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너무 많이 겁먹어서 그런지 불이 난 직전이나 직후의 일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타솔라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표정한 얼굴인데 이상하게 매우 불손해 보였다.
“왜. 뭐.”
“보통 두려운 기억이 있는 곳에는 스스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불을 그 정도로 두려워하실 분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너 말을 가리지 않고 하는 편이구나?”
“불편하시면 시정하겠습니다.”
“됐어. 편한 대로 해.”
은근슬쩍 말을 돌린 김에 아예 화제를 바꿔 버렸다.
“내가 불을 낸 거면 왜 나를 취조하러 오지 않았지?”
“키네시아 공주님께서 충격이 큰 것 같으니 공주님께는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키네시아가?”
내가 황제인 것을 밝히기 전인데. 그때부터 뭔가를 눈치채고 있었던 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타솔라의 말에 집중했다.
“예. 게다가 방에 촛불을 떨어트린 흔적이 있었고, 목조 장식 위의 벽화가 불에 잘 타는 안료로 그려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사고로 종결한 것 같았습니다.”
“제법 자세하게 아네.”
“모시는 분 일이라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별관이 불탄 건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그냥 재건 비용이 얼마나 될지만 보러 온 건데 아무래도 좀 더 살펴보다 가야 할 것 같다.
별관 외벽에 균열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입구 쪽으로 돌아왔다.
이미 경고했음에도 들어가려 하자 내 의지가 강력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타솔라도 나를 막지 않았다.
그 대신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나무로 된 난간은 숯덩이가 된 채 겨우 붙어 있었다. 하지만 난간을 타고 내려온 불길이 1층을 다 뒤덮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벽과 바닥을 자세히 살폈다. 내부에도 균열이나 함몰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벽 장식이나 가구가 전부 나무라 상태가 심해 보이는 것이지, 건물 자체가 전소된 건 아닌 것 같았다.
‘무너지진 않겠는데.’
안전한 걸 확인하고 다 불타 버린 융단을 밟으며 완만한 대리석 계단을 올라 위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룩소르를 타고 탈출했던 길을 되짚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꺼먼 속을 다 내보인 채 활짝 열려 있는 방문이 보였다.
‘저기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내가 생각하던 게 타솔라의 입에서 그대로 나왔다.
“문 근처만 탔습니다.”
타솔라의 말처럼 문 근처만 새까맣고, 내가 누워 있던 침대 근처는 그을린 자국만 있을 뿐 1층보다도 깨끗했다.
“이걸 보고도 조사를 안 했다고?”
“그런 것 같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며 새까만 경계를 넘어 침대 근처로 다가갔다.
그을린 캐노피 천을 걷어 내자 기둥이 드러났다. 반사적으로 기둥을 눈으로 훑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기둥 위에 보라색의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타솔라. 위로.”
양손을 번쩍 올려 만세 자세를 취하자 타솔라가 내 허리를 잡고 위로 쭉 올려 주었다.
보라색 문양이 자세히 보였다. 까맣게 그을려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끄트머리만 보고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태양.”
게텔린 백작의 저택에 침입했을 때도 봤던 것이다.
수상한 남자의 손등에 그려져 있던 문양과 같았다.
이름이 에리오라고 했었나?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내가 이 몸에서 깨어난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달랑달랑 들린 채로 고민하다가 타솔라의 손등을 툭툭 쳤다.
그러자 그녀가 나를 다시 땅으로 내려 주었다.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를 더 둘러봤다. 계속 봐서 그런가?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 드는 것 같은데.
“타솔라. 캐노피 좀 정리해 봐.”
타솔라가 엉성하게 레이스 천들을 기둥에 묶었다.
나는 뒤로 한참 물러나 침대를 전체적으로 살폈다.
“이거…….”
내가 죽을 때 누워 있었던 침대잖아.
침대 머리에 벽 한 면을 다 채울 정도로 커다랗고 화려한 보라색 태양 장식이 붙어 있는 것만 제외하면 똑같았다.
심지어 보라색 태양 장식은 그을린 자국조차 없었다.
‘그 남자의 손등에 있던 문양이 왜 내 침대에 장식물로 붙어 있는 거지?’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에리오라는 남자가 내 부활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나를 되살려 놨으면서 왜 접근하진 않았지? 아니면 근처에 있는데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건가?
“타솔라.”
“예.”
“너 저 문양 본 적 있어?”
타솔라가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침대 머리에 있는 장식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보라색 태양 무늬를 새기고 다니는 종교 단체나 기적이라는 단어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일단 나가자.”
뒤돌아 나가면서도 찝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를 살려다 뭐에 쓰려고?
순간 스친 생각에 더없이 불쾌해졌다.
나는 황제다. 감히 누구에 의해 이용될 만한 사람이 아니다.
‘알아봐야겠어.’
귀족들의 수장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 정도면 다른 귀족과의 유착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게텔린을 해치운 직후에 또 내가 나서면 키네시아보다 주목을 받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수사하려면 막내 공주인 나보다는 국왕이 움직이는 게 나았다.
룩소르는 이런 쪽으로는 형편없으니 이름만 빌려 달라고 해야지.
‘일단 룩소르에게 저 문양을 확인하게 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막 건물을 나왔을 때, 별관 쪽으로 걸어오던 로그리예와 눈이 마주쳤다.
저놈은 다 불탄 별관에 무슨 일이지?
걸음을 멈추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놈이 별안간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공주님!”
나를 부르는 두 개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동시에 거대한 천둥이 연속적으로 내리꽂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건물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그 순간, 로그리예가 나를 끌어당겨 완전히 감싸며 몸을 돌렸다.
간발의 차로 엄청난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건물이 무너진 것이었다.
흙먼지 섞인 매캐한 공기가 로그리예의 품 안으로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굉음은 순식간에 지나갔으나 충격을 받은 귀는 먹먹했다. 날카로운 이명이 귀를 길게 관통했다.
어지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숨을 쉬려고 하자 무거운 먼지가 코와 입 안으로 왈칵 들어왔다.
눈이 따갑고 연신 기침이 나왔다.
로그리예는 나를 더 꽉 끌어안으며 뭐라고 말을 걸었다. 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대충 뭐라고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잠깐 숨 쉬지 마.”
나는 소매로 코와 입을 막으며 그에게 물었다.
“너 괜찮아? 뛸 수 있겠어?”
“응.”
대답을 듣자마자 그의 손을 잡고 별관 반대 방향으로 뛰며 소리쳤다.
“타솔라!”
이명이 잦아든 귀로 발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흙먼지를 다 벗어나기도 전에 숨이 차올랐다.
걸음을 멈추려는데 몸이 붕 들렸다.
“공주님, 실례 좀 할게. 눈 따가울 테니까 감고 있어.”
로그리예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가 뛸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안개처럼 고여 있는 흙먼지를 벗어났다.
발이 땅에 닿았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정원 분수 근처였다.
그는 손수건에 물을 적셔 내 얼굴을 닦아 주고 자신도 세수를 했다.
그제야 시야가 맑아졌다.
나는 제일 먼저 로그리예가 다치지 않았는지 살폈다. 두꺼운 옷을 입었음에도 등 쪽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잠시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서서히 가라앉는 흙먼지를 향해 외쳤다.
“타솔라!”
얼마 지나지 않아 타솔라가 먼지 사이에서 뛰어나왔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그녀를 붙잡아 분수로 데려갔다.
마찬가지로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고 고개를 돌렸다. 먼지구름이 완전히 걷히자 처참하게 무너진 별관이 드러났다.
“무너질 건물이 아니었어.”
1층은 물론이고 2층 역시 벽과 바닥이 멀쩡했다. 문도 잘 여닫혔다. 골격의 미세한 비틀림조차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건물이 갑자기 무너진다고?
아무런 전조도 없이, 우리가 안전할 만큼 멀어지고 난 뒤에?
게다가 건물도 절묘하게 뒤로 넘어간 상태였다. 앞으로 넘어졌으면 달리는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잔해에 깔려 크게 다쳤을 것이다.
누군가 미리 준비해 놓고 있다가 건물을 무너뜨린 게 분명하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타솔라가 다가오며 나를 살폈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뭔가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국왕 일가와 몇몇 귀족들, 기사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룩소르와 오틸리에가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은 얼굴로 달려왔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포넨트, 플로레타, 키네시아도 달려와 나를 둘러쌌다.
“리아야!”
“리아! 아가!”
“리아, 안 다쳤어?”
“너 요즘 왜 그러냐?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네.”
“어떻게 된 일이야?”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사방에서 난리를 치니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조용! 정신 사나워.”
버럭 소리를 지르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로그리예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몸을 비틀어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리고 그의 뒤로 돌아가 등을 떠밀었다.
“일단 얘 좀 치료해 줘. 날 감싸다가 팔하고 등을 다친 것 같아.”
“……팔도 티 났어?”
느물거리는 녀석에게 딱밤을 놓아주려다가. 차마 나를 구하겠다고 다친 놈을 때릴 순 없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려놓았다.
“키네시아.”
“알겠어. 가자, 로그리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