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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47화 (47/151)

<47화>

플로레타가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포넨트의 팔을 붙잡았다.

“안 돼, 포넨트.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

“그건 걱정 마.”

포넨트는 응접실을 나와 시종에게 말했다.

“궁전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우리가 어디에서 누구랑 있는지 말씀드려.”

“예, 왕자님.”

포넨트가 의기양양하게 서서 플로레타를 쳐다보았다. 마치 ‘이제 됐지?’ 하고 묻는 듯했다.

플로레타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종이 먼저 떠난 뒤, 네 사람은 신관을 따라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남은 신관이 한 명밖에 없어 관리가 잘 되어 있진 않았지만 책은 꽉 차 있었다.

포넨트는 눈을 반짝였고 플로레타는 울상이 되었다.

그녀는 포넨트가 건네준 책을 시무룩하게 받아 들어 그 자리에서 펼쳤다.

그러다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포넨트. 나 이제 글자만 봐도 멀미 나…….”

플로레타가 울먹이며 말하자 미론이 다가왔다.

“공주님. 제가 도와드릴까요?”

“네? 저, 음…….”

자신들이 찾고 있는 게 뭔지 기사들에게 말해도 되나?

플로레타가 눈치를 보다가 책을 고르느라 정신없는 포넨트에게 다가갔다.

“기사님들한테도 도와달라고 할까? 네 명이서 찾으면 더 빨리 끝날 것 같아서…….”

포넨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시스와 미론에게 책을 나눠 주며 말했다.

“보라색 태양이나 레, 레,”

“레그레시오.”

“맞아. 레그레시오에 대해 찾아 주면 돼.”

물론 플로레타의 품에도 책이 쌓였다. 양이 너무 많아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에 미론이 플로레타의 책을 가져가 자신이 든 책 위에 쌓았다.

“공주님. 우리는 저쪽으로 가요.”

미론이 다른 한 손으로 책장 너머를 가리켰다.

플로레타는 정신없이 책을 읽는 포넨트를 힐끗 보고 미론을 따라갔다.

두 사람은 구석으로 가서 높이 쌓은 책을 가운데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우울한 얼굴로 책을 펼친 플로레타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미론이 작게 웃으며 소곤거렸다.

“공주님. 보는 척만 하세요.”

“안 돼요. 그랬다간 포넨트가 뭐라고 한단 말이에요.”

“괜찮아요. 제가 촌장님 도와서 이거저거 찾느라 이런 일엔 도가 텄거든요.”

미론이 빠르게 책을 넘겼다. 그 모습을 본 플로레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빨리 읽어요?”

동그랗게 뜬 눈을 보며 미론이 웃었다.

“아니요. 이런 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게 아니라 필요한 글자를 찾아서 그 근처만 읽는 거예요.”

플로레타가 눈을 깜빡이다가 활짝 웃었다.

“백합 속에 섞인 하얀 튤립을 찾는 것처럼요?”

“그런 것처럼요. 그러면 훨씬 빨리 볼 수 있어요.”

“그럼 저도 같이 찾을게요.”

플로레타가 입술을 앙다물고 결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호기롭게 책을 펼쳤다.

보라색 눈동자가 열심히 좌우 위아래로 움직였다.

꼼꼼히 읽을 때보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배는 빨라졌다.

눈동자도 빠르게 굴러다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플로레타는 저도 모르게 하품을 하려다가 미론을 힐끔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하품은 겨우 참았지만 눈이 점점 감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곧 고개가 아래로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발견한 미론이 미소 지었다. 그는 쌓아 놓은 책에 플로레타를 기대게 해 놓고 책으로 눈을 돌렸다.

플로레타는 흐린 눈을 잠깐 들어 올렸다가 머리를 편하게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가 막 잠에 빠져들려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머릿속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아이야.]

감긴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아이야. 내게 오렴.]

플로레타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꿈을 꾸는 듯 몽롱하고 흐린 눈빛이 드러났다.

그녀는 반쯤 잠든 채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책에 집중하고 있던 미론이 고개를 돌렸다.

“공주님?”

그는 작은 목소리로 플로레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반응 없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꾸벅꾸벅 졸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다니. 뭔가 이상했다.

잠시 마법에 걸린 건가 생각했지만 신전은 성역이었기에 어지간한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특히 정신 마법 같은 고등 마법은 발현하기조차 어려웠다.

‘못 들으셨나? 아니면 몽유병?’

호위하기 위해 온 것이기에 미론은 일단 책을 내려놓았다.

플로레타는 놀랍도록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포넨트와 지시스는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였다. 바로 옆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미론 역시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미론이 플로레타를 뒤따라가자 그제야 지시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어딜 가냐는 눈으로 미론을 봤다.

미론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공주님.’

지시스가 닫히는 문을 보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미론이 지시스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그리고 자신을 한 번 가리킨 다음 도서관 문을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내가 따라 갈게.’

지시스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미론이 도서관을 나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플로레타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화장실이 급해 조용히 나온 것이라면 민망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에 그는 거리를 두고 소리를 죽여 플로레타를 따라갔다.

그러나 그녀가 향한 곳은 대기도실이었다.

단상 위에 있는 거대한 샤마흐의 문장 앞에 선 그녀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막 문을 넘던 미론도 멈춰 섰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지?’

우연히 들어왔다고 하기엔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두리번거리지도 않았고 말이다.

이상함을 느낀 미론이 플로레타에게로 향했다.

플로레타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구름 위를 밟고 서 있는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녀는 혼미한 눈으로 샤마흐의 문장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의 문장 위로 달의 형상이 겹치고, 하나가 되듯 섞였다. 그 위로 수십 가지 색깔의 빛이 쏟아져 서로 다르게 반짝였다.

그만큼 다채로운 느낌을 내는 목소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내게 왔구나. 나의 아이야.]

플로레타가 멍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문장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미론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공주님!”

또렷한 목소리가 구름을 꿰뚫는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마치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플로레타는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몸이 무너져 내렸다.

놀란 미론이 플로레타를 받아 들며 주저앉았다.

“공주님, 정신 좀 차리세요! 공주님!”

어깨를 흔들어 보았지만 플로레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미론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대기도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들어오려던 신관이 뛰쳐나오던 미론과 부딪혀 넘어졌다.

“이게 무슨…….”

“죄송합니다!”

“신전에서 뛰시면 안 됩니다!”

신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미론은 최대한 빨리 달려 도서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왕자님. 공주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뭐?”

포넨트가 책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달려왔다.

“플로레타! 왜 이래, 야! 눈 좀 떠 봐!”

포넨트가 뺨을 두드릴 때마다 고개가 힘없이 굴러다녔다. 덜컥 겁이 난 그가 미론을 잡아끌며 말했다.

“당장 궁전으로 돌아가자.”

***

반겔레스에게 군사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고, 룩소르의 군대라는 것을 철저하게 감추라고 말했다.

반겔레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참, 그리고 하사품은 그냥 받아. 군대를 키우려면 돈이 필요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룩소르의 군대지만 총괄은 내가 할 거야. 연락할 수단은 내가 나중에 알려 줄게.”

“예, 공주님.”

그는 자신이 기사라도 된 듯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한 후 먼저 방을 나갔다.

나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문을 열었다.

긴 복도를 지나는데 계단 근처에 서 있는 키네시아와 타솔라가 보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따라오라고 눈짓하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타솔라는 밖을 지켜.”

그녀를 두고 들어와 소파 주변에 몇 겹의 파티션을 쳤다.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키네시아가 입을 열었다.

“하사품을 내린 건 왕당파 귀족들을 시험한 거야? 네가 간 뒤에 재상과 다른 귀족들도 하사품을 헌납하고 갔어. 그들에게도 군대를 맡길 거야? 그리고 파라돈 황자에 관한 건 뭐야? 아는 거 있어?”

“어휴, 숨 좀 쉬자.”

투덜거리자 키네시아가 민망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독촉을 해 댔다.

“이제 숨 다 쉬었지?”

정말, 누굴 닮아서 저렇게 성격이 급한지 모르겠다.

포넨트를 닮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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