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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35화 (35/151)

<35화>

돌아보니 하먼과 미론이 흐뭇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공주님들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손 꼭 잡고 걷는 게 귀엽습니다.”

저것들이 불경스럽게……. 두 사람을 노려보다가 잡힌 손을 빼내고 앞서 걸었다.

문 앞에 멈춰 서자 타솔라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안에는 2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혹독한 빚 독촉에 시달린 탓인지 하나같이 지치고 생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는 눈빛도 곱진 않았다.

게텔린만큼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제법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을 입고 있어서 게텔린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보인 모양이다.

모인 사람들의 표정에 근심과 두려움이 먹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재상. 차용증은?”

“다 나눠 주었습니다, 공주님.”

이제 보니 저마다 손에 종이 한 장씩을 들고 있었다.

“불태우라니까.”

“태워도 된다고 말하긴 했는데, 차용증을 훼손했다는 빌미로 광산 노역에 끌려간 자들이 있어서 함부로 못 하는 모양입니다.”

“당연히 키네시아가 태웠어야지. 하여간 헛똑똑이들.”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지만 바로 옆에 서 있던 키네시아는 들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내 공을 가로채기 싫어서 둔 거라느니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키네시아에게 ‘어쩌라고’ 눈빛을 쏘아 준 뒤 하먼에게 명령했다.

“걷어 와.”

그러자 하먼이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체념한 얼굴로 스스로 바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분노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공주님이라지만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다 모아 놓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여보. 참아. 큰일 나려고, 왜 그래.”

부인이 팔에 매달리다시피 남편을 붙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건 차용증은 전부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종이 뭉치를 차라락 넘기며 벽난로로 걸어갔다. 그리고 벽난로 안으로 종이 뭉치를 툭 던져 넣었다.

불꽃이 방대한 양의 종이에 눌려 잠깐 주춤하더니, 이내 거대하게 타오르며 종이를 집어삼켰다.

잿가루가 날리는 것을 보다가 뒤돌아섰다. 남자는 여전히 혼자 서 있었다. 다만 시선은 내가 아니라 타오르는 불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키네시아의 뒤로 다가갔다.

“봤겠지만 차용증은 진짜야.”

앉아 있는 키네시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키가 작은 탓에 내 모습은 키네시아에게 거의 다 가려졌다.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향했을 것이다.

“여기, 내 언니인 키네시아 공주가 게텔린 백작의 횡포를 전해 듣고 국왕 전하께 부탁하여 몰수한 것들이지.”

“그건!”

키네시아가 쓸데없는 말을 하려는 게 느껴져 어깨를 꾹 붙잡았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자신에게 쏠린 수백 개의 시선을 외면하지도 못한 채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나는 그녀의 뒤에서 아주 작게 말을 걸었다.

“희망에 찬 표정이 보여?”

키네시아의 시선이 자꾸만 아래를 향했다.

나는 발끝으로 의자 다리를 톡 쳤다.

“고개 들고 똑바로 봐.”

그제야 키네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을 버티면 내일은 나아질 거라는 믿음. 국가는 그 믿음이 수백만, 수천만 개가 모여야 나라가 발전하는 거야. 그러니까 너는 저 표정을 책임지고 지켜야 해.”

“책임…….”

“그래. 책임. 네가 내 공을 가로챈 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책임을 떠넘긴 거야. 너는 군주가 되어야 하니까.”

내가 옆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키네시아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앞을 보았다.

누구는 울면서 신께 감사하고 있었고 누구는 아직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뿌듯한 기분을 감추며 턱을 괴었다.

“겸사겸사 네 인지도도 올리고.”

키네시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사실 지금 에피파네스 왕실이 가진 게 뭐야. 룩소르가 궁전 벗겨서 백성들에게 뿌림으로써 얻은 신뢰밖에 없잖아. 그러니 있는 거라도 지켜야지.”

국민이 왕실에 대한 애정이 깊고 충성도가 높으면 침략자들은 나라를 다스리기 까다로워진다.

그것 역시 에피파네스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요인이었다.

키네시아도 그걸 아는지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긍정했다.

그리고는 숨을 깊게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텔린 백작 영지에서 벌어진 일을 미리 알지 못해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받은 피해는 왕실에서 보상하겠습니다.”

속으로 ‘그렇지, 그렇지.’ 추임새를 넣으며 끄덕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뭘 어쩌겠다고? 내가 잘못 들었나?

“차용증을 들고 오시면 게텔린 백작이 과도하게 올려 받은 이자를 왕실에서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내 목소리는 모인 사람들의 환호성에 묻히고 말았다.

“그게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공주님!”

키네시아가 제법 공주답게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멍한 얼굴로 질질 끌려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먼은 키네시아를 말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감동한 얼굴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 내고 있었다.

룩소르가 샹들리에 팔아서 백성들한테 뿌렸을 땐 잡아 먹으려고 했으면서!

“전하는 말렸으면서 키네시아는 왜 안 말려?”

“샹들리에는 왕실의 것이고, 게텔린 백작의 돈은 왕실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속 터지는 말이야?! 국왕 손에 들어왔으면 다 왕실 거지!

이, 이, 룩소르 같은 것들! 헛똑똑이들!

내가 가슴을 내리치거나 말거나 키네시아는 후련한 표정으로 하먼에게 부탁했다.

“재상이 도맡아서 해 주세요.”

“예, 맡겨 주십시오, 공주님. 당분간 더 바쁘겠군요.”

하먼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리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키네시아를 보다가 체념하며 하먼을 불렀다.

“잠깐.”

하먼이 멈춰 서서 뒤로 돌았다.

“예, 공주님.”

“광산에서 일하다 도망친 사람들도 찾아내서 보상해 줘.”

“알겠습니다.”

하먼이 자리를 뜨는 걸 지켜보는데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친 키네시아가 생긋 웃었다. 나는 코로 숨을 후 내쉬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뭘 봐?”

“아르만 때문이지? 은근 잔정이 많다니까.”

“뭐래. 광산 노역한 사람들한테도 보상을 해 줘야 하니까 그런 거거든?”

“그래.”

“진짜라고.”

“알겠어.”

“어쭈?”

“그래그래.”

“…….”

***

곧장 따라가지 않은 탓인지 플로레타는 포넨트를 놓치고 말았다.

제일 먼저 그의 방을 찾아갔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플로레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체력이 떨어져 주저앉고 말았다.

“어딜 간 거야.”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땀을 말리며 체온을 빼앗아 갔다.

급격히 몰려오는 추위에 플로레타가 재채기를 하며 제 몸을 꼭 끌어안았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든지 움직이든지 해야겠다. 그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머리 위로 그늘이 지며 어깨 위에 손이 턱 올라왔다.

“까꿍.”

“꺅!”

플로레타가 펄쩍 뛰어올라 도망쳤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심장을 부여잡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장난친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로그리예 공자.”

그녀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여전히 형제들의 친구를 대하는 거라기엔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녀가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로그리예가 보란 듯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반응이 너무하네. 상천데?”

물론 전혀 상처받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래 놓고 가증스럽게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플로레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로그리예를 노려봤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눈이 부실 정도로 잘생긴 외모를 자랑했으나 플로레타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기보다는 무서웠다.

“왜……. 저한테 왜, 아는 척을 한 거예요?”

“그냥 친해져 볼까 해서?”

로그리예가 생글거리며 플로레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로그리예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섰다. 명백한 거부 의사에 상처받을 만도 하건만 로그리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오직 순수한 궁금증뿐이었다.

“나를 왜 그렇게 무서워해?”

플로레타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 그런 적 없어요.”

부정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발끝을 향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8년 전 일을 떠올렸다.

5살 때의 일이지만 그녀는 로그리예와의 첫 만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제 동생의 2번째 생일이었다.

예로부터 2는 신성한 숫자로 여겨졌기에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2번째 생일을 성대하게 치렀다.

그건 에피파네스의 막내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가난한 왕국이긴 하나 그들은 최대한 많은 이들을 초대했다.

레바나 교는 국교가 아니기에 초대받지 못했고, 샤마흐 교의 마지막 신관은 초대를 거부했다.

신관은 아무도 오지 않았으나 대신 여러 귀족과 타국의 사신들이 막내 공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중에는 로그리예 아미르도 있었다.

어린애답지 않게 초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소년에게서 다들 눈을 떼지 못했다.

정작 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 아버지 곁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왕비에게 안긴 막내 공주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눈동자는 강한 빛이 내리쬐는 수면처럼 반짝였다.

그는 곧장 파티의 주인공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공주님.”

낯을 가리는지 공주가 왕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로그리예는 뭐가 그리 웃긴지 한참을 웃다가 달랑거리는 아기의 발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려 까딱여 보았다.

“공주님. 공주님은 이름이 뭐야?”

그가 6살 답지 않게 단정하고 깔끔한 말투로 물었다.

아기가 대답하지 않자 옆에 서 있던 룩소르가 대신 대답했다.

“예카트리아란다.”

“흐음.”

플로레타가 이 일을 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제 동생은 2년간 예카트리아라고 불렸으니까.

그러나 기묘한 침묵이 흐른 뒤, 로그리예가 룩소르와 오틸리에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제안한 순간,

“아니에요, 전하. 공주님 이름은 이라네리아잖아요.”

공기의 흐름이 아주 촘촘하고 느리게 변했다. 마치 물줄기처럼 끊임없이 흘러가는 얇고 부드러운 견직물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 느낌에 플로레타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국왕 부부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라네리아. 이 아이의 이름은 이라네리아예요.”

오틸리에의 말에 로그리예가 환하게 웃으며 까치발을 들었다. 그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이라네리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때 본 로그리예의 눈빛을 플로레타는 잊을 수가 없었다.

희열로 번들거리던 청보라색 눈동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뒤로 예카트리아는 이라네리아가 되었다. 애칭은 변함이 없었지만 이름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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