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누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방금 꼬질이라고…….”
이라네리아는 말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후드를 뒤로 젖혔다.
더 충격적인 것을 보여 주어 아까 들은 말을 잊게 할 생각이었다.
효과는 대단했다.
“헉!”
“공주, 공주님?”
“독을 먹고 쓰러지신 분이 여긴 어떻게……!”
여기저기서 헛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에 가장 놀란 것은 단연 룩소르였다.
그는 눈물을 후드득 흩날리며 달려와 이라네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이라네리아는 한숨을 삼키는 표정으로 흐느끼는 룩소르를 밀어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안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 룩소르를 꾸짖었다.
“전하 뚝! 위엄 없게 신하들 보는 데서 왜 울고 그래?”
그녀는 룩소르의 품에서 벗어나 탁자로 향했다.
룩소르가 뒤를 따라가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몸은, 몸은 괜찮은 거고?”
“괜찮으니까 여기 있겠지. 전하도 일단 자리에 앉아 봐.”
이라네리아가 손짓했지만 룩소르는 자리에 앉는 대신 제 딸을 한 번 더 끌어안으려고 했다.
이라네리아는 허리를 숙여 룩소르의 팔 아래로 쏙 빠져나간 뒤 그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가 구부정한 자세로 따라와 상석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귀족 중 한 명이 멍하게 물었다.
“어떻게 갑자기 나타나신 겁니까?”
이라네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반지를 꼈다가 뺐다가를 반복했다.
그녀의 모습이 반딧불이의 모습처럼 깜빡거렸다.
경악하는 귀족들을 내버려 둔 채 이라네리아는 룩소르의 옆에 서서 다섯 명의 귀족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눈빛은 온순하고 행색은 꼬질꼬질했다.
어디서 저런 애들만 모아 왔나 싶을 정도였다.
‘다 룩소르 같네.’
이라네리아는 룩소르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던 룩소르가 제 딸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이라네리아가 한쪽 구석에 얌전히 서 있는 시종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일단 저것부터 내보내.”
룩소르는 왜 시종장을 내보내라고 하는 건지 모르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종장에게 나가 있어 달라고 부탁하려다 문득 오틸리에가 떠올랐다. 지금쯤 빈방을 보고 놀라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서 왕비에게 이라네리아를 신전으로 데려가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 주게. 그러고 나면 오늘은 이만 쉬고, 여기서 본 것은 함구해 주게나.”
“예. 전하.”
시종장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이라네리아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입을 열었다.
“내가 키네시아랑 가서 게텔린 저택을 좀 털어 왔거든?”
모인 사람들이 동시에 입을 떡 벌렸다.
몇몇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라네는 손짓으로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다들 일렬로 앉아 봐.”
귀족들이 얼빠진 표정으로 이라네리아의 지시를 따랐다.
이라네리아는 나란히 앉은 꼬질이들 앞에 서서 마법 주머니를 뒤집었다.
수백 장의 종이가 책상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그런데 게텔린 이놈이 서류 정리를 하나도 안 해 놨더라고.”
“혹시, 그럼,”
“맞아. 이것 좀 정리해 줘야겠어. 차용증이나 채권은 여기, 불법 행위 관련 문서는 여기, 그리고 재산 증명에 대한 문서는 여기, 기타 문서는 저기. 이해했지?”
다들 이라네리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그녀는 친절하게 넋 나간 귀족들의 얼굴 앞에서 손뼉을 부딪쳐 주었다. 코앞에서 큰 소리가 나자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키네시아를 사형하자고 난리 치기 전에 빨리 끝내야 해. 설마 공주들이 목숨을 걸고 증거를 구해 왔는데 이런 일도 안 할 건 아니지?”
“하, 하겠습니다.”
귀족들이 눈과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서를 정리할수록 그들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이라네리아는 까치발을 들고 정리된 문서들을 보았다.
안에는 채무자를 불구로 만들어 놓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손에 피 묻히는 일은 사람을 시켜 처리하고 보고서만 받은 모양이다.
제 악행을 전리품처럼 모아두고 틈이 날 때마다 금고에 들어가서 들춰 봤겠지.
‘하여튼. 기분 나쁜 놈이라니까. 빨리 내 궁전에서 치워 버려야겠어.’
그녀는 의자에 앉아 붕 뜬 발끝을 까딱이며 시종장이 나간 쪽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룩소르가 물었다.
“그럼 혹시, 그동안 궁정인들을 괴롭힌 것도…….”
“아. 걔네는 게텔린이 고용한 암살자들이었어. 소란스러워지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고, 여러모로 귀찮으니까 조용히 치우려고 그런 거야.”
“암살, 암살이라니……!”
룩소르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가 질끈 눈을 감자 이라네리아가 경고했다.
“기절하지 마.”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룩소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 멍하니 있다가 이라네리아의 재촉에 다시 손을 움직였다.
문서가 쌓여 갈수록 룩소르의 얼굴이 착잡해졌다.
“게텔린 백작이, 이런 사람이었다니……. 그럼 딸이 아프다는 것도 거짓이겠구나.”
“그걸 이제 알았어?”
“그는…….”
룩소르의 구구절절한 말이 이어졌다.
양치기로 살 때, 오틸리에가 병에 걸렸고 치료를 도와준 게 게텔린 백작이었다. 거기다 룩소르를 궁전으로 데려와 유례없는 호사를 누리게 해 주었다.
그에게 왕위를 제안하고 반대하는 이들을 막아주었다.
“그래서 그를 믿었던 것인데, 믿고 싶었는데……. 뒤에서 이런 잔악한 짓을 하고 있었구나.”
“흐응.”
이라네리아는 관심 없다는 듯 무성의한 콧소리를 내며 책상으로 갔다.
그리고 무언가를 휘갈겨 쓰더니 룩소르에게 내밀었다.
“서명해 줘.”
“나는 게텔린 백작을, 응?”
룩소르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기울였다.
“서명.”
“리아야. 아빠가 말하고 있는데…….”
“서명! 빨리.”
“이, 이게 무엇이냐?”
“호위 3명 고를 수 있게 허락한다는 내용이야. 그리고 이건 명령서.”
안에는 게텔린 백작의 저택을 조사해야 하니 종이로 된 것은 전부 가져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장은 이라네리아의 말대로 호위를 고르게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암살 소리를 듣자마자 호위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룩소르는 여전히 착잡하고 기운 없는 얼굴로 두 장의 종이에 서명했다. 깃펜을 떼어내자마자 이라네리아가 종이를 쏙 빼갔다.
“좋아. 그럼 열심히 분류해. 나는 갈게.”
“어디를 간단 말이냐?”
“이쯤 기다려 줬으면 된 것 같아서. 호위 고르러.”
“뭘 기다렸다는……!”
이라네리아는 룩소르가 질문을 끝내기도 전에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귀족들과 룩소르는 귀신에 홀린 사람들처럼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의외로 룩소르였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다 귀족들에게 말했다.
“계속합시다.”
집무실은 다시 종이 넘기는 소리로 가득 찼다.
***
시종장은 문에 귀를 대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엿들었다.
“걔네는 게텔린이 고용한 암살자들이었어. 소란스러워지면…….”
이라네리아 공주는 앳된 목소리와 똑 부러지는 발음으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증언하고 있었다.
말하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으나 시종장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했다.
그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이라네리아 공주의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는 오틸리에 왕비와 로그리예 아미르가 서 있었다.
“로그리예 공자. 계속 이렇게 문 앞을 막고 계시면 곤란해요.”
“이해해 주세요, 전하. 그래도 공주님 상태는 괜찮아요. 이제 막 편하게 잠들었는데 깨면 안 되잖아요.”
듣자 하니 실랑이가 벌어진 지 좀 된 것 같았다.
시종장은 왕비가 로그리예를 밀어내고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서둘러 그녀를 불렀다.
“전하.”
오틸리에가 뒤를 돌아보았다.
“시종장?”
“예. 국왕 전하께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귀 좀…….”
오틸리에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장이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 룩소르가 한 말을 속삭였다.
신전에 데려가지 말고 그냥 두라니. 오틸리에게 그 말은 이라네리아의 치료를 포기한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룩소르는 살릴 수 있는 딸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거야.’
오틸리에는 로그리예에게 잠시 시선을 준 뒤, 몸을 시종장에게로 완전히 틀었다.
“전하는 어디 계시죠? 제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겠어요.”
“집무실에 계십니다.”
오틸리에가 곧장 걸음을 옮겼다.
시종장은 그녀를 따라가지 않고 자리를 뜨려다 로그리예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로그리예는 차가운 눈으로 픽 웃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등골이 오싹해진 시종장은 걸음을 빨리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손님들이 머무는 곳으로 가 누군가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큰일 났습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이라 그런지, 게텔린은 큰 소리에도 깨지 않았다.
시종장은 코를 고는 게텔린 백작에게 달려가 그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백작님. 일어나 보십시오! 큰일 났습니다.”
“으음. 뭐야? 누구야?”
“접니다. 방금 국왕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는데-”
게텔린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당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베개를 들어 시종장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국왕이 사람을 모아 봤자 뭘 할 건데? 어? 그게 뭐라고! 고작 그딴 일로 나를 깨워?”
시종장은 맞으면서도 말을 이었다.
“이라네, 공주가, 키네시아 공주랑, 백작님 금고를 털었답니다!”
시종장의 머리를 내리치던 베개가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뭐라고?”
게텔린은 잠을 깨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