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나보고 폭군이래?-38화 (38/151)

<38화>

들러붙으려는 로그리예를 키네시아에게로 밀면서 타솔라를 보았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룩소르는 나와 타솔라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구나.”

“그래. 리아, 씻고 오렴. 경은…….”

“타솔라입니다.”

“타솔라……. 리아의 호위군요.”

오틸리에가 조금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타솔라에게 권했다.

“경도 씻고 오세요.”

타솔라가 잠시 나를 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국왕 부부에게 경례하고 몸을 돌려 연무장 쪽으로 향했다.

녀석. 며칠 안 데리고 다녔는데도 제법 길이 들었네.

흐뭇한 눈으로 타솔라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비슷하게 생긴 얼굴 네 개가 비슷한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말썽꾸러기 망아지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

“그래서, 고작 별관을 재건하는 데 얼마나 드는지 알려고 위험한 곳에 들어갔다는 말이냐?”

룩소르가 한숨을 삼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오틸리에는 옆에서 이마를 짚었다.

플로레타는 아직도 다친 곳은 없나 살피며 나를 주물럭대고 있었다. 귀찮아서 그 손을 떼어 내는데 포넨트가 빈정거렸다.

“네가 보면 뭘 아냐?”

안다, 이놈아.

포넨트에게 싸늘한 눈빛을 쏘아 주고 있는데 오틸리에가 내 뒤에 서 있는 타솔라를 보았다.

“타솔라 경. 호위는 위험할 때 지키는 것만 하는 게 아니에요. 위험을 미리 방지했어야죠. 아이를 붕괴할 수도 있는 건물에 들어가게 하는 게 옳은 일이었을까요?”

어투는 부드러웠으나 분명 그녀의 말은 질책이었다.

“타솔라는 경고했어. 내가 멋대로 들어간 거야. 외관이나 내부에 붕괴 조짐이 보이는지 충분히 살펴봤고, 괜찮다고 생각했어.”

“리아. 감싼다고 될 일이 아니란다. 하마터면 네가 또…….”

“감싸는 게 아니라 사실이야. 얘가 내 성질을 감당할 수나 있었겠어?”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오틸리에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리아 너도 벌할 생각이란다. 호기심 때문에 호위의 말을 무시하고 그런 곳에 들어가다니! 엄마는 정말…….”

룩소르가 오틸리에의 어깨를 감싸고 다독였다.

가만히 있으면 룩소르도 잔소리를 보탤 것 같아 냉큼 입을 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리아! 네 안전보다 중요한 건 그 어디에도 없다!”

룩소르가 답지 않게 엄하게 일갈했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 그러니까 말해 주려는 거야. 일단 애들은 나가.”

“여기서 네가 제일 애거든?”

포넨트가 반항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플로레타도 옆에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저번에 독을 마시기 전에도 우리를 쫓아냈잖아. 알아야 지켜 줄 수 있단 말이야.”

“잘못하면 얘네까지 위험해질걸.”

손가락으로 플로레타와 포넨트를 가리켰다.

오틸리에는 지친 표정으로 몸을 틀어 룩소르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룩소르가 그녀를 다독이며 나와 애들을 바라봤다.

“타솔라 경.”

“예, 전하.”

“이쪽에 앉게.”

설마. 아니겠지……. 싶었는데 타솔라가 자리에 앉자마자 룩소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셋 다 나가거라.”

“나? 내가 당사자인데, 나도 나가?”

그 말에 오틸리에가 고개를 홱 들었다.

“그래. 당사자인 리아. 너는 앞으로 일주일간 외출 금지란다. 궁전 밖으로 나오고 싶으면 엄마랑 동행해야 해.”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 보라색 태양을……!”

“외출 금지 2주!”

“난,”

“3주!”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한 달.”

오틸리에가 힘주어 말하며 꼿꼿하게 편 검지로 단호하게 문을 가리켰다.

무슨 말을 해도 결심을 바꾸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여기서 말을 얹어 봤자 외출 금지 기간만 늘어날 게 뻔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셔 속을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 타솔라. 대화 끝나면 나한테 와.”

“예, 공주님.”

성큼성큼 걸어 문을 확 열어젖혔다.

바로 몸을 홱 틀어 복도를 걸었다.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키네시아가 혼자 룩소르의 방에서 나오는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리아?”

그녀의 시선이 뒤로 옮겨졌다. 빠르고 가벼운 걸음이 바짝 따라와 내 손을 붙잡았다. 플로레타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를 달랬다.

“리아. 너무 상심하지 마. 얌전히 있으면 엄마도 금방 화를 푸실 거야.”

“으이그.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위험하게 돌아다니래?”

꿀밤을 때리려는 포넨트의 손을 잽싸게 피한 뒤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포넨트가 움찔 떨며 반걸음 물러났다.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쟤를 겁줘서 뭐 하겠어.

몸을 바로하고 키네시아에게 물었다.

“로그리예는?”

“자기 방에서 쉬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방으로 향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뒤에서 포넨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또 어디 가?”

대답하지 않고 바로 동쪽으로 들어갔다.

날개 관의 중앙부를 지나면 성을 방문한 귀족들이 머무는 곳이 모여 있다. 나는 하인에게 물어 로그리예의 방을 찾아 들어갔다.

노크도 없이 벌컥 열었는데도 로그리예 놈은 놀란 기색도 없이 미소 지었다.

“공주님이 먼저 찾아와 주고, 다치는 것도 할 만한데?”

그는 깨끗한 천을 덮고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많이 다쳤어?”

“그냥 긁힌 수준이지 뭐.”

다가가 천을 들춰 봤다.

“긁힌 수준이긴. 죄 터졌구만. 팔은?”

“부러졌대.”

“왜 너만……. 아니다. 원하는 거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들어줄게.”

“흐음…….”

그렇게 뛰어든 걸 보면 분명 바라는 게 있어서겠지.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식으로 팔짱을 꼈다.

로그리예가 엎드린 채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다가 생긋 웃었다.

“그럼 나 밥 먹는 거 도와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종이 트레이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탁자에 음식을 차려 놓은 뒤, 로그리예가 일어나는 걸 도왔다.

그는 다친 사람답지 않게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탁자 앞으로 옮겨 앉았다.

지금 황제에게 시중을 받겠다는 거야? 감히?

어이가 없어 빤히 쳐다보다가 다른 제안을 했다.

“돈으로 포상,”

“으으응. 싫어. 빵 먹여 줘. 아-.”

로그리예가 앙탈을 부리더니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정말, 기가 차다. 기가 차.

“하, 참…….”

연신 헛웃음을 터트리며 며칠 굶은 새 새끼, 아니, 새끼 새처럼 졸라 대는 놈의 입에 빵을 쑤셔 넣어 주었다.

목이 막힐 만도 한데 로그리예는 잘만 받아먹었다.

“자기야. 나 수프도.”

그러면서 또 입을 벌린다. 빵을 찢어서 넣어 주자 그가 입을 삐죽 내밀더니 뻔뻔하게도 알아서 물을 따라 마셨다.

“한 손이 멀쩡한데 먹여 달란 말은 왜 해?”

“내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공주님이랑 알콩달콩해 보겠어.”

그러더니 또 입을 벌렸다. 수프를 떠서 대충 불어 식힌 다음 그의 입에 푹 꽂아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로그리예가 멀쩡한 손으로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스푼을 입에 문 채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아에?”

“뭐라는 거야.”

“어 익아 가.”

“뭐라는 건데.”

스푼을 빼내자 로그리예가 붙잡은 손을 살살 흔들었다.

“더 있다 가.”

잠시 고민하는데 방 밖이 시끄러워졌다.

말소리가 아니라, 누군가가 의미 없이 악을 써 대는 것 같았다.

“뭐야?”

“몰라. 자주 저러더라고.”

“누가 그러는지는 알고?”

로그리예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둘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붙잡혀 있는 손을 빼냈다. 그러나 바로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공주님. 신경 쓰지 마.”

“내 궁전에서 소란을 피우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가 싫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따라 일어났다.

나는 그의 손을 떼어 냈다.

“환자는 방에 얌전히 있어.”

“별로 안 아파.”

따라온다는 놈을 굳이 말릴 필요는 없지. 그대로 방을 나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파라돈에서 온 놈 하나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무언가를 털어 내려는 듯이 제 몸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하인들이 붙어 있었다.

“으아악! 아악!”

“공자님, 진정 좀 하세요!”

너무 난리를 치는 바람에 말리려고 붙었던 하인들도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몇몇은 근처에도 못 가고 서성였다.

나는 그중 한 명을 손짓으로 부르고 턱짓으로 파라돈 놈을 가리켰다.

“왜 저래?”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에피파네스로 오고 난 뒤로 악몽에 시달리시더니 점점 증세가 심해지셔서…….”

머릿속에서 번뜩 빠진 마정석 한 알이 떠올랐다.

“첫날은 괜찮았어?”

“예.”

증상도 저주에 걸린 것과 같고, 시기도 딱 맞네.

자업자득인 데다가 키네시아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동정할 가치도 없었다.

저 상태라면 곧 에피파네스를 떠날 테고, 금고에서 멀어지면 자연스럽게 상태도 호전될 것이다.

국경을 벗어나 저주가 풀리면 정신적인 후유증도 남지 않는 편이고.

한 번 풀리면 다시 금고에 접촉하기 전까지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며칠 더 고생하라지.’

문제는 누가 그들에게 금고 문을 알려 주었느냐였다.

고개를 돌리는데 로그리예의 미소가 보였다.

“내 말이 맞지? 공주님이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