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아직 젖살이 통통한 볼에 커다랗고 쳐진 눈꼬리. 앙증맞은 코. 이라네리아 공주는 문자 그대로 천사 같은 생긴 아이였다.
그러나 곁에 있을수록 10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특히 늑대나 맹금류의 것처럼 선명한 황금색 눈동자 앞에 서면 속내가 다 파헤쳐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르만은 이라네리아 공주가 두려웠다.
게텔린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혐오에 가깝다면, 이라네리아 공주에게 느끼는 공포는 조금 더 본질적인 것에 가까웠다.
‘공주님이라면 게텔린 백작을 무너트릴 수 있지 않을까?’
아르만은 새싹처럼 피어나는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
그래 봤자 10살이다. 사교계에서 지위가 높은 것도 아니고, 교류하는 귀족도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게텔린을 저지하고 아르만의 아버지를 구해 줄 능력이 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네리아 공주는 며칠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보호를 바라는 것부터가 멍청한 짓이었지.’
그는 국왕 일가의 나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이라네리아 공주도 국왕의 자녀이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제 손으로 구해야 한다.
아르만은 이라네리아 공주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마카롱 밑면에 독을 발랐다. 그리고 그것을 키네시아가 보낸 것이라며 이라네리아에게 주었다.
이제 그녀가 다디단 독을 씹어 삼키면 모든 게 끝났다. 그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뭐야?”
아르만은 저도 모르게 마카롱을 든 이라네리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게…….”
치켜떴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에 아르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랫입술이 찢어져 핏물이 번졌다. 이라네리아는 그의 턱을 눌러 입술을 놓게 만들고 손수건을 꺼내 친히 피를 닦아 주었다.
손끝 하나하나에도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와는 태생부터가 다른, 고귀한 혈통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아……!”
아르만은 그제야 자신이 죽이려 했던 자가 왕족이라는 것을 통렬히 실감했다.
마음만 먹으면 평민 하나 죽이는 것은 어렵지도 않은 지체 높으신 분.
그럼에도 이라네리아는 아르만의 변심을 몇 번이고 눈감아 주었다. 평생 보지도 못할 귀한 약을 직접 발라 주었다.
그녀를 죽이려 마음먹은 이 순간에도, 그녀는 아르만의 피를 닦아 주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리 없다.
아버지가 잘못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차마 이라네리아의 손목을 놓을 수가 없어 눈물이 흘렀다.
“제가 공주님께서 드실 것에 독을 발랐습니다. 공주님을 죽인 뒤, 키네시아 공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요.”
아르만은 죽음을 각오하고 진실을 입에 올렸다.
그는 차마 이라네리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분명 배신감에 일그러져있겠지. 어쩌면 눈물을 흘리시거나 죽으라고 소리치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귓가로 흘러들어온 건 덤덤하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나한테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평소와 달리 약간의 흥미가 섞여 있기까지 했다. 아르만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예?”
“죽이려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뭐냐고.”
“……알고, 계셨습니까?”
“아무렴. 내가 누군데 그런 것도 모를까 봐? 너 나를 띄엄띄엄 봤구나?”
아르만을 말을 잃고 멍하니 제 공주님을 바라봤다.
“저는, 저, 저는.”
머리가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자 이라네리아가 고개를 가볍게 설레설레 저었다.
“네 대답에 따라 내가 계획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거든?”
이라네리아가 아르만의 손을 떼어 놓고 마카롱을 내려놨다.
그녀는 마카롱 윗면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니까 빨리 대답해.”
“저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게텔린과 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거야?”
“…….”
“좋아. 어쨌든 네가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너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줄게.”
“그게 무슨 말씀……, 공주님!”
아르만이 말리기도 전에 이라네리아가 마카롱을 입에 넣었다.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이라네리아의 입을 벌리고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경악하며 입을 벌렸지만, 그녀는 이미 독이 든 디저트를 씹어 삼킨 뒤였다.
“토, 토해 내십시오, 공주님! 토해 내셔야 합니다!”
이라네리아는 제 입속으로 들어오는 아르만의 손가락을 콱 물었다.
그는 손가락의 고통을 무시하고 이라네리아가 구토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이라네리아는 몸을 비틀어 아르만의 손을 떨쳐내고 그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아르만의 귀가 그녀의 입술에 가까워졌다.
“네 계획대로 키네시아를 범인으로 몰아. 그리고 네 두 눈으로, 윽, 똑똑히 확인해. 게텔린이 약속을 지키는지. 허억!”
“공주님, 말씀, 말씀하시면 안,”
“확인하고, 게텔린이 오늘 어디 있을지 알아내서 내 방으로 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라네리아는 정신을 잃었다.
그는 그제야 이라네리아가 독을 먹은 이유를 깨달았다.
‘공주님은 내가 직접 깨달을 기회를 주시려고 독을 드신 거야.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뭐라고…….’
하지만 감동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더 지체되었다가는 독이 완전히 몸에 퍼져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는 이라네리아를 안아 들고 궁정의가 있는 곳으로 달리며 다짐했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아버지를 안전한 곳에 모신 뒤, 공주님께 은혜를 갚을 것이라고.
자신에게 몇 번이나 기회를 주고, 독까지 삼키며 제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려 한 공주님께 꼭 도움이 되겠다고 말이다.
그는 이라네리아를 궁정의에게 맡기고 그녀가 시킨 일을 수행했다.
그리고 돈을 핑계로 저를 더 옭아매려 하는 게텔린의 뻔뻔한 행태까지 확인했다.
‘공주님 방으로 오라고 하셨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다리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곧장 이라네리아의 방으로 갔으나 바로 문을 열지는 못했다.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탓이다.
죄책감이 가슴을 무자비하게 쑤셔 댔다.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가 한숨을 내쉬고 문을 두드렸다.
곧 로그리예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르만을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르만이 침대 근처로 다가갔다.
이라네리아의 손을 잡고 있던 오틸리에가 지친 표정으로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그녀의 얼굴에 잠시 원망이 어렸다.
“아르만.”
“예, 전하.”
“정말 키네시아를 보았는가? 키네시아는 그럴 아이가 아닌데, 왜 그런 증언을…….”
오틸리에 왕비가 울음을 참으며 이라네리아의 작은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을 보자 플로레타가 다시 눈물을 흘리며 끅끅거렸다. 오틸리에는 딸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아르만을 쳐다보았다.
죄책감이 아르만의 등을 무겁게 짓눌러, 그는 허리를 깊게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한번 그날 일을 잘 떠올려 보겠습니다.”
“……아니네. 미안해 말게. 그대도 휘말린 거겠지. 그럴 게야.”
아르만은 고개를 푹 숙이고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방 안에는 플로레타가 울음을 참는 소리만 들렸다.
오틸리에는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로그리예가 다가가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다.
“전하, 이러다 쓰러지시겠어요. 플로레타도 그렇고. 공주님 곁은 제가 지킬 테니까 잠시라도 돌아가 쉬세요.”
“로그리예 공자.”
그의 검술이 어지간한 기사보다 뛰어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게다가 그의 가문은 약혼 이야기가 오갈 정도로 왕실과 긴밀하고 호의적인 사이였다. 그에게 이라네리아를 부탁하고 돌아가는 게 낫다.
어차피 여기 붙어 있어 봤자 오틸리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반면에 다른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돌아가서 아이들을 재우고 쓰러진 룩소르를 돌보고, 키네시아를 변호해야 했다.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이라네리아를 맡겨 두기 망설여졌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아이가 어떻게 되기라도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로그리예가 말을 덧붙였다.
“국왕 전하 곁은 포넨트가 지키고 있죠? 혼자 있으려면 힘들 거예요. 공주님도 아까보다는 훨씬 괜찮아 보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부를게요.”
“……그래요. 고마워요, 로그리예 공자.”
오틸리에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아픈 제 딸에게서 겨우 시선을 떼어 냈다.
“나는 플로레타를 재우고 국왕 전하께 가 볼게요. 아르만, 그대도 이곳에 있지 말고 그만 돌아가 쉬게.”
그녀는 로그리예에게 아르만을 돌려보내 달라고 눈빛으로 부탁했다.
로그리예가 고개를 끄덕이며 믿음직스럽게 웃었다.
오틸리에는 불안을 애써 억누르며 하인을 불렀다. 하인에게 플로레타를 안아 들게 한 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움직여 방을 나갔다.
이제 방 안에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로그리예와 아르만뿐이었다.
로그리예는 침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너도 이만 돌아가. 이라네리아 곁에는 내가 있을 테니까.”
아르만은 석상처럼 서서 이라네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배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한 아르만이 로그리예에게 대답했다.
“제가 공주님 곁에 있겠습니다. 공자님은 키네시아 공주님을 살펴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랬다간 공범으로 의심받을걸. 그리고 뭘 믿고 너에게 내 공주님을 맡기겠어.”
아르만은 로그리예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래를 숙였다.
로그리예는 그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이내 로그리예의 입매가 비틀렸다.
“너, 뭔가 알고 있지?”