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키네시아 공주님과 이라네리아 공주님이 잡아낸 것이라면서요?”
“하지만 어린 공주님 둘이서 어떻게 게텔린 백작을…….”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듣기로는 아미르 공작의 원조가 있었다던데요.”
“아니에요. 아미르 공작도 게텔린 백작이 잡혀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댔어요.”
“그럼 정말 공주님 두 분이서 하신 일이라고요?”
소문은 물이 흐르듯 위에서 아래로 흘러갔다.
공식적으로 경위를 발표한 적도, 누군가가 나서서 소문을 인정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궁전 안에는 두 공주가 귀족파의 수장을 숙청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에피파네스에서 지내고 있는 파라돈의 황자 요르고스 카텔라코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라네리아와 키네시아…….”
두 이름을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그는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헤집었다.
성격 나빠 보이는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눈은 며칠을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퀭하고 피부는 거칠었다.
입술은 부르텄고 볼과 눈꺼풀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근래 더 히스테릭하게 변한 요르고스를 힐끗 보았다.
“황자님. 레바나 신전의 대신과의 약속을 마음대로 바람맞히셨다면서요.”
“키네샤와 그 악랄한 막내 공주가 분명 아버지께 다 말했을 거야. 그래서,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나를…….”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요르고스와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던 탓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오만하고 재수 없긴 했어도 사람 말은 할 줄 알았는데, 어쩌다가 미친놈이 되어 버렸는지.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걱정스러웠다.
요르고스 황자의 안위나 건강 따위를 염려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에피파네스에 온 뒤로 황자가 미쳤다는 것을 황제가 알면 그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염려한 것이었다.
“제가 황자님 이름으로 대신관님을 초대했어요. 곧 궁전으로 들어올 테니 오해가 있다면 푸시는 게 좋겠어요.”
요르고스 황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손가락의 살갗을 꼬집듯 집어 뜯기 시작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차마 그 모습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을 때 하인이 다가왔다.
대신관이 왔다는 소식에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빨리 그를 안으로 모시라고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신관이 그녀가 머무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대신관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제 손가락을 꼬집고 긁어 대는 요르고스의 옆에 앉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요르고스 대신 대신관을 맞았다.
“대신관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보통 이렇게 아는 척을 하면 상대편도 인사를 건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대신관은 대꾸하지 않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무언가를 확인하듯 요르고스의 주변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네페르트 후작 부인을 보았다.
“이런,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후작 부인. 황자님 근처에서 마법의 기운이 느껴져서 말입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조금 커진 눈으로 요르고스를 보았다.
“요즘 들어 말이 더 안 통하긴 했지만, 마법이라니요?”
“저도 정확한 것은 이야기를 들어 봐야 알겠습니다만, 황자님 상태가 이러셔서야…….”
“마법이면 신전으로 가는 게 낫겠네요.”
신전은 신탁을 받아 성역에 세워진다.
성역에는 신성력이 충만하고, 신성력은 마력에 저항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황자의 증상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관은 바로 긍정하지 않고 미묘하게 굳은 얼굴로 황자를 보았다.
그러다 네페르트 부인이 쳐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 부인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자의 하인들을 불러 요르고스 황자를 모시게 했다. 발작적으로 반항하던 그가 얼마 되지 않아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신전 안이었다.
요르고스는 얼음물에 빠진 사람처럼 덜덜 떨며 누군가의 이름을 짓씹었다.
“이라네 황제…….”
요르고스 황자는 정치나 역사에는 관심도, 재능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에피파네스의 폭군을 거론하다니. 에피파네스 사람들 입에도 잘 오르내리지 않는 인물인데.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의문을 품기도 전에 요르고스 황자가 말을 이었다.
“그, 그 금고에 들어가려고 했던 날 이후로, 자꾸 악몽에 시달려. 이상한 게 보여.”
그가 제 몸을 끌어안고 벌벌 떨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거길 들어가셨다고요? 저주받은 곳에는 왜 가셨어요?”
요르고스가 몸을 벌벌 떨며 충혈된 눈으로 네페르트 후작 부인을 노려봤다.
“저주?”
섬뜩한 눈빛에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내심 놀랐다. 그녀는 겁을 먹은 걸 티 내지 않으며 여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핏줄이 아닌 사람은 열 수 없도록 끔찍한 저주를 걸어 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정확한 건 아니에요.”
“왜지?”
이라네리아 공주가 금고를 찾아낸 뒤, 금고에 저주가 걸려 있다는 소문도 함께 퍼졌다.
그러나 무서운 소문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폭군의 금고를 찾아 헤맸다.
이라네리아 공주가 가지고 나온 액수는 탐욕스러운 폭군이 모은 양이라기엔 터무니없이 적었기에 보물이 더 숨겨져 있을 거라고 여겼던 탓이었다.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은 많았지만 아무도 금고와 저주의 존재를 확인할 순 없었다.
“입구를 발견한 사람이 한 명도 없거든요.”
지하 감옥 근처에 금고의 입구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라네리아 공주도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제법 여러 사람이 침입해 뒤져 봐도 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요로고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럼 그 금고의 입구를 아는 사람은…….”
“오직 이라네리아 공주 하나뿐이에요.”
“이라네리아……. 이라네리아, 이라네리아!”
그가 책상을 긁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대로 책상 위를 쾅쾅 내리치며 이라네리아의 이름을 저주처럼 읊었다.
요르고스는 자신이 이라네 황제의 금고를 발견했던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건 이라네리아와 키네시아에게 굴욕을 당한 날 밤이었다.
같이 다니는 놈들 중 하나가 금고에 관한 소문을 가져왔었다.
“전보다 궁전 꼴이 좀 덜 거지 같다 했더니, 금고를 발견한 모양이야. 무슨, 폭군의 금고라던데.”
“나도 오늘 연회에서 들었어. 이라네 황제래.”
“꼴에 황제는.”
파라돈의 깡패들이 낄낄거렸다. 요르고스 황자는 다친 부위에 약을 바르며 그 이야기를 듣다가 눈을 빛냈다.
“그럼 그 금고에 있는 것만 털면 여긴 다시 거지꼴이 되겠네?”
“그렇지.”
“어디 있다는데?”
“뒤뜰,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는 복도의 일곱 번째 촛대와 여덟 번째 촛대 사이의 벽을 두드리면 계단이 나온대.”
그렇게 말하며 탁자를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다. 지나치게 구체적이었으나 요르고스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뭐든 허술하고 안일하게 관리하는 나라이니 저런 중요 내용도 그냥 알려져 있나 싶었다.
그들은 당장 뒤뜰로 향했다.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달리, 어디선가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촛불이 켜져 있는 벽이 보였다.
벽을 두드리자 소문대로 계단이 나왔다. 동시에 마력석이 환하게 빛났다.
마력석만으로도 돈이 되기 때문에 요르고스는 그곳에 있는 마력석을 모두 떼어 낼 생각이었다.
그가 막 고정 장치 하나를 벌려 마력석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을 때였다.
“으아악!”
검은 기운이 그들을 덮쳤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전부 방에 있었다.
꿈을 꾼 건가 했는데 요르고스의 손에는 여전히 마력석이 들려 있었다.
그 뒤로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었다. 점점 심해지던 악몽은 현실에도 나타나 그들을 괴롭혔다.
몇 주째 제대로 자지 못하며 환각에 시달리자 그들 중 반은 거의 미치광이가 되었다.
요르고스마저 정신이 오락가락했으니 말이다.
“이라네리아밖에 모른다고, 그 입구를. 이라네리아밖에…….”
그렇다면 소문을 흘리고, 불을 켜 놓고, 지하 감옥으로 가는 문을 살짝 열어 두어 그들을 유인한 게 이라네리아 공주라는 뜻이 된다.
“가만두지 않겠어.”
그러나 그의 결심은 궁전으로 돌아가자마자 악몽에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
“야아악!”
커다란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반사적으로 쥐고 있던 단도를 빼 들고 나서야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포넨트가 활짝 열린 문 밖에 서서 성난 물소처럼 씩씩거리고 있는데,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왜 아침…….”
힐끗 불긋한 창문을 봤다. 그리고 말을 정정했다.
“오후부터 남의 방에 와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리아!”
포넨트 뒤에 숨어있던 플로레타가 나에게 뛰어오려다가 주춤거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충격에 휩싸여 크게 벌어졌다.
‘왜 저래.’
영문을 몰라 앉은 채로 멀뚱히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그제야 왜 포넨트와 플로레타가 저런 반응을 보인 것인지 알았다.
‘어제 로그리예하고 같이 잤었지.’
그래 봤자 애들끼리 잔 건데 저런 반응일 것까지야.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로그리예가 나를 곰 인형처럼 안고 머리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공주님. 나랑 동침하면서 베개 밑에 그런 무시무시한 걸 숨겨 놓고 있었던 거야?”
로그리예의 검지가 내 손등을 톡 건드렸다.
그제야 단도 날이 예리하게 번쩍이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