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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26화 (26/151)

<26화>

“보입니다.”

“저기로 내려가게 도와주고 너는 정문으로 가 있어.”

“알겠습니다.”

이라네리아가 아르만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매듭이 지어진 것처럼 서로의 손목을 교차해 잡았다.

그 상태로 이라네리아는 창틀을 넘었다. 아르만은 상체를 창밖으로 빼내어 천천히 팔을 창틀 아래로 늘어트렸다.

딱 그 길이만큼 이라네리아가 아래층 발코니와 가까워졌다.

발밑으로 자신의 키만큼의 공간이 남아 있었다.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높이였다.

“놔!”

이라네리아가 작게 소리치자 아르만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녀는 안전하게 발코니에 착지한 뒤 위를 올려다보며 가 보라고 손짓했다.

아르만이 창문을 천천히 닫는 것을 확인하고 이라네리아는 잠시 아래를 보았다.

1층에 기사들이 있었으나 위에서 창문이 열렸다 닫힌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이라네리아는 난간 아래로 몸을 숨기고 소리를 내기 위해 반지를 빼냈다.

-똑똑

창문을 두드린 이라네리아는 곧장 반지를 껴 모습을 감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소파에 웅크려 있던 키네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빼 창밖을 살피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소리의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1층에서 들린 소리인가 싶어 완전히 밖으로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이라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자적하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누가 지나간 줄도 모른 채 주위를 둘러보던 키네시아만 기사들에게 발각되었다.

“공주님! 나오시면 안 됩니다!”

제법 험악한 목소리에 놀란 키네시아가 한 발을 뒤로 뺐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셔 진정하고 잠시 경비를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안녕?”

소파에 앉아 있는 이라네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키네시아는 심장이 주저앉을 정도로 놀랐지만 동시에 눈물이 날 정도로 안심했다.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구명줄을 잡은 것처럼 든든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이 전부 우습게 느껴져 눈물이 날 정도였다.

“폐!”

“쉿.”

이라네리아가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가져다 댔다. 키네시아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라네리아는 검지를 그대로 뻗어 아직 열려 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키네시아가 재빠르게 창문을 닫고 성큼성큼 걸어 이라네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이라네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목소리를 죽였다. 그러나 격양된 어조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독은 뭐고, 여긴 어떻게, 혹시……! 너, 너 혹시 리아니?”

리아겠냐? 이라네리아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야?”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이라네리아는 제 어깨 위에 있는 손을 털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네시아는 제 동생의 몸이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소리 없이 눈물 몇 방으로 떨구는 키네시아에게 이라네리아가 반지를 내밀었다.

“게텔린 털러 갈 건데, 같이 갈래?”

키네시아는 손을 뻗으려다 잠시 망설였다.

“아르만은…….”

“아직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중이야.”

“독을 먹었다는 건, 어떻게 된 거야? 거짓말이야?”

“진짜 먹은 건 맞아. 하지만 귀찮으니까 설명은 나중에.”

여전히 키네시아는 혼란스러웠다.

“거긴 왜 가는데? 아르만이 폐하 사람이라면 이미 증거는 충분하지 않아?”

“이대로 게텔린이 사형당하면 유산은 그대로 게텔린 백작 부인에게 넘어가잖아.”

“……그렇지.”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는 표정이었다.

“쯧쯧. 하여간 재물에 관심이 없는 건지, 순진한 건지.”

“…….”

“게텔린 하고 다니는 걸 봐. 분명 재산 중 태반이 불법적으로 모은 걸 거야. 지금 재판에 넘기면 그놈이 분명 사람을 시켜서 증거를 은닉할 거란 말이야.”

“잡아들이는 김에 게텔린 백작이 저지른 범죄를 전부 밝혀서 한꺼번에 재판받게 하려는 거구나.”

키네시아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이라네리아를 바라봤다.

“그렇지.”

안 그렇다.

그녀의 목적은 오직 불법적으로 증식한 재산을 합법적으로 가져오는 것뿐이었다.

게텔린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건 부차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라네리아는 뻔뻔하게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수상해 보이는 서류가 있으면 싹 다 챙겨야 해.”

“알겠어.”

“그리고 수상한 보석이나 금괴 같은 것도 보이면 가져오고.”

“그건 절도 아니야?”

“어차피 범죄 행위가 밝혀지면 가져올 건데 뭐.”

“그럼 그때 가져오면 되잖아.”

얄밉게 맞는 말만 하네!

이라네리아가 참지 못하고 키네시아에게 딱밤을 선물했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이상한 일이었다. 가볍게 대화를 하고 딱밤까지 한 대 맞고 나자 얼룩처럼 남아 있던 불안마저 깨끗하게 지워졌다.

키네시아는 평소처럼 바르고 곧은 눈빛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

“좋아. 지금 네가 제일 쓰기 편한 인력이라, 사실 싫다고 해도 데려갈 생각이었어.”

이라네리아는 키네시아의 손을 끌어 강제로 펼친 뒤,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반지를 왜 끼워 주는 거냐고 물을 새도 없이 이라네리아가 키네시아의 손을 잡은 채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가 침대 기둥 하나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어디선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뚱하게 서 있는 키네시아를 데리고 이번에는 침대 왼편에 있는 커다란 초상화로 다가갔다.

“내가 하는 거 따라 해.”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라네리아가 초상화를 밀기 시작했다. 옆에서 힘을 보태자 이내 초상화가 빙글 돌아가며 긴 통로가 드러났다.

“이게 뭐야?”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야.”

“여기에 이런 게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이 방이 내가 어렸을 때 쓰던 방이니까. 뭐 해? 안 들어가고.”

키네시아는 등 떠밀리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이라네리아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초상화를 닫았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 기둥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텅 빈 방 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적이 내려앉았다.

***

나는 비밀통로를 지나면서 키네시아에게 반지와 자루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멍해 보이는 게,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제대로 이해했어?”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동안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났어?”

“로그리예에게 부탁했어.”

정확히는 거래를 한 거지만.

“돈이 많으니까 어디서 사 왔겠지.”

“……이건 마법사 협회가 인정한 판매 가능 물품 목록에 없는 거야. 공간 확장과 경량화뿐만이 아니라 생물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라니.”

“그게 무슨 대수라고? 아는 마법사에게 의뢰하면 되는걸.”

“100년 전에는 그게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대마법사 펠리온이 실종된 이후로 마법사의 수가 급감,”

“잠깐.”

걸음이 우뚝 멈췄다.

“펠리온이 실종? 언제?”

“그거야 이라네 황제가 사망한 다음 해에,”

키네시아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말하다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나한테는 그냥 역사 속 인물이라도 너에게는 각별한 사람일 텐데.”

“각별? 각별이야 하지.”

하지만 걱정하냐고?

대마법사에다가 내 금고까지 털어 간 놈을? 어디서 잘 먹고 잘 살았겠지! 그것도 내 돈으로!

내가 걸음을 멈춘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금고야 그럴 수 있다.

보물이 눈앞에서 번쩍번쩍거리는데 주인도 없다면? 그래, 사람이 좀 홀릴 수도 있지.

그런데 유언을 무시한 건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내가 후계자를 양성하는 데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알고 있었다.

물론 라파일이 있긴 하지만 그는 성직자이기도 하고 원래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 혼자 하이에나 같은 귀족들에게서 어린 황제를 보호하긴 무리였다. 그것을 알기에 펠리온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펠리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 그가 1년 만에 율시안을 두고 사라졌다고? 그 뒤로 마법사의 수가 급감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게텔린 일이 마무리되면 펠리온의 행적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쪼글쪼글해졌을 놈을 찾아내든, 무덤에서 영혼이라도 불러내든, 뭐라고 해 봐야지.

그건 그렇다 치고,

“마법사 수가 급감했다고?”

키네시아가 잠시 내 표정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마법사들은 전부 어렸을 때부터 마법사 협회에 등록하고 마탑에서 키워져. 사용하는 마법은 전부 마법사 협회에 기록되고, 물품을 만들려면 허가를 받아야 해.”

“거부하면?”

“영원히 마력을 봉인 당하고 일반인으로 살게 될걸.”

그러면 무슨 일을 처리할 때 마법의 도움을 받긴 힘들어지겠네.

하지만 강력하게 통제한다고 해도 어딘가 구멍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로그리예, 아니 아미르 공작가는 마탑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마법사와 지속적으로 거래를 하는 사이라는 거군.

“잘됐네.”

“잘돼? 아미르 공작가가 마법사를 이용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만약 반란이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거라면…….”

“반대로 잘만 하면 그 마법사를 우리가 이용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뒤따라오는 키네시아에게 말했다.

“일단은 게텔린에게 집중하자고.”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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