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래. 로그리예의 말이 옳았다.
의기양양해진 어린애들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소리인데 왜 이렇게 귀에 거슬릴까?
생각해 보면 시기적절하게 별관으로 온 것도 수상했다.
내가 어디 있든 귀신같이 찾아오는 놈이니 별관까지야 물어물어 찾아올 수 있다고 쳐도, 무너진 건물을 보면서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건 이상하잖아.
고작 14살인데.
“너. 보라색 태양에 대해 알아?”
“응? 아니.”
거짓말 같은데.
호기심 많아 보이는 녀석이 되묻지도 않고 말이야.
눈을 가늘게 뜨고 빤히 쳐다봤지만 로그리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도대체 속을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나는 그를 지나치며 말을 툭 내뱉었다.
“갈래.”
“내일 아침도 먹여 줄 거야?”
“멀쩡한 손으로 먹어.”
“힝.”
시무룩한 척하는 놈을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곧장 발코니로 나가 별관을 내다봤다.
하인과 기사들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는 게 보였다.
보라색 태양이 저기 어딘가에 묻혀 있을 텐데. 타솔라가 말했으려나? 아니면 찾아가서 말해 봐야 하나?
고민하는데 열린 발코니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타솔라가 들어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소파로 가서 앉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전하랑 무슨 이야기 했어?”
“보라색 태양 주변만 타지 않고 멀쩡했던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무너진 건물 잔해에 보라색 태양 장식물을 찾으라는 명령을 전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표식을 쓰는 단체가 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였으나 석연치 않았다.
직속 기사단도 없는 룩소르가 알아봐 봤자 원하는 정보를 얻긴 힘들 것이다.
고민하다가 책상으로 가서 펜을 들었다.
[만나요. 당장. -이라네리아-]
종이를 편지에 넣어 밀봉한 뒤 밖에 있는 도라를 불렀다.
“공주님, 부르셨어요?”
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라를 보았다.
내가 괴롭힌 놈들이 암살자였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로 시녀들의 태도는 평소대로 돌아왔다.
오히려 무용담의 주인공을 보듯이 반짝반짝한 눈으로 쳐다봐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도라만큼은 여전히 껄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안 그래도 수상했던 게 윤곽이 좀 잡혔다.
‘암살자이거나 적어도 그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내 옆에 있는 거겠지.’
그런데도 도라에게 일을 맡기는 이유는 간단했다.
정보를 흘렸을 때 누가 움직이는지 볼 심산이었다. 그러면 누가 도라를 심어 뒀는지 알 수 있겠지.
나는 그녀에게 손짓해 가까이 다가오게 했다.
“이거 게텔린 백작 부인에게 보내.”
“게텔린 부인에게요?”
“그래.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도라가 편지를 가지고 방을 나갔다.
방에 둘만 남자 타솔라가 나에게 물었다.
“게텔린 부인은 왜 만나시려는 겁니까?”
“물어볼 게 있어서. 참, 타솔라. 숨어서 호위하는 것도 해 봤어?”
“경험은 없습니다.”
“그래? 알겠어. 필요해지면 부를 테니까 일단 돌아가서 대기해.”
타솔라는 의아한 표정을 하면서도 이유를 묻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나가고 몇 시간 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답하자 도라가 문을 열었다.
“공주님. 게텔린 백작 부인이 찾아오셨어요.”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부인은 안으로 모시고, 너는 나가 있어.”
“예, 공주님.”
게텔린 백작 부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도라는 내 말에 따라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앉아요.”
친히 자리를 권했으나 그녀는 문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는 왜 보자고 하신 거죠?”
“서서 이야기할 거예요? 그래도 상관없긴 한데.”
게텔린 부인이 망설이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엉덩이가 소파에 닿기도 전에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보라색 태양에 대해 알아요?”
게텔린 부인이 털썩 주저앉았다. 크게 뜬 눈과 꾹 다물린 입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니면 손등에 보라색 태양 문신을 새긴 남자에 대해 물어야 하나?”
백작 부인이 입을 더 꾹 다물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발끝을 까딱였다.
협박할까 회유를 할까. 고민하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적개심이 가득한 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협박으로 받아들일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냥 협박하기로 했다.
“게텔린 백작을 쫓아가 잡아 온 게 나예요.”
부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국왕 전하께 적대하는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죠?”
“……저와 제 딸은 죄가 없어요.”
“정말요?”
“그래요. 그건 다 게텔린 백작 혼자 한 짓이에요. 저희와는 사이도 좋지 않았다고요!”
“직접적인 연관은 없겠죠. 게텔린 백작이 하는 짓을 전혀 몰랐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
백작 부인이 눈을 굴렸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가늠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사실 게텔린이 하는 짓을 몰랐어도 상관없고. 내가 원하는 건 왕권을 강화하는 거지 그대의 결백이 아니야.”
“어떻게 그런 악독한……!”
어이가 없는 분노에 나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자기들은 더한 짓도 했으면서. 상대가 정의롭게 나오길 바란 거야?”
“…….”
“원래라면 백작가를 몰락시키고 재산을 전부 수복할 예정이었는데,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야.”
게텔린 백작 부인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세요. 게텔린 백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아나요?”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네.”
그녀는 숨을 내쉬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얼굴 위에는 미약한 비웃음이 깔려 있었다.
“공주님. 아직 어려서 모르시나 본데, 권력 구조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랍니다. 이 왕국을 지탱하는 것에는 귀족만 있는 게 아니에요.”
“아. 그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그리고 서랍에 넣어 두었던 편지를 꺼냈다. 게텔린 백작 저택에서 가져온 것으로, 봉투에는 레바나 신전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지금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게 레바나 교를 믿고 있어서인 것 같은데, 맞나?”
게텔린 백작 부인은 직접적으로 그렇다고 말하진 않았으나 자신만만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편지를 꺼내 읽었다.
그제야 봉투에 적힌 주소를 봤는지 게텔린 백작 부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편지는 백작가로 온, 그럼 혹시 집에 침입해 금고에 있던 것을 가져간 것도…….”
“맞아. 나야.”
가볍게 대답하며 편지 내용을 살폈다.
토지 매입에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하며 이번 달 선물은 조금 더 신경 썼다는 말, 더불어 저번에 마련해 준 만찬에 새로운 분들이 많아 만족스러웠다는 말도 있었다.
대충 레바나 신전과 번쩍이들이 어떤 관계인지 알겠다.
에피파네스의 공식적인 국교는 샤마흐 교였다. 그러나 개종한 자를 처벌한다는 법규는 없었다.
원래는 샤마흐 교에서 레바나 교를 이단으로 정하고 처단하였으나 그것도 옛말이었다. 레바나 교를 이단에서 제외한 지 벌써 80년이 지났다.
레바나 교는 에피파네스에서 자리 잡기 위해 매달 귀족들에게 돈을 상납하며 개종을 부탁했다.
귀족들은 표면적으로 레바나 교를 따랐고, 귀족 사회에 편입하고 싶거나 동경하는 자들 역시 그들을 따라 개종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레바나 교는 그렇게 신도를 모으며 몸집을 불렸을 것이다.
지금의 레바나 교는 제법 굳건해 보였으니 그것도 이미 몇십 년 전의 일일 것이다.
“레바나 교 입장에서는 상납할 사람이 하나라도 줄어드는 게 좋지 않겠어?”
게텔린 부인은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로 내 손에 든 편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편지를 다시 서랍 안에 넣었다.
“그리고 다른 종교에 꽤 많은 금액을 기부하는 것 같던데. 레바나 교에서 이 사실을 알아도 게텔린 가문을 도와주려고 할까?”
“…….”
“그러니 내가 거래를 제안할 때 받아. 가문을 지킬 방법을 알려 줄 테니까. 전처럼 떵떵거리면서 살진 못하겠지만 죽음은 피해야 않겠어?”
그녀의 시선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이것저것 계산해 보느라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그녀가 계산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긴 침묵을 끝낸 백작 부인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작게 목소리를 냈다.
“……태양 문신을 한 사람에 대해 말하면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게텔린 부인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분을 에리오 님이라고 불러요.”
“신관이야? 태양 문양을 새긴 거 보면 샤마흐 쪽 사람 같은데.”
“아니요. 신흥 종교인 레그레시오의 사람이에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언제 생겨난 건데? 에리오라는 놈이 지도자야?”
“그건, 저도 몰라요. 제가 아는 거라고는 레그레시오의 대주교께서 쓰는 신성력은 진짜라는 것뿐이에요.”
“레바나 교의 신성력은 가짜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런 게 아니라…….”
백작 부인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눈을 굴려 문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숨까지 죽인 채 가만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신관들의 신성력은 기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잖아요.”
공공연한 사실인가 보다.
그제야 레바나 신전의 대신관이 왜 그렇게 돌팔이처럼 느껴졌는지 알 것 같았다.
보통 성자는 신의 사랑을 받아 엄청난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대신관은 굳은 신앙심과 꾸준한 기도로 신성력을 쌓아야 성자 정도의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신관은 이교도보다 못한 신성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둘 중 하나겠지. 신의 변덕, 혹은 개인의 타락.
“그거 말고, 레그레시오라는 곳의 신자 규모라든가, 교리라든가, 목표라든가. 아니면 신전이 어디 있는지라든가.”
“그런 건 저도 몰라요.”
“그게 다야? 기적을 행한다는 거?”
게텔린 백작 부인은 자신이 말하고도 민망한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방법은 알려 주세요.”
“알겠어.”
순순히 긍정하자 게텔린 백작 부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보란 듯이 옅게 미소 지었다.
“백작 부인 말대로 약속은 약속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