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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40화 (40/151)

<40화>

***

이라네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포넨트는 엿듣고 있다는 것도 잊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했다.

키네시아가 냉큼 포넨트를 뒤에서 붙잡았다. 입이 막힌 채 뒤로 끌려가며 포넨트가 버둥거렸다.

“너, 읍! 으음! 으부붑!”

키네시아는 눈치 빠른 이라네리아가 그들의 기척을 알아챘을까 걱정스러워 연신 문 쪽을 힐끔거렸다.

다행히 문이 벌컥 열리며 호통이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포넨트를 더 끌어당겨 복도 벽에 등이 닿을 정도로 한참을 물러났다.

멀찍이 서 있던 도라가 그들을 힐끔거렸다. 도라와 눈이 마주친 플로레타가 몸싸움하는 포넨트와 키네시아에게로 주춤주춤 다가갔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그제야 포넨트가 조금 잠잠해졌다.

키네시아가 몸에 힘을 빼자 포넨트가 성난 말처럼 투레질해 그녀의 손을 떨쳐 냈다.

“너네는 저 소리를 듣고도 그래? 게텔린은 리아를 죽이려고 했던 놈이잖아. 그런 놈의 부인에게 뭐? 뭘 어째? 거래? 도대체 보라색 태……, 읍! 으읍!”

키네시아가 다시 포넨트의 입을 뒤에서 틀어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있는 쪽을 힐끔거리고 있던 도라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포넨트의 말을 막은 건 거의 본능적인 일이었다.

‘안쪽은 왜 엿듣고 있었던 거지?’

세 사람은 이라네를 찾으러 로그리예에게 다녀오다가 게텔린 백작 부인이 궁전에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먼발치에서 본 것이라 하인들에게 물어 부인이 이라네리아의 방으로 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복도에 도착했을 때, 키네시아는 도라가 문 바로 옆에 서 있는 걸 보았다.

그녀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라면 수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겠거니 싶었을 텐데, 이라네리아에게 의심병이 옮기라도 한 것인지 도라의 행동이 수상해 보였다.

키네시아는 의도적으로 도라를 멀리 떨어져 있게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금처럼 계속 세 사람 쪽과 문을 힐끔거렸다. 흘린 빵 쪼가리라도 주워 먹으려는 생쥐처럼 말이다.

생각에 빠져 있는데 플로레타가 키네시아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키네샤! 포넨트 죽겠어!”

키네시아가 깜짝 놀라며 손을 풀었다.

그제야 포넨트가 공기를 훅 들이마시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진정되자마자 곧장 키네시아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야! 코까지 같이 막으면 어떡해! 죽고 싶, 아니 죽이고 싶냐?!”

“미안해. 괜찮아?”

키네시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포넨트가 흔드는 대로 흔들려 주었다.

그러는 사이 문이 열리며 게텔린 부인이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세 사람에게 잠시 시선을 준 뒤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키네시아가 옅게 한숨을 내쉬며 책망 어린 눈으로 포넨트를 보았다.

“뒷부분을 못 들었잖아.”

“직접 물어보면 되지.”

포넨트는 성질대로 곧장 방문을 열었다.

이라네리아가 퍽이나 알려 주겠다고 생각하며 키네시아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플로레타는 얼떨결에 언니와 오빠에게 휩쓸렸다.

이라네리아는 우르르 굴러들어온 꼬질이들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 뭐야? 엿듣고 있었어?”

“너 또 뭘 꾸미고 있는 거야?”

“문부터 닫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플로레타가 잔걸음으로 뛰어가 문을 닫고 돌아왔다.

키네시아가 소파에 앉으며 이라네리아에게 물었다.

“게텔린 부인하고 무슨 이야기 했어?”

“다 들었으면서 뭘 묻고 그래?”

“뒷이야기는 못 들었어.”

“설명하기 귀찮아.”

말이 끊어진 사이 포넨트가 소리 지르려는 듯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붙잡았다.

“도대체 보라색 태양은 왜 찾는데?”

키네시아도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게 뭐길래? 혹시 이라네리아의 몸에서 나가려는 걸까? 그러면 우리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지?’

키네시아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이라네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키네시아의 정수리를 툭툭 다독였다.

“별관이 불탄 거랑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그렇지. 그것보다, 이거 로그리예에게 전해 줘.”

침대 옆 협탁의 서랍을 연 이라네리아가 키네시아에게 연고 통을 던졌다.

키네시아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았다. 전보다 가벼워진 것 같아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연고는 아르만에게 발라 주었을 때보다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왜 이거밖에 안 남았어? 어디 다쳤었어?”

“아니.”

이라네리아가 침대에 앉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플로레타가 잠시 제 동생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키네시아의 옆에 바짝 붙었다.

“신성력이 깃든 연고야?.”

“단번에 알아보네?”

이라네리아가 제법이라는 표정으로 플로레타를 보았다.

플로레타가 제 동생의 칭찬에 수줍은 미소를 짓는 사이, 이번엔 포넨트가 키네시아 옆으로 와 연고 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뭔가 번뜩 떠오른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고 일그러져 있었다.

“너 설마 독을 마시고도 멀쩡했던 이유가……, 이 연고 덕분이야?”

“맞아. 아르만을 데리고 다닐 때부터 물에 연고를 조금씩 타서 마셨어. 그래야만 불시에 독을 먹더라도 중화시킬 수 있으니까.”

플로레타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크게 떴다. 맑은 보라색 눈동자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충격을 받은 건 키네시아와 포넨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라네리아가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며, 이제껏 두 사람은 이라네리아가 아르만과 말을 맞추고 독을 먹은 척만 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짜 마신 것이었다니.

포넨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어가면서 위험하게!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내가 바보야? 그 정도도 계산 못 하게? 외출 금지당해서 기분 안 좋으니까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

이라네리아는 듣기 싫다는 듯 뒤로 누우며 손을 내저었다.

키네시아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이라네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그제야 이라네리아가 말한 ‘자비를 베풀었다.’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라네리아는 결국 아르만을 믿지 않았다. 그의 배신을 확신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정착할 돈과 아버지를 구할 방법을 알려 주었다.

“리아 피곤하다니까 쉴 수 있게 가자, 얘들아.”

“넌 저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죽을 뻔한 거잖아!”

포넨트가 노발대발하고 플로레타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이라네리아는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키네시아는 그녀에게 쉬라고 인사한 뒤 동생들을 추슬러 나갔다.

포넨트는 이라네리아의 방에서 한참 멀어진 뒤에도 씩씩거렸다.

보다 못한 키네시아가 포넨트에게 냉정하게 현실을 일깨워 줬다.

“리아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음 표적은 내가 됐을 거야. 아니면 너나 플로레타였을 수도 있어. 우린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해.”

“그게 언니라는 사람이 할 말이야?”

포넨트의 일갈에 키네시아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흥분한 포넨트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번엔 가만히 못 있어. 보라색 태양을 쓴다는 그 레오니수스인가 뭔가에 대해-”

“레그레시오라고 했었어, 포넨트.”

“-그래 그거에 대해 리아보다 더 먼저 알아내고 말 거야. 우리가 도움이 된다는 걸 알면 이번처럼 혼자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겠지.”

키네시아의 시선이 슬쩍 이라네리아의 방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포넨트가 그녀의 옷을 홱 잡아끌었다.

“이번엔 키네시아 너도 우리 편이야. 리아에게 말하면 배신이야. 알겠어?”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플로레타의 물기 어린 눈빛을 피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

이라네리아는 누운 채로 고개만 살짝 들어 방문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한번 휘몰아치고 가면 정신이 없다니까.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열리는 문을 향해 말했다.

“나 잘 거니까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도라 너도 들어오지 말고.”

“네, 공주님.”

문이 다시 슬그머니 닫혔다.

나는 그대로 누워 눈을 감았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설핏 깼다.

룩소르와 오틸리에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곤거리는 게 들렸다.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볼과 머리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다 자정을 알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깜빡이며 잠을 몰아내고 침대를 벗어났다.

주섬주섬 로그리예가 준 주머니에 돈과 필요한 것들을 챙겨 허리춤에 찼다.

“나가지 말라면 내가 못 나갈 줄 알고?”

가볍게 코웃음 치며 몸을 푼 뒤 문을 걸어 잠갔다.

룩소르나 오틸리에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올 것을 대비해 커다란 서랍장을 어깨로 밀어 문 앞을 막아 두었다.

그리고 책상으로 가 밑에 감춰져 있는 문을 열었다.

‘이래 봬도 이 궁전에 모르는 비밀 통로가 없는 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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