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백작 부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이미 제법 떨어진 곳까지 가 있었지만, 그녀가 든 랜턴 덕에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가깝게 따라가다가 게텔린 백작 부인이 문을 연 틈을 타 방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짧은 다리로 어른의 걸음을 따라잡는 건 매우 힘들었다. 거의 달리다시피 했기에 숨이 차올랐다.
‘반지가 숨소리까지 감춰 줘서 다행이지 아니면 영락없이 들킬 뻔했어.’
벽에 몸을 기대고 무릎을 짚었다. 상체를 숙인 채 숨을 고르는데 게텔린 부인의 그림자가 바닥을 훑으며 스쳐 지나갔다.
이라네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붉은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게텔린 부인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는데, 눈이 붉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인상이었다.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나와 눈이 마주친 건 전혀 평범하지 않지만 말이다.
‘정말 날 보고 있는 건가?’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신성력은 마법에 저항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만약 저 붉은 눈의 남자가 레바나의 고위 사제이거나 성자라면 마법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텔린 백작의 서랍에서 발견한, 레바나 신전의 문장이 찍힌 편지가 떠올랐다.
들킨 것 같은데, 밖으로 나갈 순 없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가 닫히면 게텔린 부인이 내 존재를 눈치챌 것이다.
그녀가 사병을 움직이면 금고를 털고 있는 키네시아가 붙잡힐지도 모른다.
‘마법 물품을 쓸 때는 당연히 신관의 존재를 염두에 뒀어야 했는데.’
실수는 실수고, 지금은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남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붉은 안광이 점점 가까워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게텔린 부인은 그저 의아한 얼굴로 남자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에리오 님, 왜 그러시죠? 거기 뭔가 있나요?”
남자가 대답하지 않고 허리를 숙이며 손을 뻗었다.
손이 닿기 전에 피할 생각으로 그의 손끝을 바라봤다. 푸른 손끝이 가까워지고 그의 손등에 새겨진 문양이 보였다.
보라색 태양.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남자를 바라봤다. 창백한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남자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내 볼을 스쳐 지나 얼굴 옆의 벽을 짚었다.
“아름답군요.”
“그림을 보고 계셨던 거군요. 그건 제가 특별히 아끼는 그림이랍니다.”
나를 본 게 아니었어?
간 떨어져 죽는 줄 알았네!
긴장이 탁 풀리자 의미심장하게 움직인 놈에게 불쑥 짜증이 치밀었다.
저놈은 왜 못 본 걸 본 척하고 난리야?
씩씩거리는데 남자가 허리를 폈다.
감히 위대한 황제의 간을 쥐락펴락한 그림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보자 싶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엔, 내가 있었다.
“초대 황제의 초상화를 모방해 그린 건데, 작긴 해도 그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어요. 과연 성자까지 타락시킨 폭군답지 않나요?”
폭군 아니야! 타락시킨 적도 없어!
정수리를 콕콕 쑤시는 분노를 잠재우는데 등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목덜미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뒤를 돌자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자꾸만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거 안 보이는 거 맞아?’
옆으로 몸을 비켰다. 다행히 눈동자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자가 내 초상화를 뚫어지게 보고 있어서 그런지, 마치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묘하고, 불쾌하네.’
빨리 둘이 만난 목적이나 말해 줬으면 좋겠다. 듣고 키네시아에게 가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몸을 돌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내 초상화에 고정되어 있었다.
게텔린 부인은 에리오라고 불린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금괴를 내밀었다.
“여기, 얼마 안 되지만 교단에 기부하고 싶어서요.”
“매번 감사합니다, 부인.”
금괴가 남자의 품으로 들어갔다.
용건이 끝났다는 듯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게텔린 부인은 무언가를 기다리듯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남자의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그제야 게텔린 부인이 남자를 급하게 붙잡았다.
“잠, 잠시만요! 그……, 그, 그림! 저 그림을 드릴까요?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은데.”
“마음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진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거든요.”
남자의 붉은 시선이 다시 내 초상화에 꽂혔다.
게텔린 부인이 남자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그러면 저도 이제 기적을 목격할 수 있는 건가요?”
“아직은……. 하지만 기다리시면 곧 차례가 되실 겁니다.”
남자가 부드러운 손짓으로 게텔린 부인에게 잡혀 있던 옷자락을 빼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부인.”
붉은색 눈동자가 초상화를 가볍게 훑고 나에게 닿았다.
그래. 나에게.
두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분명 그랬는데, 남자는 게텔린 부인에게 내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그저 어렴풋이 미소 짓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뭐야, 저놈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는데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내 초상화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옅게 한숨을 내쉬고 방을 나갔다.
다시 문을 여는 건 부담스러웠기에 나 역시 그녀를 따라 나갔다.
나는 휩쓸리듯 밖으로 나온 뒤에도 몇 가지 단어를 속으로 되뇌었다.
‘펠리온과 급감한 마법사의 수. 에리오라는 남자. 레바나 신전.’
이것 봐. 알감자처럼 줄줄이 딸려 나올 줄 알았다니까.
속으로 혀를 차며 키네시아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키네시아는 금고 안에 들어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이 잘 잠겨 있나 다시 한번 확인하고 조각상을 돌렸다.
동시에 안에 있는 문이 열렸다.
키네시아가 몸을 움찔하더니 나인 것을 확인하고 작게 안도했다.
“여기. 다 챙겼어.”
키네시아가 내게 주머니를 건넸다.
입구를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번쩍이는 것은 없고 종이만 한가득 들어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고생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게텔린 백작 부인이 꺼내 온 금괴가 눈에 밟혔다. 저 안에 잔뜩 들어 있을 텐데. 혼자라도 들어가서 가져올까?
아쉬운 눈으로 금고를 보다가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 2시간 뒤에는 사용인들이 깨어나 청소를 시작할 터였다.
조금 더 지체하면 돌아가기 빠듯할 것 같았다.
아쉽긴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더 큰 재물이 내 손에 굴러떨어지게 될 테니까.
자고로 군주란 자잘한 것에 연연하지 않는 법.
나는 미련 없이 금고를 등졌다.
***
수심에 짓눌려 감겨 있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그가 끙끙거리자 손을 잡고 있던 오틸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룩소르. 정신이 들어요?”
“오틸리에. 이게 어떻게 된……, 우리 딸들! 우리 딸들은, 키네샤와 리아는 어찌 되었소?”
오틸리에가 울음을 삼키며 침대 위에 엎드렸다.
“아직은 무사해요. 아직은…….”
“아아. 샤마흐시여……. 감사합니다.”
오틸리에가 고개를 들어 힘겹게 일어나는 룩소르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리아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고 키네샤도……. 게텔린 백작이 계속 재판해야 한다는 걸 겨우 막고 있을 뿐이에요.”
“오틸리에.”
“어쩌면 좋죠, 룩소르? 어쩌면 좋아요.”
룩소르는 눈물을 흘리는 오틸리에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소.”
오틸리에가 룩소르의 품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제 아내를 꼭 끌어안고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틸리에. 리아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내가 재상에게 우리를 도와줄 사람들을 모아 달라고 하였는데, 그건 어떻게 되었소?”
“모이긴 했는데, 다섯 명밖에 되지 않아요.”
“그래도 해 보아야지. 어떻게든 아이들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룩소르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났다. 그는 자신을 부축하는 오틸리에의 손을 꼭 잡고 부탁했다.
“의사를 대동해서 리아를 신전으로 데리고 가 주시오.”
사실 이미 반세기 전, 의술은 신성력을 앞질렀다.
옛날에는 성스러운 자의 손길 한 번으로 모든 병과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이제 전설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고 싶었다.
“알겠어요, 룩소르.”
오틸리에가 룩소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부랴부랴 방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룩소르는 종을 울려 시종장을 불렀다. 그리고 그의 부축을 받으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재상을 불러오게나.”
“예, 전하.”
시종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상 하먼 블랭크스가 국왕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룩소르는 인사하려는 자들을 손으로 말리고 시종장을 내보냈다.
“내가 그대들을 부른 건 알다시피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오.”
“상황은 재상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송구하오나, 전하. 다들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재판 시작을 늦춰 주시면, 그동안에 어떻게든 키네시아 공주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내겠습니다.”
“저는 독에 대해 해박한 의사를 불러 두었습니다. 그때까지 이라네리아 공주님이 버텨만 주신다면…….”
다들 같은 말뿐이었다. 버텨라. 기다려라. 하지만 그러다가는,
“기다리다 뒈지겠네.”
앳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룩소르는 제 마음의 소리가 새어 나간 줄 알고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환청을 들은 건가 싶었는데 귀족들도 하나같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때, 문 앞에서 돌연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전하. 안녕, 꼬질, 아니, 왕당파 여러분.”
경계하는 귀족들을 앞에 두고, 이라네리아가 드물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