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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31화 (31/151)

<31화>

“……아닙니다.”

부단장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내 눈을 피했다.

나는 경고의 의미로 그를 빤히 보다가 옷깃을 놓아주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움직여.”

그제야 부단장이 몸을 돌려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기사들이 맡은 일을 처리하러 흩어졌다.

나는 텅 빈 연무장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아까 따로 빼놓은 기사 세 명이 나를 보고 있었다.

실력 있는 놈 중에서도 나와 포넨트를 대할 때 업신여기지 않은 애들만 추려 놓은 것이었다.

“지시스, 미론, 타솔라. 너희는 오늘부로 내 호위야.”

룩소르의 서명을 받았던 다른 종이를 내밀어 보여 줬다.

셋 다 별다른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뭘 하면 됩니까?”

“뭘 하긴. 날 따라다니면서 호위하면 되지.”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 궁전의 본관으로 갔다.

안은 이미 게텔린과 시종장을 찾느라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종종 귀족들이 화를 내며 악다구니를 쓰는 게 들렸는데, 게텔린과 한패인 놈들이라고 생각하니 비명도 합창으로 들렸다.

마음 같아서는 한데 모아 쓸어버리고 싶지만 갑자기 빈틈이 생기면 더 이상한 놈들이 들어차기 마련이라 참았다.

‘좋아. 잘하고 있네.’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부단장이 다가왔다.

“게텔린은 좀 전에 궁전을 나갔다고 합니다.”

그건 시종장이 집무실 밖에서 꼬질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을 때부터 예상했던 것이었다.

소란을 피운 건 다른 귀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으니 상관없었다.

“시종장을 발견하면 국왕 전하께 데려가.”

“예.”

부단장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는 세 명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랑 어디 좀 가야겠어.”

***

게텔린은 삽으로 보석을 퍼 담느라 허리가 아프고 어깨와 등이 쑤셨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늦장을 부리면 수배령이 내려져 해외로 나가는 게 어려워질 수 있었다.

그는 평생 부릴 부지런을 다 떨어 보석을 모두 집어넣고 어깨에 둘러멨다. 암석 중앙, 동그랗게 파인 홈에 반지를 가져다 대자 커다란 소리가 나며 암석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이 마치 자신의 창창한 앞날을 암시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어휴. 기다리다가 돌아가시는 줄 알았네. 왜 이렇게 행동이 굼떠?”

기분이 들어야 할 타이밍인데 왜 잡음이 끼어드는 걸까?

게텔린은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가 말을 묶어 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이라네리아 공주가 앉아 있었다.

게텔린은 밖으로 나와 그녀에게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여길 어떻게…….”

“네 저택 근처에 숨어 있다가 미행했는데? 얼마나 허겁지겁 도망치던지, 내가 따라가는 것도 눈치 못 채더라. 그래서 안 잡히고 국경은 넘겠니?”

게텔린이 얼굴을 이리저리 구기다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자루를 말 근처에 내려놓았다.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지. 마침 잘됐군. 떠나기 전에 네년을 살려 두고 가는 게 영 마음에 걸렸는데 말이야.”

이라네리아의 표정이 더 싸늘하게 굳었다.

게텔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품 안에서 단도를 꺼냈다.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어린 공주는 게텔린이 가까워질수록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거 보면 무슨 생각 안 들어?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뭐라? 멍청?”

“그래. 아둔한 놈아.”

게텔린이 분노에 휩싸인 얼굴로 단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러나 이라네리아가 다치는 일은 없었다.

챙! 소리와 함께 수풀에서 세 개의 검이 튀어나와 게텔린의 급소를 노린 것이다.

게텔린은 가까스로 몸을 피했으나 기사들은 거리를 좁혔다. 게텔린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라네리아는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다가 폴짝 뛰어내려 기사들이 벌려 놓은 자리에 섰다.

“내가 내 키보다 높은 말에 앉아 있잖아. 공주 체면에 저길 기어 올라갔겠어, 날아 올라갔겠어? 다른 사람이 도와줬을 거라는 것쯤은 눈치채야지.”

“이, 이!”

이라네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다가가 게텔린의 정강이를 강하게 걷어찼다.

“윽!”

게텔린은 주저앉으면서도 혹시 누군가가 보물이 든 자루를 눈치채기라도 할까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라네리아는 팔짱 끼고 무릎 꿇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눈높이가 좀 마음에 드네. 그리고 년? 고귀한 몸께 년이라고?”

“죄,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가 잠시 실성을 하여…….”

“흐음.”

“일단 저 자루만 저에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반성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라네리아는 게텔린을 힐끔 보더니 기사들에게 말했다.

“일단 포박해.”

그리고 기사들이 게텔린의 몸을 수색해 날붙이를 빼앗고 몸을 묶는 동안 보석이 든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약을 올리듯 게텔린의 눈앞에서 자루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게텔린의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자루의 움직임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이건 뭐야?”

게텔린은 속으로 웃으며 이라네리아를 보았다.

그는 오랜 기간 국왕 일가를 휘두르며 살았기에 그들이 무엇에 약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아까 협박하려고 한 게 조금 걸리긴 했으나 그래 봤자 어린애다. 가족, 사랑, 참회, 뭐 그딴 것들로 회유하면 질질 짜면서 자루를 넘겨줄 것이다.

그는 뒤로 묶인 손으로 제 엉덩이를 꼬집어 눈물 한 방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고 가증스럽게 우는 척을 했다.

“제, 제 아버지의 유골이 들어 있습니다. 살아생전 잘해 드리지 못한 게 생각나……. 흐윽.”

“그래서 가지고 도망치려고 했다?”

“저도 공주님께 몹쓸 짓을 한 걸 많이 후회했습니다! 반성하지만 나쁜 짓을 하고 죽으면 아버지께서 슬퍼하실 듯하여, 새로운 곳에서 평생 제 죄를 뉘우치며 좋은 일만 하고 살려고…….”

이라네리아는 구구절절한 게텔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루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법으로 확장된 공간 속에는 두 눈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보석과 금화가 있었다.

“그래? 아버지가 아주 번쩍번쩍하시네.”

게텔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게텔린을 보자 이라네리아는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내가 이 맛에 나쁜 놈들 비자금을 털지.’

그녀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꾹 참으며 자루 입구를 꽉 동여맸다.

“걱정 마, 게텔린 백작. 네 아버지는 내가 아주 자알 모실 테니까.”

“이, 이, 사악한! 이거 놔, 이거 놔라!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나를 이렇게 함정에 빠트려 놓고도 너네가 무사할 줄 아느냔 말이다! 네 아비, 룩소르를 왕으로 만든 게 나다! 내가, 억!”

악을 쓰는 게텔린의 머리를 퍽 내리친 이라네리아가 씩씩거렸다.

“근데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국왕이 네 친구냐? 어디서 존함을 함부로 불러?”

그렇게 말하는 이라네리아의 말에서도 그다지 존경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보고 있던 기사 세 명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뭐 해? 안 끌고 가고?”

“으아악! 이거 놔! 내 돈! 내 돈!!”

이라네리아는 미친 망아지처럼 발길질해 대는 게텔린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그래도 걷게 해 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다리도 묶어.”

지시스가 고개를 꾸벅 숙여 대답하고 게텔린을 기절시켰다.

미론이 빠르게 게텔린의 다리를 묶었다.

두 사람이 행동하는 동안 이라네리아는 게텔린의 말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자루를 든 채로 타솔라에게 다가갔다.

“돌아가자.”

“예, 공주님.”

타솔라가 먼저 말에 올라 양손을 뻗는 이라네리아를 번쩍 들어 제 앞에 앉혔다.

이라네리아는 말에 묶여 질질 끌려가는 게텔린을 보며 비자금이 든 커다란 자루를 꼭 끌어안았다.

***

나는 궁전으로 돌아오자마자 호위를 물리고 내 금고로 들어갔다.

자루를 쓰러트려 놓자 안에서 금과 보석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금고에 번쩍이는 것들이 들어차기 시작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모았던 양의 5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비어 있는 것보다는 낫지!

“푸흐흐. 흐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금화로 만든 산 위에 드러누웠다가 숨을 골랐다.

물론 성불하기 전에 키네시아에게 금고 여는 방법을 알려 줄 생각이다. 이 많은 돈을 지옥까지 싸 들고 갈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내가 이 몸에 있을 때까지는 내 것이지.

팔다리를 휘저어 천사 모양을 만들어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처럼 쌓인 보석들을 보며 고민하다가 적당한 양만큼을 도로 자루에 담았다.

‘게텔린 저택 금고에서 보았던 양만큼은 룩소르에게 줘야지.’

자루를 달랑거리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많던 양의 서류는 전부 정리되어 있었고 꼬질이들의 표정은 심각했다.

“왜들 그렇게 죽상이야?”

“리아…….”

“게텔린은?”

“감옥에 가둬 두었다.”

“키네시아는 풀어 줬고?”

룩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수심이 가득해 보이는 그의 앞에 자루를 내려놓았다.

“게텔린을 쫓아가서 찾아온 보물이야.”

“…….”

기뻐하질 않네. 그를 힐끗 보고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생각보다 양이 너무 적어서 그런가? 조금 더 넣어 줄 걸 그랬나?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재산과 관련된 문서를 보았다. 제법 양이 많았다.

“실망하지 마. 저기 있는 거 다 몰수하면 이 주머니를 꽉 채우고도 남을 거야.”

룩소르가 나를 보며 흐리게 미소 짓고는 다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런 자를 믿고 있었다니,”

그쪽이었구나. 난 또 돈 때문에 그런 줄 알았네.

“어쩌겠어. 그래도 죽을 때까지 몰랐던 것보다는 낫잖아?”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탁자로 다가가 불법 행위 목록을 들춰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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