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순순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공주님이 왜 저렇게 누워 있……, 아! 아야.”
고압적인 태도로 말하던 로그리예가 별안간 제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아르만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일어난 건지 이라네리아가 주먹을 말아쥐고 있었다.
“너는 왜 애를 괴롭히고 그래?”
“공주님, 깨어났구나! 괜찮은 거야?”
“괜찮은 거 눈치챘으면서 모르는 척은. 앙큼한 놈.”
“……티 났어?”
로그리예가 배시시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내가 저놈보다 더 어리니까 애를 괴롭힌 건 아니야.”
이라네리아는 로그리예의 시답지 않은 말을 가뿐하게 무시하고 몸을 쭉 늘어트려 기지개를 켰다.
“종일 누워 있느라 좀이 쑤셔 죽는 줄 알았네.”
팔을 내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르만이 귀신이라도 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말한 건 알아 왔니?”
아르만은 곧장 입을 열지 않고 로그리예를 보았다.
이라네리아는 둘에게 한 번씩 눈길을 주고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옷장으로 다가가며 슈미즈의 팔을 빼냈다.
로그리예가 자연스럽게 뒤도는 것을 보고 아르만도 얼떨결에 같이 이라네리아를 등졌다. 뒤에서 옷장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으니까 그냥 말해. 게텔린이 뭐라든?”
“내일까지는 궁전에 있을 모양입니다.”
“흠. 좋아.”
이라네리아는 슈미즈를 벗어 던지고 옷장을 열었다.
뒤돌아 있던 아르만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분명 독을 드셨는데, 어떻게…….”
아르만이 말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한 번 찢어졌던 입술이 따끔거렸다.
이라네리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대비도 안 하고 덜컥 독부터 먹었겠어?”
그녀는 아르만이 제 음식이나 차에 독을 탈 것이라 예상해 며칠 전부터 신성력이 깃든 연고를 물에 타 마시고 있었다.
미리 마셔 두면 신성력이 몸에 남아 빠르게 중화를 돕는다.
이라네리아는 자신이 처음에는 중독 증상을 보였다가 해가 지기 전에 깨어날 거라고 계산했다.
그리고 예상한 시간과 비슷하게 깨어났다.
로그리예가 소식을 듣고 달려오기 전부터 그녀는 사실 멀쩡한 상태였다. 다만 괜찮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되기에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다.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이 없기에 그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아르만은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공주님. 그런데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말해.”
“키네시아 공주님이 범인으로 지목된 후에, 국왕 전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뭐?!”
옷장을 뒤지다 말고 이라네리아가 몸을 홱 돌렸다.
“걱정되시면 제가 깨어나셨는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됐어. 그냥 질질 짜고 말 줄 알았는데. 쯧쯧. 심약하기는.”
이게,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은 10살짜리 공주의 반응이 맞나?
아르만이 당황하고 있을 때 이라네리아가 물었다.
“키네시아는?”
“방에 갇혀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키네시아 공주 역시 발코니에도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럼 걔가 사라져도 아무도 눈치 못 채겠네?”
아버지보다는 자매를 걱정하는 모양이다.
하긴 두 사람은 매일같이 붙어 다니며 귓속말을 속닥거릴 정도로 우애가 깊었으니까.
“예. 나오도록 도울까요?”
“그래야지. 마침 손이 하나 부족했는데 잘됐다.”
걱정이, 맞겠지?
아르만이 이라네리아의 말에 휩쓸린 사이, 이라네리아는 옷장을 이리저리 들춰 보며 황당해하고 있었다.
“왜 바지가 없어?”
그 질문에 시종인 아르만보다 로그리예가 먼저 대답했다.
“잘 찾아보면 있을 거야. 공주님 승마할 때 바지만 입잖아.”
왕이 쓰러졌든 친구가 갇혀 있든 신경 안 쓴다는 투였다.
아르만은 태연자약한 로그리예의 태도에 의문을 품었으나 이라네리아는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
그녀는 가볍게 대답하며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바지 몇 개가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귀족은 보통 승마를 할 때도 치마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라네는 활동적인 일을 할 때면 언제나 바지를 고집했다. 이라네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좋아하는 차나 음식도 그렇고, 취향이 이렇게나 비슷하다니. 후손이라 그런가?’
그녀는 잠시 다른 후손들을 떠올려 봤다.
‘몸 주인의 취향이 고상한 거였군.’
그녀는 생각을 마치고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품이 넓고 풍성한 셔츠 밑단을 바지 안에 넣고 그 위에는 딱 맞는 조끼를 입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가죽 신발을 신으려는데 옆면에 줄줄이 달린 벨트가 보였다.
그녀는 신발에 발을 밀어 넣으며 제 시종을 불렀다.
“아르만.”
“예.”
“신발 벨트.”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르만이 몸을 돌렸다. 같이 뒤를 돈 로그리예가 아르만을 막아섰다.
“내가 할게. 너는 방이나 정리해.”
로그리예가 그렇게 말하고는 이라네리아를 보았다.
저 배은망덕한 하인 놈을 제 사람으로 쓸 예정이라면 여기서 제 것에게 명령하지 말라고 한마디 할 터였다.
그러나 이라네리아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시간 없으니까 아무 놈이나 와서 해.”
로그리예가 싱글벙글 웃으며 이라네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녀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신발 벨트를 정리하는 사이, 아르만은 이라네리아가 대충 벗어 던져 놓은 옷을 정리해 옷장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
그쯤 로그리예도 일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라네리아가 조끼 밑단을 몇 번 잡아당겨 옷을 정리한 뒤, 로그리예에게 물었다.
“내가 부탁한 건?”
“다 가져왔지.”
로그리예가 주머니에서 조그만 보석이 달린 실반지 세 개와 자루 두 개를 꺼냈다. 이라네리아는 그것들을 받아 들고 반지 한 개는 아르만에게 넘겼다.
“껴.”
아르만이 순순히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조금 작아 보이던 반지가 점점 늘어나더니 딱 맞게 변했다.
동시에 아르만의 몸이 사라졌다. 모습뿐만 아니라 심장 소리, 숨소리, 발소리 같은 인기척도 사라졌다.
하지만 본인이 느끼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았다.
“이게 뭡니까?”
직접 보여 주는 게 낫겠다 싶어 이라네리아는 손에 든 반지를 꼈다.
로그리예의 눈에는 이라네리아가 보이지 않았지만 아르만의 눈에는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반대로 이라네리아의 눈에는 아르만이 보이기 시작했다.
“끼고 있는 사람끼리는 보이나 봐?”
이라네리아의 질문에 로그리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보다시피 모습하고 기척을 감춰 주는 반지야. 아. 목소리는 들리니까 조심해.”
“목소리는 왜 들리는데?”
이라네리아가 반지를 빼내며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로그리예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샐쭉 웃었다.
“보지도 못하는데 공주님 목소리까지 안 들리면 내가 너무 슬플 것 같아서?”
이라네리아가 차가운 눈으로 들러붙으려는 로그리예를 피해 반지를 꼈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도 않는 이라네리아의 어깨를 요령 좋게 감싸 안고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그대로 설명을 이어 갔다.
“지속 시간은 8시간이야. 그 뒤에는 가루가 돼서 사라질 거야.”
이라네리아가 어깨를 움직여 로그리예를 털어 냈다.
“내가 만지는 물건도 다른 사람 눈에 안 보이게 돼?”
“아니. 반지를 끼기 전에 지니고 있던 것만 다른 사람 눈에 안 보여. 그것도 몸에서 떨어지면 다른 사람 눈에 보이게 돼.”
“요컨대 입고 있던 옷은 투명해져도 나중에 두른 망토는 혼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구나? 이해했어.”
뭘 숨길 때마다 반지를 끼고 빼야 하는 게 좀 번거로웠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애당초 그냥 숨어 들어가려 했었기 때문에 그 정도 귀찮음은 감수할 수 있었다.
“아르만. 들었지? 잘못하면 물건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되니까 주의해.”
“예, 공주님.”
“자루는?”
“그건 부피가 늘어나지 않는 마법과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마법이 걸려 있어. 100kg까지 담을 수 있고.”
“살아 있는 것도 담을 수 있나?”
“왜? 날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가능한데. 지금 넣어 볼래?”
“아니. 잘 구해 왔네. 수고했어.”
“나와 약혼하겠다는 약속 잊으면 안 돼.”
“당연하지.”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도 로그리예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이라네리아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머리를 몇 번 토닥여 주고 서랍에서 숨겨 두었던 가발 하나를 꺼내 베개에 씌웠다.
이라네리아의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을 가진 가발이었다.
“중간에 전하가 올지도 모르니까 안 들키게 잘해.”
“걱정하지 마. 우리 애는 내가 잘 보살피고 있을게.”
로그리예가 침대에 걸터앉아 상냥한 손길로 가발 쓴 베개를 쓰다듬었다.
이라네리아는 그의 미친 짓에 잠깐 질린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르만. 따라와.”
“예, 공주님.”
두 사람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곧장 궁전 밖으로 나갈 줄 알았던 이라네리아는 다락과 지붕으로만 이루어진 3층으로 올라갔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복도 앞에 서서 잠시 무언가를 가늠해 보는가 싶더니 성큼성큼 걸어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바로 아래층의 발코니 보여?”
아르만이 창문을 열어 고개를 빼냈다.
약 3m 아래에 발코니가 보였다. 굳게 닫힌 창문으로는 방 내부의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