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재상.”
“예. 공주님.”
“게텔린 백작이 미납한 세금이 총 얼마야?”
“173억 핀나(에파필리스의 화폐 단위)입니다.”
뭐? 173억? 고개를 홱 돌려 룩소르를 보았다. 그가 슬쩍 내 눈을 피했다.
못난 놈.
저놈은 에피파네스의 왕이 아니라 호구들의 왕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를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는 속을 좀 다스리고 다시 재상을 보았다.
다른 꼬질이들도 그렇고, 두 눈이 묘하게 반짝거린다. 희망과 의욕이 충만한 상태인 것 같았다.
“내가 후처리까지 알려 줘야 하는 건 아니지?”
“그럼요. 믿고 맡겨 주십시오.”
“그래. 아! 차용증은 키네시아에게 처리하라고 해. 채무자들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리는 것도 괜찮겠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게텔린 백작 소유 광산에서 강제노역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풀어 주고.”
“예, 공주님.”
하먼이 채권을 챙겨 들고 다른 꼬질이들에게 일을 부탁했다.
이상하게 지시하면 끼어들려고 했는데 다행히 하먼은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꼬질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들 제 몫을 서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각자의 방법으로 완벽하게 서류를 숨겨 집무실을 나갔다.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되자 피곤이 몰려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룩소르의 얼굴을 보았다.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슬그머니 불안스러워졌다.
“설마 게텔린을 살려 줄 건 아니지?”
룩소르가 고개를 저었다.
“리아. 너를 해치려 한 사람이다. 그것 말고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했는데, 내가 어떻게 눈감아 주겠느냐.”
나도 대충 훑어봐서 안다. 수탈에 겁탈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빼앗아 취했다. 그게 사람이든, 땅이든, 재물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인 나도 그렇게는 못 살아 봤는데 말이다.
“게텔린처럼 탐욕스러운 부류는 부모님을 죽인 원수보다 재물을 빼앗은 원수를 더 못 잊어. 반드시 죽여서 처리-”
“이라네리아!”
룩소르가 내 어깨를 잡아챘다. 경악에 찬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며 물기를 머금었다.
“죽, 죽이, 그런 무서운 말은 어디서 그런 것을 배운 게냐! 너는 고작 열 살이다, 열 살인 애가…….”
열 살 아닌데.
“다 못난 내 탓이로구나. 내가, 내가 어설퍼 너를 위험하게 해 놓고…….”
룩소르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말에 반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룩소르가 그간 어설프고 물렁물렁하게 행동한 건 사실이니까.
“이제 너는 이 일에서 손 떼거라. 어른들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마. 위험한 게 있으면 아빠에게 말하고.”
“말하면? 나를 지켜 줄 순 있고?”
룩소르가 예기치 않게 들이받힌 사람처럼 멍하니 나를 보았다.
한참이나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충격받을 필요가 있었다.
사람 좋은 것도 어지간해야지.
어떻게 게텔린이 저딴 놈인 걸 15년 동안이나 몰라보냐고.
“전하는 왜 왕이 됐어?”
“그거야……. 그건,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게텔린이 대충 그런 식으로 꼬셨을 줄은 알았지만.
“그게 다야? 왕으로서의 포부나 야망 같은 건 없어?”
“리아. 아빠는 욕심 같은 것이 없단다.”
“그런데 전하. 그 자리에 있으려면 욕심이 필요해.”
“국왕은 탐욕을 부려선 안 되느니라.”
“그럼 질문을 다르게 해 볼게. 전하가 왕위를 지키기 위해 뭘 할 수 있어?”
그는 여전히 왜 그런 결의가 필요한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8일 동안 25번의 암살 기도가 있었어.”
“그렇게나 많이……! 왜 알리지 않은 게냐.”
“알렸으면?”
잡겠다고 난리 치다가 게텔린을 놓쳤을 게 뻔했다. 자신이 위협당했다고 생각하면 아예 국왕 일가를 없애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암살자를 대놓고 추궁하면 게텔린은 무리를 해서라도 내 목숨을 빠르고 확실하게 끊어 놓으려 했을 것이다.
그건 10살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패악을 부리는 척 암살자들을 나에게서 떼어 놓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서 산 거야. 만약 암살 대상이 키네시아나 포넨트, 플로레타였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 혹은 왕비 전하였다면? 지킬 수 있었을까?”
알려 주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이 갔는지 룩소르의 안색이 희멀겋게 변했다.
“앞으로 더 심해질 거야. 썩은 울타리도 울타리라고, 게텔린이 외부와 내부 세력을 잘 조율하고 있었던 것 같거든.”
당연한 말이다. 나라가 사라지면 제 밥그릇도 사라지게 되니까.
그는 타고난 기회주의자, 아첨꾼, 간신배였다.
그 기질을 십분 발휘해 레튜니아와 파라돈 사이를 환상적으로 줄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없다. 룩소르가 레튜니아와 파라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선택을 한다면 에피파네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내정 간섭은 심해지고 나라를 노리는 놈들도 많아지겠지. 어쩌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에피파네스는 아수라장이 될 거야.”
물론 내가 있으니 그럴 걱정은 없지만.
룩소르가 이렇게 물렁한 상태면 키네시아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 백성들이…….”
확실히 저런 걸 보면 왕의 자질이 있긴 한데…….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럼 버틸 수 있겠어? 도망치지 않고 감당해 낼 자신이 있어? 아무런 결심도 없이?”
룩소르의 얼굴이 혼란해졌다. 아마 너무 많은 생각이 뒤엉켜 머릿속이 아수라장일 것이다.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물러나.”
이 정도 말해 놨으니 심경이나 태도의 변화가 생기겠지.
왕위에서 물러난다고 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상관없었다.
국왕 일가의 꼬질이들은 룩소르와 묶어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키네시아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하면 될 테니 말이다.
룩소르 뒤흔들기도 끝났으니 슬슬 방으로 돌아가 쉬어야겠다.
문으로 다가가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너, 리아가 맞는 게냐?”
뒤를 돌아 눈을 맞췄다. 그는 낯선 사람을 보듯 나를 꼼꼼히 살펴보다가 말했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구나.”
“전하가 나를 낯설게 느껴도 우리가 한 핏줄이라는 건 변함 없어.”
내 후손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
그는 10살짜리 딸에게 죽여 없애라는 소리를 들은 것에 충격을 받아야 할지, 내가 변함없이 제 딸이라는 것에 안도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를 뒤로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었지만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할 로그리예는 보이지 않았다.
얘는 누가 못 들어오게 지킨다고 했으면서 어딜 간 거야?
뭐, 어차피 물건을 빼내 온 다음부터는 대놓고 돌아다녔으니 그가 구태여 방을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다.
잠이나 자야겠다 싶어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갔다. 그러자 가발 쓴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잠든 로그리예가 보였다.
“야.”
불러도 미동조차 없었다. 이불로 잘 덮어 놓은 등을 쿡 찌르자 그가 눈을 움찔거리다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자기 왔어?”
자기는 얼어 죽을.
“너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졸려서. 공주님도 졸리지? 눈 좀 붙여.”
그러더니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베개를 홱 던지고 침대 안쪽으로 들어간다.
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아가는 가발을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로그리예 놈을 쫓아내고 싶은데 그럴 기력이 부족했다. 밤을 지새워 돌아다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약혼할 사이고 애기니까 상관없겠지.
침대로 들어가자 오히려 로그리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길게 하품하다가 옆으로 누워 상체를 반쯤 세우고 있는 로그리예에게 툭 말을 던졌다.
“뭐.”
“꺼지라고 할 줄 알았는데.”
“꺼지라면 꺼질 거야?”
“아니.”
“그러면서 뭘.”
눈이 가물가물 감겨 몸을 틀며 옆으로 누웠다. 뒤에서 꾸물거리던 로그리예가 등을 맞대 왔다.
“나 정말 여기서 잔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그리예가 뒤척이더니 나를 베개처럼 끌어안았다.
“뭐야?”
“어차피 결혼하면 안고도 잘 테니까 괜찮지?”
하여튼 하나를 주면 열 개를 빼앗아 먹을 놈이다.
로그리예를 밀쳐 내고 베개 밑에 손을 집어넣었다. 저번에 둔 단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베개 위에 쓰러진 사람처럼 엎드려 단도를 손에 쥐었다.
“피곤하니까 귀찮게 굴지 마.”
그리고 가물가물한 목소리로 경고한 뒤, 잠에 빠져들었다.
***
이라네리아 공주에게 독을 먹인 것이 게텔린 백작의 짓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게텔린 백작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집행 날짜는 한참 뒤로 잡혔으나 이제껏 그가 저질렀던 모든 악행의 전말이 드러났다.
사실 게텔린의 행보는 알음알음 다 아는 것이었기에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사람들이 놀라워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