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나보고 폭군이래?-42화 (42/151)

<42화>

“왜 없어?”

“흐음…….”

그녀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미리 챙겨 온 돈주머니 하나를 탁자 위에 툭 올려놓았다. 로즈라가 그것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미소 지었다.

“100년 전, 렘브로스 왕인 바멜마흐 2세가 보낸 암살자들에게 로즈라들이 살해당했거든요. 어떻게 알았는지 정보 창고는 불태워졌고요.”

하여간 렘브로스는 도움이 안 된다니까.

“왜 그런 짓을 했는데?”

물어놓고 고개를 저었다.

“대답 안 해도 돼.”

‘로즈라’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 한 명씩 있으며 보통 집도, 가족도 없는 아이들을 훈련 시켜 ‘로즈라’라는 이름을 물려준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끝까지 명맥을 유지해 배곯는 아이들이 없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면 안전하다고 생각될 때까지 종적을 감춘다.

그 시기 동안은 활동하지 않으니 저 ‘로즈라’도 아는 게 없을 것이다.

“다행이에요. 저도 아는 게 없어서 물어보시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거든요.”

“그럴 것 같았어.”

나는 돈주머니 한 개를 더 꺼냈다.

“렘브로스는 필요 없고, 마지막으로 이라네 황제에 관한 것까지.”

로즈라가 미소 지었다.

“정말 많네요.”

돈이 많다는 건지 알아봐 달라는 게 많다는 건지 모를 말투였다.

“기간은……. 어디 보자, 여기에 없는 정보는 해외에서 가져와야 하니까, 8년 정도 걸리겠어요.”

“5년. 그 안에 가져와. 그것도 많이 기다려 주는 거야.”

“정말 호락호락하지가 않네.”

“레그레시오에 관한 건 발견할 때마다 보내 주고. 궁전에 사람 하나 정도는 심어 놨지?”

그녀가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긍정의 미소였다.

***

이제 막 하늘에 푸른 기가 돌기 시작한 새벽, 지시스는 언제나처럼 일찍 일어나 연무장을 돌고 있었다.

조금 늦게 일어난 미론이 합류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타솔라가 안 보이네? 어디 갔지?”

타솔라는 기사가 되고 난 후, 체력단련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른 기사들이 농땡이를 피울 때도 타솔라는 정해진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아침에 나오지 않다니. 미론은 연무장을 돌며 타솔라의 방 창문을 쳐다봤다.

“문은 두드려 봤어?”

지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기척이 없었어.”

미론 곡선을 그리며 뛰어 방향을 바꿨다.

그대로 생활관을 향해 달리려는데 연무장으로 오는 타솔라가 보였다. 미론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 몸을 푸는 타솔라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물었다.

“밖에 다녀와? 이 시간에?”

타솔라는 이라네가 도박장에 간 것을 말해도 되나 고민했다.

‘미론과 지시스에게는 말해야 될 것 같긴 한데…….’

미론, 타솔라, 지시스. 세 사람은 평민 출신이었다.

에피파네스는 이미 부정부패와 귀족의 횡포가 만연했던 터라 기사 작위도 돈으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평민은 매우 드물었다. 있다고 해도 귀족 출신인 기사들에게 외면당했다.

평민들은 오직 실력만으로 기사가 되었으나, 아무리 실력이 좋고 성실해도 높은 자리까지는 올라가지 못했다.

명예를 위해 기사가 된 자들은 남았다. 그러나 신분 상승을 꾀했던 자들은 좌절하고 돌아갔다.

남은 기사 중 완전한 평민은 미론과 타솔라, 지시스뿐이었다.

출신지는 달랐으나 그들의 고향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국경 지대에 있어 약탈과 전투가 끊이질 않았다는 것이다.

나라가 부강했다면 겪지 않았을 일들. 그 일로 피해받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수도로 올라와 기사가 되었다.

그래서 훈련을 빼먹지 않고 실력을 길렀으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왕족들은 국왕 일가는 존경할 만한 인품을 지녔으나 순진하고 유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막내 공주만은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근에 갑작스럽게 두각을 드러냈다.

이라네리아는 귀족파 수장을 숙청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노력과 실력을 알아보고 호위로 삼았다.

세 사람은 이라네리아 공주라면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분을 모시고 도박장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

아니. 그래서 더 해야 하나?

그녀가 고민하고만 있자 연무장을 돌던 지시스가 미론의 뒤로 합류했다.

“공주님 일?”

타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론이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럽다. 나도 공주님 호위하고 싶어.”

지시스가 미론의 다리를 훌쩍 뛰어넘으며 타솔라 주위를 계속 빙빙 돌았다.

그러다 타솔라가 뛰기 시작하자 그 뒤를 따라갔다. 미론도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그래서 어디 다녀온 거냐니까? 공주님 또 뭘 하신대?”

타솔라는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시스가 미론을 어깨로 툭 쳤다.

“기밀일 수도 있잖아.”

“공주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러진 않았다.

타솔라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만약의 일이라는 게 있기에 타솔라는 목소리를 낮췄다.

“공주님께 우리 미래를 맡겨도 될지 모르겠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공주님이……. 도박장에 다녀오셨어.”

“뭐?!”

놀란 미론이 우뚝 멈췄다. 지시스도 마찬가지였다. 타솔라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보았다.

세 사람은 엉겁결에 머리를 맞대고 둥글게 서게 되었다.

멀뚱히 서로를 보는데 지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10살짜리 공주님이 도박장을 어떻게 알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심지어 그냥 아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능숙하게 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이라네리아 입장에서는 매우 헤맨 것이지만 타솔라의 눈에는 여러 번 다녀 본 사람의 걸음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떻게 도박장을 알아냈는지는 모르기에 타솔라는 고개를 저었다.

미론이 별안간 홱, 고개를 돌렸다.

“근데 왜 이제야 와? 몇 시에 나갔는데? 설마 공주님이 도박장에서 노시도록 내버려 둔 거야?”

“내가 따라 들어갈 수가 없었어. 거리를 두고 호위하라고 하셨는데, 술집 같은 곳에서…….”

“공주님이 술집에 들어가시도록 뒀다고?”

타솔라가 이마를 짚었다.

미론이 세상에서 제일 몰상식한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타솔라에게서 멀어졌다.

지시스도 조용히 타솔라와 거리를 벌렸다.

타솔라는 억울하다는 눈으로 둘을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그래. 공주님이 아무리 특출나셔도 도박을 좋아하면 결국 나라의 운명도 운에 맡기게 될 거야. 물론 한 번 도박장을 찾으신 걸로 도박을 좋아한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지. 호기심 때문에 가 보신 것일 수도 있잖아.”

“아니면 도박장에 누굴 만나러 갔다던가.”

미론과 지시스도 말을 보탰다.

다른 의견을 듣자 혼란스러웠던 타솔라의 생각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실망스러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그래도 조금 더 지켜보자. 우리의 주군으로 모셔도 될 만한 분인지.”

만약 주군으로 모신다면 목숨을 바쳐야 할 테니까.

덧붙이지 않아도 미론과 지시스는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

다행히 밤에 몰래 빠져나갔던 건 들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외출 금지가 풀린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며칠 동안 오틸리에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다. 그녀는 왕국의 행사를 주최하고, 귀빈들을 대접하고, 사교 모임에 나갔다.

덕분에 중요한 정보는 많이 얻었다.

주요 귀족들의 얼굴이나 이름, 누구를 가까이하고 누구를 적대하는지, 게텔린 백작 부인이 밀려나자 누가 세력을 잡았는지, 기타 등등.

하지만 그런 정보를 수집하는 건 오래 걸리는 게 아니었다.

오래전에 파악이 끝났기에 지금은 하품이나 하면서 앉아 있는 게 다였다.

“지루해.”

발끝을 까딱거리다가 키네시아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 플로레타하고 포넨트가 안 보이네. 너도 종종 방에 없고. 나만 빼놓고 작당 모의라도 하는 거야?”

“작, 작당 모의?”

“하는 중이구나. 작당모의.”

“아니야. 나는 그냥 바빠서……. 걔네도 각자 할 일 하고 있겠지.”

“바쁘긴. 너희가 밥 먹고 노는 거 빼고 할 일이 뭐 있다고.”

정곡을 찔린 표정으로 키네시아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모의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키네시아는 내가 집요하게 캐묻거나 유도 신문으로 알아낼까 봐 긴장하는 것 같았다.

불쑥 청개구리 심보가 치솟았다.

‘좀 놀려 봐?’

몸을 키네시아 쪽으로 트는데 더 흥미로운 주제가 귀를 사로잡았다.

“저거, 게텔린 백작 부인 아니에요?”

며칠 만에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게텔린 부인을 보며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간사하게도 그녀에게 다가가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게텔린 부인이 차를 마시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한번 쭉 둘러봤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 쪽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게텔린 백작 부인을 비웃고 있었다.

그리고 한때 백작 부인에게 들러붙었던 사람들은 시선을 피하거나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게텔린 백작 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나와 오틸리에, 키네시아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전하. 곁에 앉아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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