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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45화 (45/151)

<45화>

그는 여전히 겁먹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사는 나라의 근간이니. 너희와 왕비도 지켜야 하고, 백성들을 지키는 데에도 군사는 필요할 터. 바로 세울 때도 되었지. 일을 맡길 사람은 생각해 두었느냐?”

“아니.”

옆자리에서 키네시아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정말?”

“그럼 뭐, 다 준비해 놓고 통보하는 건 줄 알았니?”

“응. 허락 안 하면 몰래 진행하거나 협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매우.”

……나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야?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위대한 황제의 행동을 예견해 내다니.

역시 내가 고른 인재다워.

기특한 마음에 키네시아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동그랗게 변하는 황금색 눈동자를 뒤로하고 룩소르에게로 몸을 틀었다.

“일단 군대는 은밀하게 키우는 게 좋겠어. 그리고 일을 맡길 사람은……. 제 발로 찾아올걸?”

“비밀리에 군사력을 모으는 것이면 극비로 다뤄야 할 텐데 어떻게 사람이 제 발로…….”

룩소르의 말을 끊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손을 휘저었다.

룩소르가 허락하자 하먼을 따라 나갔었던 꼬질이 한 명이 들어왔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품에 왕가의 인장이 찍힌 보물 상자를 들고 있었다.

꼬질이는 보물 상자를 집무실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 돌아왔다.

“전하께서 하사하여 주신 것을 다시 헌납하고자 왔습니다.”

“왜 그러는 겐가? 혹여 부담스러워 거절하는 거라면 그러지 말게. 다들 국가 재정이 힘들 때 보태어 준 것을 아네. 그 덕에 그대들마저…….”

룩소르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지그시 내리감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꼬질이가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게 아닙니다. 다만, 아직 이런 것을 받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때가 아니라니.”

“전하께서 나라를 바로잡고자 마음을 먹으셨으나, 아직 국고의 사정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돈은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보태고 싶습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상자에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룩소르가 받아 주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룩소르 역시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이 대치하자 집무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턱을 괴고 기다리다가 꼬질이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꼬질이가 잠시 움찔하더니 대답했다.

“반겔레스 셰피오입니다.”

“반겔레스 셰피오. 흠……. 직위는?”

“자작입니다.”

나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양손으로 보물 상자의 손잡이를 잡았다.

낑낑거리며 끌고 오는데 룩소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말리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리아! 국왕이 하사한,”

“왔네.”

“응?”

말을 툭 끊자 룩소르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보물 상자를 놓고 손가락으로 셰피오 자작을 가리켰다.

“여기 왔잖아. 일을 맡길 사람.”

반겔레스가 외국어로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에 껴 있는 사람처럼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보석 상자를 반겔레스에게 들게 하고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내가 데려간다.”

“잠깐, 리아. 파라돈 황자에 대한 거는……!”

“나중에.”

키네시아가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룩소르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리아, 어딜 가는 게냐! 리아야!”

“전하 험담하러!”

“나, 나를? 나를 왜……. 정말이냐, 리아야? 응?”

룩소르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반겔레스를 질질 끌고 나왔다. 그리고 사람이 안 보이는 곳에서 아무 방에나 들어갔다.

그를 방 한가운데에 앉혀 놓고 나자 얼추 눈높이가 맞았다.

“셰피오 자작. 집안이 어렵다고?”

“그렇습니다만,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경은 안 써. 그냥 왜 자신의 처지보다 왕실 사정을 우선시하는지가 궁금할 뿐이지.”

“충성하기로 한 곳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데 이유가 있겠습니까?”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위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전하께는 왜 충성해? 사실 그렇게 권위 있는 왕은 아니잖아.”

반겔레스의 눈썹이 조금 치켜 올라갔다.

화난 게 분명해 보이는 표정임에도 그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공주님. 아버지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왜?”

“제게는 아주 작은 영지가 있습니다. 고작 800명이 사는 아주 작은 곳입니다. 이제껏 가문의 역사를 보아도 그 땅에 관심을 주는 군주는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전하는 관심을 주었고?”

“그 정도가 아닙니다. 가뭄이 들어 영지민이 모두 굶어 죽게 생겼을 때 도움을 요청했더니, 전하께서는 망설임 없이 옥좌의 보석과 집무실 앞의 샹들리에를 팔아 제 영지민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전하는 성군이십니다.”

아니, 룩소르는 무슨 행복한 왕자야? 아니지. 이 경우에는 행복한 국왕인가.

그냥 내버려두면 제 옷까지 팔아다가 불쌍한 놈에게 주고 자기는 벌거벗고 다니겠네.

한숨을 내쉬며 셰피오 자작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쓸 만한 놈이 사실은 앙상한 샹들리에의 원수였다니.

아니지. 아니야. 차라리 잘 되었다. 부려 먹어도 양심의 가책은 없을 테니까.

“그래. 그대의 진심은 알겠어.”

치켜 올라갔던 눈썹이 그제야 제자리로 내려왔다.

시킬 일이란 게 뭔지 궁금할 텐데 그는 먼저 묻지 않았다.

일단 인내심은 괜찮은 것 같다.

룩소르를 생각하는 마음도 갸륵하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쉽게 믿을 만한 게 아니지만 간혹 이런 별종도 있는 법이다.

욕심도 별로 없고 충성심과 의무감이 먼저인 사람.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

“백작이 생각하기에 다음 왕은 누가 될 것 같아?”

기껏 펴졌던 표정이 반겔레스의 표정이 다시 구겨졌다.

“국왕 전하께서 버젓이 왕위를 지키고 계시는데 그런 불손한…….”

“전하가 백 년 만년 그 자리에 있겠어? 혹시 알아? 왕노릇하는 거에 질려서 양위하고 시골로 내려갈지.”

나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팔걸이를 양손으로 잡고 눈을 맞추자 그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뺐다.

“말해 봐. 누가 왕이 될 것 같은지.”

“키네시아 공주님이 되실 것 같습니다.”

“왜? 게텔린 백작을 몰락시킨 게 혹시 키네시아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닙니다.”

“그럼 내가 더 낫지 않아?”

“이라네리아 공주님께서는 왕이 될 생각이 없어 보이십니다.”

정곡을 찔렸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뒤로 물러났다.

의자를 끌어와 반겔레스와 마주 앉으며 다시 한번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망설임 없이 제 생각을 입 밖으로 냈다.

“공주님께서는 위험을 자처하고 나서셨으나 정작 이름을 내세울 때는 물러나셨습니다.”

“그랬지.”

“지금은 귀족파를 숙청하고 지위를 견고히 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전면에 키네시아 공주님을 세우고 수습을 모두 맡기셨습니다. 왕당파 귀족들의 지지를 포기하시면서까지 말입니다.”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거린다. 궁전에는 영 쓸모없는 것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머리가 제법 잘 굴러가네. 그런데 왜 여태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야?”

“국왕 전하께서 평화를 원하셨습니다.”

마지막 대답까지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인물상과 일치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긴장한 기색을 보이며 나를 조금 올려다봤다.

“반겔레스 셰피오.”

“예, 예. 공주님.”

“100년만 일찍 태어나지 그랬어. 아니, 120년. 그럼 참 예뻐해 줬을 텐데.”

“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고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대가 국왕 전하를 위해 군사를 좀 키워 줘야겠어.”

***

“뭐 좀 찾았어?”

로그리예가 서재 안으로 들어오며 제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전혀.”

포넨트는 대답하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플로레타는 더위 먹은 강아지처럼 엎드린 채 녹아 있었다. 로그리예는 키득거리며 플로레타를 쿡쿡 찔렀다.

움찔거리던 플로레타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포넨트. 그만 찔러…….”

로그리예는 웃음을 꾹 참고 플로레타를 계속 찔렀다.

플로레타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가 로그리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저를 보고 있는 게 누군지 순간적으로 깨닫지 못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후다닥 벽 쪽으로 붙었다.

놀란 토끼만큼이나 빠른 속도에, 등에 부딪힌 책장이 흔들거리며 큰 소리를 냈다.

그러나 포넨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로그리예가 포넨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어?”

플로레타가 책장에 등을 붙인 채로 꿈지럭거려 몸을 숨겼다.

“일주일은 안 됐어요. 그런데 밥만 먹고 책만 읽어서…….”

“난 태어나서 포넨트가 책을 저렇게 많이 읽는 거 처음 봐.”

“저도요. 운동을 저렇게 하는 건 봤어도…….”

그녀는 한 박자 늦게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새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책장 너머로 조금 삐져나와 있던 몸이 다시 쏙 들어가 감춰졌다. 로그리예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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