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으하하하! 누가, 뭘? 푸하하! 공주들이 내 금고를 털어? 자네 꿈이라도 꿨나?”
“아닙니다.”
답답함에 숨이 막히는지 시종장이 제 가슴을 내리쳤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국왕이 귀족들을 모아 놓고 별 시답지 않은 대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주가 나타났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마법 물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지를 끼면 사라지는 그런 물건 말입니다. 로그리예 아미르가 공주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는 거로 보아, 아무래도 아미르 공작가가 개입한 것 같습니다.”
게텔린이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종장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 그에게 말했다.
“아마 곧 조사가,”
“나도 알아! 내가 무슨 멍청이인 줄 아나?!”
엄한 놈에게 성질을 내며 게텔린이 방을 뛰쳐나갔다.
궁전에는 아직 같이 일을 꾸민 자들이 남아 있었지만 알 바인가? 그에게 중요한 건 의리나 신의가 아니다.
첫째는 목숨, 둘째는 재물이었다.
‘나라도 살아야지.’
그는 말을 타고 달려 저택에 도착했다.
인사하는 집사를 무시하고 곧장 방으로 돌아와 금고를 열었다.
보물은 멀쩡했으나 문서가 있어야 할 곳은 텅 비어 있었다.
게텔린은 빈 선반들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이게, 이럴 리가……. 정말로 공주들이 내 금고를 털다니……!”
국왕 일가 중에는 이런 계략을 꾸밀 만한 사람이 없다.
키네시아 공주가 사려 깊고 영민하다는 평을 듣고 있긴 하지만 성격부터가 권모술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궁정에 있는 의사들은 전부 게텔린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라네리아를 진료한 의사에게 공주가 중독 증상을 보이며 하루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직접 전해 들었다.
즉, 공주가 독약을 먹은 것까지는 진짜라는 말이다.
‘내가 무슨 독을 쓸지는 어떻게 알았지? 해독제는 누가 구해 줬고?’
국왕 일가가 한 짓은 아니라고, 게텔린 백작은 확신했다.
그들은 가족을, 그것도 막내 공주를 미끼로 쓸 정도로 담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종장의 말이 맞을 것이다.
“아미르 공작이 나를 처리하기 위해 벌인 짓이겠군!”
게텔린은 이를 아득아득 갈았다. 분노가 치밀어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누군가 아미르 공작과 대적하겠냐고 묻는다면 게텔린은 도망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것이다.
아미르 공작이 작정하고 게테린 가를 무너트리려 한 것이라면 승산이 없었다.
게텔린은 마법이 걸린 주머니를 가져와 금고에 있는 보물을 전부 쓸어 담았다.
자루 주둥이를 움켜쥔 채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서던 그의 앞에 부인과 딸이 나타났다. 게텔린이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 오셨어요?”
“며칠 안 들어온다더니 일찍 왔네요.”
게텔린은 험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집구석에 처박혀 있으면서 쥐새끼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돈으로 사치하고 먹을 것이나 축낼 줄 알지 하는 게 뭐가 있어?”
게텔린은 나란히 서 있는 부인과 딸을 양쪽으로 밀치며 지나갔다.
부인은 게텔린의 무례한 행동에 화를 내려다가 그가 움켜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깐. 그거 뭐예요?”
“뭐?”
“마법이 걸린 자루잖아요. 금고에 있는 돈을 옮기려는 거죠?”
부인이 빠르게 다가가 게텔린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무슨 일이 생겼군요? 왜 이걸 당신 혼자 챙겨요? 어디로 가져가려는 거죠?”
“내 걸 내가 챙기지 그럼 누굴 줄까!”
게텔린이 제 부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얄따란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기둥에 강하게 머리를 부딪친 게텔린 부인이 휘청거렸다.
딸이 다가가 부축하는 동안 게텔린은 독살스러운 눈빛으로 쓰러진 부인을 쏘아 보았다.
부인이든 자식이든 게텔린 본인이 백작위를 유지할 수 있을 때나 필요한 것이다.
‘도망가는 마당에 저딴 것들이 어떻게 되든 알 게 뭐야.’
그는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곧 그 모든 악행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면 그에게 내려질 것은 사형밖에 없다.
‘아르만 놈의 정보를 듣고 재산을 은닉해 두길 잘했어.’
하마터면 눈앞에서 재산을 몰수당할 뻔했다.
주머니에는 10톤까지 들어가니 모아 놓은 돈과 보석들을 전부 들고 다른 나라로 도망치면 된다.
그는 저택을 나와 잠시 기사단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데리고 가면 무력에는 도움이 되겠으나 돈을 보고 눈이 돌아 자신을 배신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배신할 것이다.
충성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들이니 말이다.
‘어차피 따라올 사람도 없으니까 혼자 움직여야겠군.’
게텔린은 삽을 챙겨 들고 말에 올랐다.
돈은 썩어 넘칠 정도로 많으니 어디를 가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음침하게 웃으며 숲으로 들어갔다. 중간중간 심어 놓은 하얀 나무를 따라가자 계곡이 나왔다.
게텔린은 말을 타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줄기의 너비가 점점 넓어지더니 이내 거대한 웅덩이가 나왔다. 그 위로 암석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모양의 절벽이 우뚝 서 있었다.
절벽을 타고 많은 양의 물이 어지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게텔린은 왼쪽 엄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오른쪽에 옮겨 꼈다. 그는 절벽과 마주 선 채 양 팔을 앞으로 뻗어 술에 취한 사람처럼 손을 흐느적거렸다.
그 손짓에 따라 암석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물줄기와 함께 양 갈래로 쫙 갈라졌다.
“흐흐, 흐하하하!”
어마어마한 보물 속으로 뛰어들며 게텔린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정신없이 자루에 재물을 쓸어 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암석이 서서히 닫히며 그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 주었다.
***
나는 룩소르의 서명을 받은 문서들을 잘 말아 쥐고 기사단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훈련하는 사람이 있었다. 항상 나와서 체력을 단련하는 놈들이었다.
그중 몇 명의 얼굴을 머리에 새겨 둔 뒤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기사단장이 누구야?”
훈련을 멈춘 이들이 나를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막내 공주님?”
“독을 먹고 쓰러지셨다고 들었는데.”
나서는 놈이 없는 것을 보니 저 중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방금 일어났고, 급한 일이니까 가서 기사단장 데려와.”
내 말에도 기사들은 내가 진짜 막내 공주가 맞는지 긴가민가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요 며칠 암살자 내쫓는다고 성질을 내고 다녔던 탓인가 보다.
“빨리 안 데려와?”
성질을 부리자 그제야 ‘막내 공주가 맞나 보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도 누굴 데리러 가는 놈은 없었다.
대신 개중에 제일 직급이 높아 보이는 놈이 대답했다.
“기사단장은 아직 출근 전입니다.”
맞다. 보통은 출퇴근하지. 내가 황제였을 적에 기사단장이었던 놈은 황궁에서 살다시피 해서 잊고 있었다.
나는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며 반지를 꺼내 보았다.
반지를 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시간 남짓이었다.
기사단장이 출근할 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는다.
“그럼 일단 있는 놈들 다 불러와.”
기사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더니 제일 앳돼 보이는 놈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곧 40명 남짓한 인원이 밖으로 나왔다.
제대로 줄도 못 맞추고 광장에 모인 잡상인들처럼 뭉쳐 있는 것이, 아주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군사력은 나라의 근간인데. 이러니, ……어휴. 말을 말자. 한탄하기도 지친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있다가 손가락을 들었다.
“너, 너, 너. 세 명은 옆으로 빠져.”
그동안 연무장을 들락거리며 눈독 들여 둔 세 놈을 옆으로 빼놨다.
“1열은 지금 당장 안으로 들어가서 시종장과 게텔린을 잡아들여. 죄목은 왕족 살해 공모 및 살해 미수죄. 누가 뭐라 그러면 내가 왕명을 받고 시켰다고 해.”
기사들은 왕족 살해라는 말이 나오자 저희들끼리 떠들던 것을 멈췄다.
그제야 분위기가 좀 심각해졌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게텔린 저택으로 가서 종이란 종이는 다 털어 와.”
명령이 끝났음에도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의 눈치만 보며 꾸물거리는 걸 보니까 분통이 터지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공주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안 움직여?”
위협을 해도 기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것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할까 잠시 고민하는데 첫째 줄 가운데에 있던 놈이 앞으로 나서서 나를 타일렀다.
“하지만, 공주님. 이건 놀이가 아닙니다. 그러다 나중에 큰일 날 수가 있어요.”
저게 재수 없게 어디서 애 취급을 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다시 손에 힘을 뺐다.
참. 지금은 애 몸에 들어 있지. 그러면 애 취급을 할 수도 있지. 진정하고 놈의 눈앞에 룩소르의 칙령서를 펼쳐 보였다.
“봐. 왕명이야. 이래도 안 움직여?”
“단장님의 허락 없이는 행동할 수 없습니다.”
또 슬슬 정수리에 열이 올라왔다.
얘는 뭐 하는 새끼지? 왕의 서명을 보고도 단장 소리가 나와?
뒤에 있던 다른 놈이 내 눈치를 보더니 앞에 나선 놈에게 다가가 속닥거렸다.
“부단장님. 그냥 하시죠.”
부단장이구나? 보아하니 룩소르를 주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에게는 국왕 전하보다 기사단장이 높은 사람인 모양이지?”
부단장이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왕족 살해 미수가 경비 서는 것과 비슷한 일인가?”
싸늘한 내 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나는 그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올려다봐야 하는 게 언짢아 부단장의 멱살을 잡아끌어 내렸다.
“그런 거라면 내가 그대에게 반역의 죄를 물어도 할 말이 없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