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정신을 깨우기 위해 볼을 두드리고 통로로 들어갔다.
아래층 천장과 위층 바닥 사이에 좁은 틈을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원래는 몸이 꽉 낄 정도로 비좁아서 겨우겨우 기어 다녔었는데. 지금은 10살의 몸이라 그런지 움직이기 훨씬 수월했다.
‘이건 마음에 드네.’
어차피 갈림길은 없기에 거침없이 기어나갔다.
통로의 끝은 인적이 드문 계단 안쪽, 텅 빈 부분과 이어져 있다.
문이 안쪽에서만 열리도록 설계되어 있기에 누군가 이쪽으로 침입할 위험은 없었다. 다만 나갈 때는 조금 조심해야 했다.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으면 들킬 수도 있었다.
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인기척을 살피다가 밖으로 나왔다.
하인들이 이용하는 문을 통해 본관을 나오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여전히 경비가 허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사단도 한번 싹 뜯어고쳐야 하는데.’
일단 다녀와서 생각하자.
잡념을 털어 내고 정원수의 그늘에 숨어 연무장 쪽으로 이동했다.
기사들이 생활하는 곳은 오히려 사람이 더 없었다. 경비도 보이지 않아 당당하게 생활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타솔라의 방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안에서 검을 빼 드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내가 고른 놈이라 그런지 쓸 만하다니까. 흐뭇한 마음에 친히 창문을 열어 주었다.
“나와.”
“공주님?”
“쉿. 조용히 따라와.”
타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망토를 두르고 검을 챙겨 창문을 넘었다.
“말 꺼내 와.”
“이 시간에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밖에. 빨리.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너무 위험합니다.”
“호위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럼 호위를 더 데려가십시오. 미론과 지시스를 깨워오겠습니다.”
세 명이나 달고 가긴 좀 번거로운데.
나는 타솔라를 빤히 보았다.
“왜? 실력에 자신이 없어서 그래?”
“도발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안 통하네.
“그럼 어쩔 수 없지.”
혼자 나가는 수밖에. 포기하는 척 몸을 돌렸다. 타솔라를 등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창문을 닫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봤다. 타솔라가 고민하는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몸을 돌려 팔짱을 끼고 마주 보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 창문을 넘어왔다.
“뭐야? 왜 따라와?”
“호위하겠습니다.”
“갑자기?”
“어떻게든 혼자 나가실 것 같아서요.”
“제법 눈치가 빨라. 그럼 그렇게 해.”
타솔라가 짧게 대답하고는 곧 말을 끌고 왔다.
양손을 번쩍 들자 그녀가 익숙하게 나를 말 위에 앉혔다.
“뒤 말고 앞에 타.”
“예.”
타솔라가 안장에 앉았다. 나는 타솔라의 망토를 끌어와 머리 위로 덮었다.
망토가 휘날릴 정도로 빠르게 달리지 않으면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출발해.”
타솔라는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천천히 말을 몰았다.
궁전 정문을 지킨 경비를 통과하고 난 뒤에도 한참 뒤에야 그녀가 속도를 높였다.
나는 펄럭이는 망토 너머로 풍경을 바라보다가 광장에 들어선 걸 확인하고 타솔라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멈춰.”
내가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그녀가 눈치껏 여관의 문을 두드려 말을 맡겨 두고 왔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광장은 휑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좀 걷다가 타솔라에게 미리 지시했다.
“이제부터 뒷골목으로 갈 거야. 내가 어딜 가든 일행이 아닌 척해. 혹시 내가 누굴 따라갔다가 해가 떠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기사들을 이끌고 와. 알겠지?”
“저를 두고 가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럼 호위는…….”
“괜찮아. 위험한 곳은 아니야.”
타솔라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무너진 건물에 깔릴 뻔 하신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야. 싫으면 궁전으로 돌아가.”
타솔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따라왔다.
발뒤꿈치를 최대한 들어 타솔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꼬이고 꼬인 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점점 발이 아파 왔다.
‘이제 슬슬 보일 때가 됐는데.’
이미 역사가 유구한 단체이니 10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내 착각인가?
슬슬 지치기 시작할 즈음 다섯 개의 속눈썹이 붙은 눈 모양이 그려진, 손바닥만 한 간판이 보였다.
“찾았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안에서는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타솔라에게 눈짓한 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술을 마시며 떠들던 사람들이 문 열리는 소리에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나는 침묵을 가르며 바로 향했다.
유난히 높은 의자를 등반해 엉덩이를 붙이자 바 너머의 사람이 말을 걸었다.
“아가. 아빠 찾으러 왔니? 아니면 엄마?”
그 말을 기점으로 다시 내부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애기야, 우쭈쭈. 이리 와 봐. 아줌마가 맛있는 거 줄게.”
“그냥 둬도 되는 거야? 주인장. 빨리 내보내라고.”
“그래. 부모님 찾아서 보내. 아직 여기 오려면 10년은 이른 것 같은데. 더 커서 와야지.”
“나 저만한 애 처음 봐. 술 맥여 볼까?”
술 맥여 볼까 누구야!
고개를 홱 돌려 노려보자 성깔 있다며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문이 열리며 타솔라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잡은 것을 확인하고 다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바 너머의 사람들을 훑어봤다.
종업원들 중에 유독 한 여자가 눈에 띄었다.
굵게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 눈웃음과 분위기가 고혹적인 여자였다.
그러나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그녀의 외모가 아니라 귀에 달린 눈 모양의 귀걸이였다.
나는 구태여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야?”
“로즈라.”
로즈라가 나긋하게 대답하며 맥주잔에 물을 가득 담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물을 마시지 않고 쳐다만 보자 그녀가 바에 기대 턱을 괸 채 대놓고 나를 관찰했다.
“길이라도 잃었니?”
“아니. 뒤쪽 벽에 걸 게 있어서 찾아왔어.”
내 말에 다시 내부가 조용해졌다. 로즈라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돈은 있고?”
나는 컵에 든 물을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빈 잔에 보석을 가득 채워 로즈라에게로 밀어 주었다.
“어머.”
로즈라가 활짝 웃으며 보석이 가득 담긴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따라오세요, 고객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로즈라!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그렇지 애를 도박장에 들여보내려고? 제정신이야?”
“나이가 대수야? 암호을 알고 걸 게 충분하면 들어가는 거지.”
로즈라가 바의 문을 열어 주며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바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로즈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쇠로 안쪽에 있는 문을 열며 소리쳤다.
“시끄럽게 굴면 다 내쫓을 줄 알아! 이 시간에 술 마실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는 거 알지?”
언제 무서운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로즈라가 표정을 상냥하게 바꾸며 비켜섰다.
“들어가세요, 아기씨.”
안으로 들어가자 왼쪽에는 방문이, 오른쪽에는 이상한 그림들이 늘어선 복도가 나왔다.
‘여긴 100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네.’
새삼스레 안을 둘러보는데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로즈라가 앞장서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통로를 반쯤 지났을까, 그녀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아기씨는 여기에 뭘 걸 생각이야?”
“귀와 눈.”
로즈라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봤다.
내가 알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인지 가늠해 보는 눈치였다.
물론 나는 알고 하는 소리였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를 술집으로 위장한 도박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도박장까지가 위장이다.
여기는 100년, 아니 이제는 200년이겠구나. 어쨌든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 온 정보상이다.
물론 저 눈 모양 귀걸이를 한 여자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턱짓으로 로즈라가 들고 있는 맥주잔을 가리켰다.
“그건 선수금.”
그 말을 하자 로즈라가 바로 옆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로즈라가 따라 들어오며 문을 잠갔다.
“도박장 손님이 아니었네.”
“내가 공주인 거 알고 있었잖아. 아기씨라고 불렀으면서 너스레는.”
후드를 뒤로 넘기며 대답하자 로즈라가 나를 소파로 안내했다.
“보통내기가 아니시네요.”
“너야말로. 왜 내 얼굴을 알고 있어? 누가 나에 대해 조사하라고 시켰어?”
“왕족의 얼굴을 외우는 건 당연한 일이죠. 이래 봬도 정보상인데.”
그녀가 나와 마주 앉으며 그 사이에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원하시는 정보가 뭔지 들어 볼까요?”
“좀 많은데.”
그녀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많아 봤자 얼마나 많겠느냐는 태도였다.
“먼저 레그레시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모아 주면 좋겠어. 보라색 태양 표식을 많이 사용하는 종교 단체인데, 목적이 뭔지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본거지가 어딘지, 기타 등등.”
“어렵지 않네요.”
“그리고 100년 전 인물인 펠리온 리베든 백작, 샤마흐 교의 성(聖) 라파일, 에피파네스 2대 황제인 율시안에 관한 것도 최대한 많이. 이라네 황제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소실된 역사를 알아보는 건 까다로운 일이라, 돈도 시간도 더 많이 드는데요.”
“자료를 모아두는 창고가 따로 있는 거로 아는데? 거기에도 없어?”
로즈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런 것도 아세요?”
그런 것은 물론 ‘로즈라’라고 불리는 이 정보상의 대략적인 구조와 설립 목적까지도 안다.
내가 황제였을 때는 제법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었으니까.
“모르면 오지도 않았지.”
“보통 모르고 오시던데.”
“말 돌리지 말고. 모아둔 정보 없어? 큰 사건은 기록해 둘 거 아니야.”
그녀가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안타깝게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