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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27화 (27/151)

<27화>

밖으로 나와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르만과 합류한 뒤 정문 밖에 있는 경비병이 교대하는 틈을 타 궁전을 빠져나왔다.

멀지 않은 숲에 미리 준비해 둔 말 두 마리가 묶여 있었다. 그런데,

“말이 이렇게 큰 동물이었나?”

말의 어깨가 내 키보다 높았다. 저걸 어떻게 타지?

멍하니 안장만 보고 있는데 키네시아가 먼저 능숙한 솜씨로 말에 올라 탔다. 그리고 도와주겠다는 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르만.”

손가락으로 키네시아가 탄 말을 가리키자 그가 내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키네시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나를 끌어당겨 주고 아래에서는 아르만이 밀어주었다. 그렇게 낑낑거리며 키네시아의 뒤에 타고 나자 묘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괜찮다. 황제는 수치가 없는 법.

“뭐 해, 빨리 게텔린 저택으로 안내하지 않고?”

그러니까 지금 내가 아르만을 재촉하는 건 민망해서가 아니다.

내가 눈짓하자 그가 말에 올랐다. 우리는 반지를 뺐다 껴 모습을 감추고 게텔린의 저택으로 향했다.

“정말 얼마 안 걸리네.”

이런 놈이 내 궁전 근처에 살다니. 어쩐지 불쾌하다. 투덜거리며 게텔린 저택 근처에서 말을 멈췄다.

키네시아가 먼저 내려 튼튼해 보이는 나무에 말고삐를 묶었다.

아르만도 옆에 말을 묶어 두고 나에게 다가왔다.

“내려.”

“예, 공주님.”

아르만이 나를 내려 주며 물었다.

“저는 뭘 하면 됩니까?”

“길 안내나 해. 게텔린 백작 집무실로 갈 거야.”

“알겠습니다.”

모습도 없고 기척도 감췄기 때문에 몰래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르만은 저택 후문을 이용해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아르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게텔린 백작의 집무실입니다.”

“침실은?”

“옆방인데, 집무실 안에 침실로 통하는 문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옆에서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키네시아가 조심스럽게 몇 번 더 문을 열려고 시도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잠겼어.”

“비켜 봐.”

내가 누군데 이런 것에도 대비하지 않았을까 봐.

허리춤에 찬 일반 주머니에서 쇠로 된 핀 두 개를 꺼냈다. 열쇠 구멍 안에 집어넣고 요령껏 안을 긁어 대자 툭,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대로 키네시아와 아르만을 보며 문을 열어 툭 밀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있던 키네시아가 소곤소곤 물었다.

“이런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왕족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소양이지.”

“도적이 아니라?”

가볍게 코웃음 쳐 건방진 소리를 무시하고 문 안으로 키네시아와 아르만을 들여보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창문을 확인했다. 커튼은 잘 닫혀 있었다.

나는 초에 불을 붙여 키네시아에게 하나 건네주고, 하나는 내가 들었다.

멀뚱히 서 있는 아르만에게는 게텔린 백작이 애용할 것 같은 금붙이 중 가문의 문양이 들어간 것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것도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아르만이 아무것도 받지 않은 채 물었다.

나는 생물을 담을 수 있는 빈 주머니부터 내밀었다.

“이건 아까 설명을 들어서 알 테고.”

그리고 이번에는 속이 꽉 찬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건 금화.”

“예?”

“가져가.”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가 광산에 있다며. 지금 가서 게텔린의 목걸이를 보여 주고 면회를 허락받았다고 해. 나머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

“몰라? 말해 줘야 하니?”

“공주님…….”

“아버지를 만나면 주머니에 들어가시라고 하고, 빠져나와서 도망쳐. 마법 반지를 이용하면 쉽게 따돌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금화로는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하는 데에 써. 수도랑 멀면 멀수록 좋고.”

아르만이 내가 내민 것들을 양손으로 공손하게 받고는 꽉 움켜쥐었다.

“저는.”

그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저는 공주님 곁에…….”

“바쁘니까 짧게 해.”

“……아버지를 안전한 곳에 모셔 드리고 돌아오겠습니다.”

“왜?”

“예?”

아르만이 환청이라도 들은 얼굴로 되물었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패서라도 쫓아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황제의 위엄이 있기에 야만스럽게 폭력부터 휘두르진 않았다.

“왜 돌아와. 정착해서 살라니까?”

“저에게 공주님의 사람이 되라고…….”

“근데 안 됐잖아. 네 쓸모는 여기까지니까 돌아올 필요 없어.”

……대화를 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나는 망을 보라고 손짓하고 아르만을 보았다.

커다랗게 떠진 진녹색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곧 굵게 맺힌 눈물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 성큼 다가갔다.

“여기서 울면 어떡해! 바닥에 얼룩 생기잖아.”

방에 누가 잠입했었다고 티 낼 일 있나?

바닥을 신발로 문질러 눈물 자국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는데, 아르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돌아오면 받아 주실 겁니까?”

“아니.”

제 아버지의 목숨이 걸리면 언제든 흔들릴 놈이다. 그런 놈을 곁에 둬서 뭐 해? 손만 많이 가지.

“그만 질질 짜고, 가서 아버지랑 행복하게 살아.”

더 대화할 필요가 없기에 몸을 돌렸다.

문에 귀를 댄 채 망을 보고 있던 키네시아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고 아르만에게는 으름장을 놓았다.

“빨리 안 꺼져?”

그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질척이던 것과 달리 미련이 남지 않은 사람처럼 뒤돌아 문밖으로 나갔다.

좋아. 번거로운 건 하나 치웠고.

이제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해야지.

“금고부터 찾아. 나는 오른쪽, 너는 왼쪽부터 뒤지고 없으면 침실로 넘어가는 거야.”

“알겠어.”

그림과 카펫을 들춰 보고 책도 하나씩 빼 보면서 방 안을 수색했다.

키네시아는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우려는지 가끔 나를 힐끔거렸다.

그렇게 몇 시간을 뒤졌지만 금고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혹시 집 안이 아니라 밖에 뒀나?’

그럴 리 없는데. 원래 게텔린 같이 탐욕스럽기만 하고 배포가 없는 놈들은 구린 걸 가까이에 두는 법이다.

가깝고, 개인적인 곳.

마음만 먹으면 자기가 빼앗은 것들을 보며 음침하게 웃을 수 있는, 그런 곳.

‘서재가 아니라 침실인가?’

고개를 돌렸다. 키네시아는 여전히 왼쪽에서 숨겨진 금고를 찾고 있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게텔린의 책상으로 갔다.

서랍을 차례대로 열어 봤다. 끈이나 왁스, 부싯돌 같은 잡동사니만 가득했다.

맨 마지막 서랍에는 편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는데, 손으로 대충 휘저어 보니 익숙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이건 레바나 신전의 문장인데.’

편지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뜯어보기도 전에 키네시아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나는 편지를 마법 주머니 안에 넣으며 서랍을 닫았다.

“침실로 가 보자.”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섰다.

그녀는 신중한 태도로 침실과 연결된 문을 열었다. 내가 먼저 들어가고 그녀가 뒤따라 침실로 넘어왔다.

그리고 막 문을 닫으려는 찰나. 침실 문고리가 달그락거렸다.

잠긴 걸 아니 그냥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서재와 연결된 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리고 침대로 다가가려는데 열쇠 소리가 들렸다. 이내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열렸다.

나는 재빨리 나와 키네시아가 들고 있던 초를 후 불어 꺼트리고 연기를 손으로 흐트러트렸다.

안으로 들어온 여자가 우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램프 불빛이 나와 키네시아 쪽을 한 번 훑고는 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램프 불빛에 여자의 얼굴이 여실히 드러났다.

침실에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들어온 사람은 게텔린 백작의 부인이었다.

‘부인이 여긴 왜 온 거지?’

보통 귀족들은 결혼해도 방을 따로 쓴다.

아무리 게텔린 백작의 부인이라도 주인 없는 방에 문을 따고 들어오는 건 이상하다는 뜻이다.

그녀는 밖과 안을 한 번 더 쓱 둘러보고 문을 잠갔다.

그리고 우리의 맞은편, 침대 쪽으로 가서 한 동상 앞에 섰다.

천으로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여자가 제 몸을 우아하게 감싸 안고 있는, 딱 게텔린 같은 놈이 좋아할 것 같은 동상이었다.

게텔린 백작 만지기 싫은 것에 손을 대는 사람처럼 고개를 뒤로 쭉 빼고 동상의 잘록한 허리를 잡아 돌렸다.

그러자 벽 옆면이 미닫이문처럼 열렸다.

그 안에는 퍼즐처럼 생긴 잠금장치가 있었다. 그것을 이리저리 밀어 위치를 조정하니 벽이 한 번 더 열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저기다.’

키네시아를 툭 건들자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갔던 게텔린 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괴 몇 개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금고로 추정되는 곳의 문을 닫자 석상과 벽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이 시간에 주인 없는 방에 들어와서 금괴를 꺼내 가다니.’

수상하기 짝이 없다. 따라가 보면 뭐가 커다란 게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하는 사이 게텔린 부인이 방을 나갔다. 나는 마법 주머니를 키네시아에게 떠넘기고 걸음을 옮겼다.

“키네시아. 안에 있는 거 담고 있어.”

“너는?”

“금방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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