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역시 포넨트. 집념 하나는 알아줘야 해.”
로그리예, 키네시아와 함께 검을 배울 때도 포넨트는 그랬다.
셋 중 제일 먼저 두각을 드러낸 것은 로그리예였다. 처음 배우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실력이 늘었다.
키네시아는 로그리예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양만큼의 훈련이 끝나면 궁전 안으로 돌아가 쉬었다.
그러나 포넨트는 달랐다. 그는 또래보다 두 배, 세 배 더 훈련했다. 잠을 줄여 가며 체력을 단련하고 검을 휘둘러 로그리예의 실력을 바짝 쫓아갔다.
결국 따라잡진 못했으나 그 노력 덕분에 성인과 맞먹는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저렇게 열심히 찾는데 정말 단서가 하나도 안 나왔어?”
“네…….”
로그리예가 다가가 포넨트 옆에 쌓인 책들을 봤다.
전부 신화와 종교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별관에는 가 봤어?”
“보라색 태양처럼 생긴 장식물은 안 나왔대요.”
플로레타가 책장 뒤에 숨은 채로 말했다.
“신기하네. 공주님하고 기사가 동시에 헛것을 본 건 아닐 텐데 말이야.”
침묵이 흐르는 동안 포넨트가 책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그리고 뒤로 벌러덩 드러누우며 소리쳤다.
“없어! 없다고!”
로그리예가 포넨트의 머리를 피해 물러나며 서재 안을 쭉 둘러봤다.
책장에는 책 대신 곰팡이나 거미줄이 들어차 있었다.
“여기서 건질 건 없어 보이는데. 태양 문양을 쓰는 종교라고 했으니까 차라리 샤마흐 신전,”
“가자!”
플로레타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포넨트……. 난, 나는 힘들어서 싫어…….”
“나도 샤마흐 신전은 별로.”
플로레타와 로그리예는 거절했으나 포넨트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을 뻗었다.
로그리예는 냉큼 뒤로 물러나 포넨트의 손을 피했으나 플로레타는 붙잡히고 말았다.
로그리예는 그대로 기척을 숨기고 없는 사람인 척했다.
플로레타는 원망 섞인 눈으로 로그리예를 쳐다보며 포넨트에게 끌려갔다.
그는 중앙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시종장에게 외투와 마차를 준비해 달라고 한 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장 기사단으로 향했다.
“미론 경이나 지시스 경 있나?”
포넨트가 위엄 있는 말투를 따라하며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그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불러오겠다며 자리를 비켰다.
플로레타가 당황해서 양손으로 포넨트의 소매를 붙잡았다.
“기, 기사님들은 왜?”
“왜긴 왜야. 둘만 나가면 위험하니까 그렇지. 저 두 사람은 리아가 인정한 사람들이니까 실력도 인성도 괜찮을 거야.”
“리아한테 말할 수도 있잖아!”
“아……!”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포넨트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는 기사가 사라진 방향과 자신들이 온 방향을 번갈아 보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도망갈까?”
“이미 늦었어…….”
플로레타가 시무룩하게 대답하며 포넨트의 어깨 너머를 쳐다봤다.
미론과 지시스가 근처까지 와 있었다.
“왕자님. 찾으셨습니까?”
“어……. 그게…….”
포넨트가 어물쩍거리며 변명거리를 찾고 있을 때, 미론이 불쑥 말했다.
“왕자님, 외출하시게요?”
“어? 뭐? 왜?”
지시스가 손가락을 들어 마차를 가리켰다. 포넨트가 고개를 돌렸다.
정원의 대로를 지나 연무장 쪽으로 들어온 마차에서 시종이 두꺼운 외투와 망토를 든 채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다시 백지장이 되었다.
미론은 포넨트의 멍한 표정을 보았다가 대답을 듣긴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플로레타에게 물었다.
“나가시죠?”
“아? 네? 네. 나가기는 하는데, 그게…….”
“호위해 드릴까요? 아니, 호위해 드릴게요! 안 그래도 요즘 이라네리아 공주님이 타솔라만 데리고 다니셔서 심심하던 차였거든요.”
“어…….”
“지시스, 가자!”
플로레타와 포넨트는 미론에게 휩쓸려 마차에 올랐다.
같이 탄 시종이 포넨트에게 외투를 입혀 주며 물었다.
“어디로 가라고 할까요?”
포넨트는 대답하는 대신 옷을 마저 입으며 플로레타에게 속삭였다.
“어떡하지?”
시종이 이번에는 플로레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시종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 두꺼운 망토를 걸치며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포넨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샤마흐 신전으로 가자.”
시종이 마부에게 말을 전했다. 마차가 덜커덩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플로레타가 포넨트에게 딱 붙어 앉았다.
“……괜찮은 걸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 말 안 하지 않을까?”
“그렇겠지……? 쓸데없는 짓 했다고 리아한테 혼나면 어떡해. 무섭단 말이야.”
“무, 무섭기는! 그 쪼꼬만 게 뭐가 무섭냐?”
“포넨트. 손 떨고 있어.”
“이건, 이건, 추워서 그런 거야.”
“포넨트. 이마에 땀.”
“식은땀이야!”
자존심 때문에 잔뜩 허세를 부렸지만 포넨트도 제 막냇동생이 무서웠다.
이라네리아의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하고 있으면 속이 다 파헤쳐지는 것만 같았다. 무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포넨트는 제 팔뚝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요즘엔 엄마보다 더 어른 같아.”
플로레타가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이고 어물어물 말했다.
“키네샤도 좀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
“둘이서만 어른들이 하는 일을 상의하니까.”
둘이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키네시아도 이라네리아의 영향을 받아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았다.
이라네리아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번 게텔린 부인의 헌납금 문제도 키네시아가 처리했다고 들었다. 왕의 집무실에는 키네시아의 자리가 생겼다.
룩소르의 자식들 중 정무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도 키네시아가 유일했다.
혼자 어른이 되게 둘 순 없다. 빨리 쫓아가지 않으면 키네시아 혼자 또다시 무거운 짐을 지게 될 것이다.
“이번 일을 해결해서 신뢰를 얻자. 그러면 우리고 낄 수 있을 거야.”
“나는 안 끼워 줘도 괜찮은데…….”
안타깝게도 플로레타의 목소리는 도착했다는 마부의 말에 묻히고 말았다.
포넨트는 마차가 완전히 서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갔다. 플로레타가 울음 섞인 한숨을 내쉬고 주섬주섬 포넨트를 따라갔다.
지시스와 미론, 시종도 그들의 뒤를 쫓았다.
갑자기 여러 사람이 신전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나자 샤마흐 신전에 남은 마지막 신관이 놀라 기도실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신관님, 혹시 보라색, 아야!”
포넨트의 옆구리를 꼬집어 말을 막은 플로레타가 목소리를 낮춰 그의 행동을 나무랐다.
“포넨트, 대뜸 용건부터 말하면 어떡해 인사부터 해야지.”
옆구리를 문지르고 있는 포넨트를 대신해 플로레타가 앞으로 나섰다.
“저……. 안녕하세요. 저는 플로레타 벨로아스, 이쪽은 제 오빠인 포넨트 벨로아스예요. 뒤에는 호위 기사와 시종이고요.”
“공주님과 왕자님이셨군요.”
“네.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서서 이야기하지 마시고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플로레타가 먼저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포넨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시종과 지시스, 미론을 문밖에 세워 두고 그녀를 따라갔다.
신관이 이가 빠진 찻잔에다가 차를 내오며 탁자 앞에 앉았다. 오래된 의자가 삐걱거리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신관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미소 지었다.
“많이 누추합니다.”
포넨트는 끄덕여지려는 고개를 겨우 고정하고 찻잔을 내려다봤다.
궁전보다 사정이 안 좋은 곳이 있었다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포넨트가 동질감을 느끼며 찻잔을 만지작거리는데 신관이 먼저 운을 뗐다.
“제게 묻고 싶으시다는 게 뭘까요?”
“아! 그게.”
포넨트가 정신을 차리고 용건을 꺼냈다.
“혹시 보라색 태양을 상징으로 쓰는 종교에 대해 알아? 이름이 레, 레, 레크레이션?”
“레그레시오.”
플로레타가 조용히 포넨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포넨트가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 그런 이름이었는데.”
신관은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단인 듯한데……. 죄송하지만 제가 아는 이단 중에는 없습니다. 게다가 죽음을 상징하는 보라색과 샤마흐 신을 상징하는 태양이라니 불길하군요.”
마치 명맥이 거의 다 끊긴 샤마흐 교단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은가.
신관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이교도에 대해서는 왜 궁금해하시는 겁니까?”
“그냥. 동생이 찾길래. 아! 걔도 여기 왔었다고 하던데.”
“공주님이요?”
“응. 10살쯤 된 꼬마인데.”
“아! 기억납니다.”
신관은 한 달 전에 와 제 속을 긁었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신성력인지 마력인지 모를 모호한 것을 온몸에 두르고 성수를 찾기에 악령이 깃든 줄 알았는데, 공주였다니.
“그분께서는 잘 계십니까?”
“너무 잘 지내서 탈이지.”
포넨트의 말에 신관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아는 게 없지만 도서관에는 유용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플로레타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이미 일주일 동안 시달릴 대로 시달렸다.
더는 보라색 태양인지 뭔지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신관의 시선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원하신다면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열어 줘!”
포넨트가 열정적으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