. 아니에요! 안내하겠습니다.”
도라가 공손한 태도로 앞서 걸었다. 그녀는 내가 한 말을 신경 쓰는 듯했다.
플로레타의 방이 어딘지 모르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한 말인데, 반응이 제법 볼 만했다.
나는 나를 힐끔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도라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플로레타는 왜 쓰러진 거야?”
“신전에 가셨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제법 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서 뭘 했길래 애가 기절을 해?”
키네시아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들어가자 중요 인물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어휴, 정신없어.
도라에게 가 보라고 손짓하고 방 내부를 살폈다.
룩소르와 오틸리에는 의사로 보이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침대 반대편에서는 포넨트, 지시스, 미론이 키네시아와 마주 서 있었다.
“너네는 왜 거기서 혼나고 있어?”
지시스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미론은 플로레타가 걱정되었는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키네시아에게 혼나는 포넨트를 내버려 둔 채 국왕 부부에게로 갔다.
인사를 하고 나가는 의사 대신 룩소르에게 물었다.
“뭐래?”
“몸에 이상은 없다는구나.”
“그런데 왜 기절을 해?”
“모르겠다. 모르겠어…….”
룩소르가 눈물을 보이며 플로레타가 누워 있는 침대에 엎드렸다. 오틸리에도 몸을 돌려 눈물을 감췄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플로레타를 살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신음하며 눈을 떴다.
“아빠?”
“플로레타! 정신이 드느냐?”
“응……. 집이에요?”
“그래, 아가.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왜 쓰러진 게야.”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말을 하다 말고 플로레타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오틸리에가 플로레타를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로라. 엄마 아빠가 옆에 있어 줄게.”
룩소르는 제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몸을 돌렸다.
“키네샤. 오늘 저녁 만찬은 네가 주관해 주어야 할 것 같구나. 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
“그래. 그래. 나머지는 플로레타가 좀 안정을 취한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경들도 이만 돌아가시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제일 먼저 몸을 돌렸다. 포넨트는 내 옆으로 오면서도 연신 플로레타를 힐끔거렸다.
키네시아는 그런 포넨트를 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만찬 준비해야 하니까 먼저 가 볼게.”
키네시아를 보내고 복도를 걷는데 뒤로 발소리가 우르르 따라왔다.
나는 그중 유난히 힘없는 발소리의 주인에게 물었다.
“신전에는 왜 갔어?”
질문을 받은 포넨트가 걸음을 멈췄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곧 그가 걸음을 빨리해 따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주자 포넨트가 제 목덜미를 거칠게 문지르고는 개미 더듬이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양 때문에.”
“양? 메에에?”
“아니, 양이 아니라 태양! 보라색 태양 때문에 갔다고.”
“작당 모의하던 게 그거였구나?”
포넨트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내가 빤히 쳐다보자 이내 수긍했다.
“어. 궁전에는 관련된 증거가 없는 거 같아서. 별관에서도 나온 게 없다 그러고…….”
“별관에서 나온 게 없대?”
“몰랐어?”
“몰랐어.”
내 말에 포넨트가 조금 의기양양해진 표정이었다.
“내가 더 알아볼까?”
“아니.”
“뭐? 왜!”
왜긴 왜야. 더 믿을 만한 사람한테 맡겼으니까 그렇지.
“관심 끄려고. 그러니까 너도 더 알아보지 마.”
“…….”
포넨트는 당장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늘어트린 채 땅을 차며 걷다가 작게 투덜거렸다.
“또 키네시아하고만 얘기하려는 건 아니고?”
저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쳐다봤다.
포넨트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댓 발 나온 입으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서운해. 나랑 플로레타는 빼놓고 키네시아랑만 노는 거 말이야. 우리 원래 다 같이 몰려다녔잖아.”
“노는 게 아니라 일하는 거야.”
심드렁한 대답에도 포넨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는 입을 집어넣고 눈을 맞춘 채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거면 더 같이 다녀야지. 나랑 플로레타도 이 나라를 함께 짊어질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형제잖아.”
“기특하네.”
“뭐?”
놀란 마음에 칭찬이 튀어 나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딱밤이었다.
물론 피하긴 했지만, 저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중지를 휘둘러?
한 번만 더 손을 놀리면 콱 물어 버리려고 했는데 포넨트가 눈치 빠르게 손을 거뒀다.
포넨트 놈이 어린애를 훈계하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쳐들었다.
“기특하다는 어른이 애한테 하는 칭찬이고! 조그만 게 어딜.”
“그래서 하는 말이거든.”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포넨트 네 말이 옳아.”
플로레타와 포넨트도 왕족이다.
분명 크면 자리를 주고 부려 먹어야 할 텐데 아는 게 없어서 여기저기 실수하고 다니면 결국 곤란해지는 건 나다.
원래 조기 교육이 중요한 법이라고, 지금부터 잘 키워 놔야지.
“좋아. 이제부터 끼워 줄게. 대신 우리끼리 행동할 땐 전하들에게는 비밀로 해야 해.”
애는 애인지 엄마 아빠에게는 비밀로 하라니까 우물쭈물거리기 시작했다.
“싫으면 말고.”
“아니야! 비밀로 할게. 절대. 비밀 엄수.”
“좋아.”
“그런데 플로레타는 좀 힘들 수도 있어. 걔는 뭐든 말하거든.”
“그럼 그것도 네 임무야. 동생 단속 잘하기.”
“그 동생에 너도 포함이고.”
포넨트가 가볍게 말아 쥔 중지와 검지로 내 코를 꼬집었다.
“아야!”
저게 감히 위대한 황제의 앙증맞은 콧잔등을……! 분노하고 있는데 포넨트가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그러니까 혼자 위험한 짓 좀 하지 마. 이 멍청아.”
“이게 누구 보고 멍청이래?”
딱밤을 때리려고 하는데 포넨트가 얄밉게 몸을 요리조리 틀면서 피했다.
어쭈. 이것 봐라.
눈에 불을 켜고 쳐다보니 그의 얼굴에 잘못 건드렸다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멀뚱히 서 있는 기사 세 명이 보였다.
미론은 생각에 잠긴 듯했고, 지시스는 치열하게 싸우는 강아지들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타솔라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황제로서의 위엄이…….’
잠시 눈앞이 아득했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어느새 도망치고 있는 포넨트를 가리키며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잡아 와.”
타솔라가 제일 먼저 뛰어나갔다. 그녀가 오른쪽을 붙잡자 지시스가 왼쪽을 붙잡았다.
포넨트가 연행되는 사람처럼 질질 끌려오며 몸을 비틀었다.
“경들, 잠깐! 나도 왕족이야! 왕족이라니까?”
당황한 목소리가 복도 벽에 부딪혀 요란하게 메아리쳤지만 그가 내 딱밤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