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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36화 (36/151)

<36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공주의 이름이 바뀐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놀란 플로레타는 공문서를 찾아봤지만 전부 에피파네스의 막내 공주 이름은 이라네리아라고 적혀 있었다.

플로레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직접 쓴 일기장에는 여전히 예카트리아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밖에 없어.’

마법사는 마법을 발현한 순간 마법 협회에 신고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마탑에서 살며 교육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로그리예는 마법을 쓴 이후에도 자유롭게 궁전을 드나들었다.

쌍둥이들과도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게 시사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그는 비등록 마법사다. 마음만 먹으면 흔적도 없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

그러니 플로레타가 그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플로레타의 앳된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나곤 했다.

로그리예는 느물거리며 플로레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닌데? 무서워하는데.”

“…….”

“나 나쁜 사람 아니야.”

로그리예가 유괴범 같은 소리를 하며 다가가자 플로레타는 더 겁을 먹고 말았다.

그녀가 울먹이면서 바들바들 떠는데도 로그리예는 거리를 좁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플로레타를 살피다가 돌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왜 그런지 알겠다.”

그의 한마디에 플로레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걸 구경하며 로그리예가 서서히 미소를 지웠다.

“내 마법을 피했구나?”

“피, 피했다니……. 저는 그런 적이 없는, 없어요.”

로그리예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자신이 떠본 주제에 선심 쓰듯 말해 주었다.

“플로레타. 이럴 땐 마법 쪽을 부정해야지. ‘마법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이라네리아가 보았다면 애를 놀렸다고 딱밤을 때렸겠으나 유감스럽게도 플로레타에게는 그런 담력이 없었다.

그녀는 사색이 되어 제 입을 양손으로 가렸다.

“그, 그건, 이건……. 자꾸 협박하면 마법, 마법 협회에…….”

“응?”

“마, 마법 협회에 공자가 마법사인 걸 알리겠어요.”

“그래도 소용없을 거야. 나는 걔네랑은 결이 좀 달라서 추적쯤은 쉽게 피할 수 있거든. 걔네가 어떻게 못 할 정도로 강하기도 하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천여 명의 사람들의 기억과 온갖 기록들이 한꺼번에 수정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앞으로도 비밀로 해 줄 거지?”

플로레타는 꾹 다문 입을 움찔거리다가 갑자기 홱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로그리예는 플로레타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포넨트는 연무장에 있어!”

플로레타는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더 속력을 올렸다.

그녀는 로그리예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달려 잠시 숨을 골랐다가 연무장으로 향했다.

로그리예의 말대로 포넨트는 연무장에 있었다. 그는 화를 발산하려는 듯 거칠게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플로레타는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서 있다가 포넨트가 움직임을 멈춘 틈을 타 그에게 향했다.

“저기, 포넨트. 괜찮아?”

힘들어서인지 분을 못 이겨서인지 포넨트는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툭 대답했다.

“내가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화난 것 같아서…….”

포넨트는 대답하지 않고 목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플로레타는 옆에서 열심히 포넨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애썼다.

“키네시아가 우리한테 알리지 않은 건 우리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니까 그런 걸 거야.”

“알아. ……그리고 걔한테 화난 게 아니야.”

포넨트가 목검을 닦아서 정리해 놓고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한테 화가 나. 키네시아는 나랑 쌍둥이인데, 걔는 벌써 어른 같잖아.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한심하고, 바보 같고…….”

“왜 그런 소리를 해! 그, 그렇게 따지면 내가 더한걸. 포넨트는 검이라도 다룰 줄 알지, 나는 꽃구경하는 것밖에 못 해.”

포넨트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플로레타를 보다가 맥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플로레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넌 동생이니까 그래도 돼.”

“그런 게 어딨어.”

플로레타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고마워. 사실 키네시아한테 너무 혼자 다 책임질 필요 없다고, 좀 기대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던 거였는데 말이…….”

포넨트가 제 머리를 마구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플로레타는 그의 옆에 앉아 어깨를 토닥였다.

“말 안 해도 알 거야.”

“아니. 말 안 하는데 어떻게 알겠어. 걔가 아무리 잘나도 독심술은 못 한다고. 마법사도 아니고.”

툭 튀어나온 단어에 플로레타가 움찔 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포넨트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를 올려다보는 플로레타의 머리를 한 번 더 헤집듯이 쓰다듬었다.

“사과하러 가야겠다.”

“같이 가자.”

“싫어. 창피하니까 너는 방에 가 있어.”

“그게 뭐가 창피해. 멋진 거지!”

멋지다는 말에 포넨트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티 내지 않으려고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플로레타가 종종거리며 따라갔다.

이라네와 일을 마친 키네시아도 포넨트를 찾고 있던 중이라 둘은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서서 해명과 화해를 나눴다.

말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졌는지 울먹이다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플로레타, 포넨트, 키네시아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그런 그들을 이라네리아가 2층 발코니 난간에 턱을 괸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놀고들 있네.”

***

둥글게 끌어안고 훌쩍이던 포넨트, 플로레타, 키네시아가 별안간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얼마나 큰지 제법 떨어져 있는 나한테까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저렇게 좋은가?”

징징거리면서 뛰쳐나갈 땐 언제고.

확실히 보고 있으면 즐거워 보이는데 뭐가 저렇게 즐거운지는 모르겠단 말이야.

턱을 괴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새까맣게 탄 채로 복구되지 못한 채 방치된 별관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것도 재건해야 하는데.’

벌어 오는 족족 새어 나가니, 원. 밑 빠진 화병에 물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주 등골이 휜다, 휘어.

허리를 일으켜 세우고 하하 호호 웃고 있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뗐다.

흉물스러운 별관에 가서 재건하는 데에 얼마나 필요할지 살펴봐야겠다.

방 밖으로 나오자 문 앞을 지키고 선 기사 세 명이 보였다.

나는 세 사람을 보며 고민했다.

일은 대부분 키네시아와 룩소르가 벌인 것으로 정리되었고, 귀족파의 머리를 쳤으니 당분간 번쩍이들도 몸을 사릴 것이다.

당분간은 암살 기도도 없을 것 같은데 세 명이나 달고 다니긴 번거로웠다.

“이 중에 누가 제일 강해?”

미론은 당당하게 손을 들었고, 지시스는 타솔라를, 타솔라는 지시스를 가리켰다.

팔짱을 끼고 엇갈린 손가락 화살표들을 빤히 보았다. 그러자 미론이 슬쩍 손가락을 내려 타솔라를 가리켰다.

“좋아. 앞으로 내 호위는 타솔라가 해. 나머지는 타솔라에게 일이 생겼을 때 대신하고. 해산.”

지시스는 아무런 이견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미론은 입을 쭉 내밀었다.

“뭐야, 불만 있어?”

“저도 공주님 호위하고 싶습니다.”

“왜?”

“크게 되실 분 같아서요.”

솔직한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출세하고 싶어?”

“뭐, 겸사겸사요.”

“그럼 내가 아니라 키네시아에게 붙어야지.”

“솔직히 키네시아 공주님보다는 이라네리아 공주님이 더 왕에 가까워 보입니다.”

“보는 눈이 없네. 키네시아가 왕에 어울리지.”

나는 황제고.

뒷말을 삼키며 타솔라에게 손짓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로 담담하게 돌아가는 걸음 하나와 터덜터덜한 걸음 소리 하나가 들렸다.

타솔라가 따라오는지 한 번 확인하고 별관으로 향했다.

“불은 왜 난 거래?”

“들은 바로는 사고로 처리되었다고 합니다.”

“사고면 사고지 사고로 처리된 건 또 뭐야.”

“그건-”

“설명은 됐어. 몰라서 물어본 거 아니야.”

수사하기 귀찮아서 대충 종결지었다는 말인 거 안다.

룩소르는 사고라는 말만 믿고 와 보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별관이 홀라당 탔는데, 왕이라는 놈이.

“쯧쯧.”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타솔라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붕괴될 위험이 있으니 들어가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옳은 말이다. 제법 호위 같은데?

감탄한 눈으로 그녀를 한 번 올려다보고 일단 주변만 둘러봤다.

깨진 유리창 안으로 본 내부 복도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빼곡하게 찍혀 있었다. 넘어진 가구나 깨진 도자기도 그대로였다.

방화를 저지른 거라면 철거를 하든 청소를 하든, 범인이 이 자리를 정리하려 했을 테니, 이런 걸 보면 진짜 사고로 불이 난 것 같기도 하고…….

게텔린 같은 놈들이 움직인 게 아니라 개인이 혼자 불을 낸 거라면 조사 과정에서 뭐가 나오기라도 했겠지.

“사고는 누가 쳤대?”

“진술로는, 공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공주? 무슨 공주?

“설마 나?”

“예. 그때 별관에 계셨던 공주님은 이라네리아 공주님뿐입니다.”

“내가 불을 냈다고?”

“공주님이 계시던 방에서 연기가 나왔다는 진술이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멀쩡하게 일어났는데? 만약 내가 있던 방에서 불이 났다면 이 몸은 홀라당 타서 시체로 발견되었어야 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데 타솔라가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인데 기억이 날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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