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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44화 (44/151)

<44화>

***

게텔린 백작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형되었다.

……사실 모두가 보는 앞은 아니었다.

룩소르가 나와 다른 왕자 공주들을 형장에 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나 죽이려던 놈 지옥 가는 꼴 좀 보려고 했더니.”

툴툴거리면서 기지개를 켜고 시계를 봤다.

곧 국무회의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타솔라가 자연스럽게 내 뒤로 따라붙었다.

나는 설렁설렁 걸어 집무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서 있자 귀족들이 한 번씩 나를 훑어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네시아가 룩소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오늘 회의, 나도 들어갈래.”

“회, 회의를 말이냐?”

“응.”

룩소르는 당황스럽고도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걱정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내가 또 돌발 행동으로 적을 만들고 위험에 빠질까 봐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데에는 감이 좋단 말이야.’

생각을 감추고 최대한 순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맞잡은 손을 늘어트렸다.

“얌전히 있을게.”

키네시아가 룩소르 옆에서 가증스러움에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불손하기는.

당연히 내 말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 편을 들어 주었다.

“전하. 리아가 있으면 회의가 편할 거예요.”

“키네시아 너마저 전하라고…….”

룩소르가 시무룩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락하마. 대신 리아. 보기만 해야 한다.”

내 머리로 뻗는 손을 쓱 피하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십 개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이렇게 적대적인 시선을 많이 받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좋아. 짜릿해.’

환하게 웃으니 키네시아가 의자에 앉으며 나를 보았다.

마치 책을 거꾸로 들고 읽는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괜찮은 거지?”

“무슨 의미야?”

“신나 보여서. 이제껏 그렇게 웃은 적 없잖아.”

그럴 리 없다는 투였지만 키네시아의 말이 옳다.

적의 분노는 최고의 찬사다.

내 계획에 휘말리거나 밀리고 있는데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러니 번쩍이들의 적대감 어린 시선에 신이 안 날 수가!

조금만 더 시선을 만끽하다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룩소르가 내 앞을 보호하듯 가로막았다.

‘얘는 왜 앞을 막고 난리래.’

그를 치워내기도 전에 시종이 의자를 가져왔다.

룩소르가 내 등에 손을 얹어 의자 쪽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회의실 의자라 그런지 높이가 좀 있었다.

나는 의자 앞에 서서 기어 올라가는 것과 누군가 들어 올려 앉혀 주는 것 중 뭐가 더 위엄있을까 고민하다가 손을 위로 뻗었다.

타솔라가 반사적으로 내 옆구리를 잡아 들어 올려 의자에 앉혀 주었다.

‘역시 길이 잘 들었어.’

만족스럽게 타솔라의 단단한 팔뚝을 토닥이고 룩소르를 보았다.

그는 키네시아에게 전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처져 있었다. 그 꼴이 마치 시든 잔디 같았다.

나는 그에게 빨리 시작하라고 눈치를 줬다. 그제야 룩소르가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하먼이 회의 시작을 알렸다.

법에 관한 이야기 몇 개가 지나가고 예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예전에는 이래야 된다 저래야 한다 잘만 말하던 번쩍이들이 오늘은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탈세한 게 드러날까 봐 그런 거겠지.’

정말 속이 빤히 보이다 못해 투명했다.

나는 조용해진 틈에 목소리를 냈다.

“별관을 재건했으면 하는데. 겸사겸사 궁전 내부도 수리하고.”

“확실히, 별관은 재건을 해야지. 언제까지 저렇게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말이다.”

룩소르도 내 말에 동의했으나 재상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게……. 예산 확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가 가져다 바친 돈이 얼마인데 예산 확보가 안 됐다는 말이 나와? 응? 그런 말이 어디서 나오는데?

쌍심지를 켜고 쳐다보자 하먼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한쪽에 얌전히 앉아 있는 번쩍이들에게로 향했다.

마치 저것들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고개를 홱 돌려 번쩍이들을 노려보자 그들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밀린 세금은 오기 직전 전부 납부하였습니다.”

“저도 납부를 마쳤습니다.”

다른 번쩍이들도 납부증을 내밀었다. 하먼이 종이를 하나씩 넘겨 보더니 미소를 겨우 감추는 표정으로 증서들을 룩소르에게 넘겼다.

룩소르가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번쩍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들 수고…… 윽!”

나는 룩소르가 말을 마치기 전에 탁자 아래로 발을 휘둘러 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기한 내에 납부해야 할 세금을 목에 칼이 들어올 때까지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뤘는데 뭐 잘한 일이라고 치하하려고 해?

노려보자 룩소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먼이 증서를 힐끔거리며 웃음이라도 터트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흠, 큼! 그럼 전문가에게 별관과 궁전 내부 수리 예산을 책정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게.”

룩소르의 허락을 끝으로 회의는 다른 내용으로 넘어갔다.

군사나 작위 수여에 관한 내용은 별게 없었다. 그 외에 다른 것들도 시시하기만 했다.

하품을 참으며 등받이에 기대 있는 사이 회의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사절단들은 어떻게 되었소? 남는다고 하던가?”

“레튜니아의 황자님과 호위 한 명, 파라돈의 사절단들을 제외하면 다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렇군.”

레튜니아에서도 황자가 와 있었나? 그런데 왜 한 번도 못 봤지?

어지간히 은둔 생활을 즐기는 놈인가 보다.

뭐, 그놈은 그렇다 쳐도…….

“파라돈 새, 흠! 파라돈 사절단들이 전부 남는다고?”

“예, 공주님. 무슨 문제라도…….”

외무대신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다른 귀족들의 시선 역시 내게로 향했다.

“아니에요.”

고개를 젓자 귀족들이 시선을 거두어 갔다. 키네시아만 빼고 말이다.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왜? 뭐 아는 거 있어?”

“나중에.”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바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가 끝났다.

귀족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룩소르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룩소르에게 할 말이 있어서 집무실에 남았다. 키네시아는 아까 한 질문에 답을 얻고 갈 생각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둘이 남아 있으니 하먼도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나가려던 왕당파 꼬질이들도 돌아와 한 자리씩 꿰차고 앉았다.

룩소르가 어쩐지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응.”

룩소르는 나쁜 소식을 듣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여러 번 깊게 심호흡을 했다.

“뭐 해?”

“마음의 준비를 좀…….”

“누가 보면 내가 맨날 폭탄선언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네.”

키네시아가 옆에서 놀란 목소리를 냈다.

“아니었어?”

이게 선조를 놀려먹으려고 하네.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는 사이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사자라도 마주한 것 같은 태도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흘렀다.

“뭐 잘못했어? 왜 이렇게 겁을 집어먹어?”

다들 이리저리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들을 구경하다가 룩소르에게 제안했다.

“일을 도와준 왕당파 여러분들께 상금을 하사하는 게 어때?”

“예?”

“괜, 괜찮습니다, 공주님.”

“맞습니다. 신하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누구는 엉덩이를 들썩였고 누구는 손을 거세게 내저으며 거부했다.

“왜 이렇게들 난리야. 누가 잡아먹는대? 준다면 그냥 받아.”

왕당파 꼬질이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고작 10살짜리에게 지나치게 겁먹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그들은 헛기침하며 움츠러들었던 몸을 폈다.

그러나 구겨진 체면은 펴지지 않았다.

“내 생각이야. 상벌은 확실해야 하니까. 전하 생각은 어때?”

“그래. 리아 네 말이 옳다. 상은 확실히 해야지. 그동안 못난 나를 보필하느라 다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자기가 못난 건 아는 모양이다.

아직 갈 길이 구만리인데 게텔린 하나 잡은 거로 유난은.

실소를 터트리는데,

“전하……!”

“크흡.”

내가 말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 튀어나왔다.

다들 감동한 표정이었다. 룩소르 역시 감정에 동화되었는지 울컥한 표정으로 꼬질꼬질한 귀족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씨구. 놀고들 있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키네시아마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청승 그만 떨고 빨리빨리 진행해.”

“여기 있는 자들에게 20억 핀나와 금괴 10개, 말 10필씩을 하사하도록 하겠네.”

여기저기서 감사하다느니 황송하다느니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물론 재상과 두 공주도 포함이네.”

“나는 필요 없어.”

“저는 괜찮아요.”

“저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룩소르가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들이 기특하구나. 재상. 하사품을 챙겨 주도록 하게.”

“예, 전하.”

재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문으로 향했다.

“다들 따라오십시오.”

나는 문을 나서는 꼬질이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다시 안 돌아와도 돼!”

꼬질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나와 룩소르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룩소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나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집무실에는 나와 키네시아, 룩소르만이 남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룩소르가 마음의 준비를 하듯 깊은숨을 내쉰 뒤 분위기를 바꿔 나를 보았다.

“이제 말해 보거라.”

“군대를 만들어야 해.”

“군대……라면 이미 기사단이 있지 않으냐?”

“그런 오합지졸 말고.”

나는 룩소르의 보라색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진짜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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